단순언어지연이라는 함정

언제쯤 내 아이가 나에게 말대꾸를 할 수 있을까

by 레이첼쌤

내가 알기로는 "단순언어지연"이라는 의학적 진단명은 없다.

하지만 자주 가는 느린맘카페에 가보면 이 단순언어지연이라는 단어를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도 한 때는 아이가 단순히 말만 느린거라고 착각 아닌 착각을 한 적도 있다.


문자와 숫자 습득 시기가 굉장히 빨라서, 말은 언젠가 터지겠지 기다리다가 결국 감당하기 힘든 문제 행동으로 인해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상세불명의 언어발달지연"이었다.

상세불명이라는 단어를 한참 쳐다보았다.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뜻의 말인데 의사들이 참 자주 쓰는 용어인것 같다.

평상시에 가볍게 아파서 병원에 갈 때에도 처방전을 보면 상세불명의 두통, 상세불명의 신경통, 상세불명의 피부 알러지 등 쉽게 볼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상세불명의 언어발달지연이라는 진단을 이렇게 해석했다.

"이 아이는 자폐도 아니고, 발달 장애에도 속하지는 않지만 여태 애를 좀 잘 못 키워서 언어 발달이 늦어진것 같으니 부모가 신경 좀 쓰고, 양질의 언어 자극도 주고, 미디어 노출 좀 줄이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심하게 자책했다.

장난감 사주지 말고 언어 자극 좀 줄걸, 피곤하다고 누워있지 말고 한 번이라도 더 자주 외출하고 밖에 데리고 나가서 놀걸, 티비 스마트폰 아예 보여주지 말걸, 자연에 데리고 나가서 풀, 나무들 자주 접해줄걸, 중저음의 내 목소리를 일부러 뜯어고쳐서라도 맑은 솔톤으로 대화를 할걸..

그동안 아이에게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자책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러다가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넘어갔다.

왜 하필 애가 태어날때쯤에 사업을 시작해서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육아에 도움을 주지도 않았는지, 책에서 보니 아빠가 잘 놀아주는 아이들이 사회성도 좋다던데 아빠가 적극적으로 안 놀아줘서 이렇게 되버린건 아닌지, 다칠 위험이 있다는 핑계로 산으로, 계곡으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는 데리고 다니지도 않고 매번 다니던 마트이나 백화점만 데리고 다녀서 이 사단이 난건 아닌지.

남편이 못한 일들을 리스트로 정리해보자면 엄청나게 많았다.


그러나 이 일을 겪으면서 남편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기에 아이를 위해 일주일에 단 하루 일요일만큼은 일을 좀 쉬고 하루종일 아이와 함께하기로 했고, 내가 아이 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하면 왠만큼 수용하고 실천해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주 2회 센터치료를 시작하고, 주말마다 어디든 나가서 체험을 하고, 조카네 가족과 여행을 다니고, 미디어 노출을 최대한 자제시키고, 언어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말이 언젠가 언제그랬냐는듯 시원하게 트이겠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 아이의 언어는 확 터진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아주 천천히 힘겹게 한 계단 올라가면 정체되어 있다가 또 한 계단 올라가는 식으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말을 하기는 했지만 상호작용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하고, 궁금한게 있으면 먼저 묻기도 하고 대답하면 또 꼬리 물기로 이어지는 그런 식의 대화는 거의 7세가 되어서야 하게 된 것 같다.



궁금했다.

왜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잘 안되는건지.

그러면서 점점 나 혼자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이 아이의 언어발달지연은 상세불명이 아니라 무언가 커다란 원인이 있는거라고.

그 원인이 "자폐스펙트럼"이라는 진단으로 밝혀지는건 아닐까 두려워졌다.


보통 "단순언어지연"이었을 경우에는 주변의 도움과 센터 치료를 병행하면 단기간에 좋아져서 확 트인다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그야말로 다른 증상을 동반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환경적인 이유로 인해 언어만 조금 느린것이다. 느린 아이엄마들은 이 단순언어지연 진단을 받은 것에 대해 부러워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심플하게 말만 조금 느리니까, 말만 트이게 해주면 되니까, 다른 소아정신과적 질환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나도 내 아이가 단순언어지연이기를 바랬다.


결국 7세가 되어서야 종합심리검사인 풀배터리검사와 대학병원 진료로 ADHD 진단을 받았고, 그때서야 나는 이해가 할 수 있었다. 아이가 왜 말이 늦었는지.

아이는 청각적 주의집중력이 낮아서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리지 않고 중간만 끊겨서 들리거나 아예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건 신체의 청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나 청각-수용 학습장애가 있어서 귀로 들은 정보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그토록 시각적인 자극에 쉽게 매료되고 집착하고 문자 습득이 빨랐던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은 앞을 못 보는 대신에 청지각이 발달하여 예민해지고 보통 사람은 듣지 못하는 소리도 듣고 구분할 수 있는것처럼,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 잘 들리지 않고 집중력이 떨어지다보니, 반사효과로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것에 점점 더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ADHD에 대해 알아보고 공부하면 할수록, 아이의 보여준 과거의 행동들의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보통 아이들 같으면 하지 않을 독특한 행동 양상들의 원인이 밝혀져서 나는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자폐적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의심 가는 행동들도 보여주고 있어서 또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다시 해봐야 하나 일말의 의구심도 있다.


결국 단순언어지연은 아닌걸로 결론이 났지만, 말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분명히 알고, 나도 그에 적절한 대처와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처음에 검사를 시행했던 4,5살에 ADHD임을 알게 되었더라면 더 나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그 나이에는 어리기 때문에 검사 결과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 더욱이 언어발달까지 지체된 아이가 하는 검사들이란 결국 부모의 시각과 관점에 의존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정확한 진단이 나오기 어렵다. 6세 이전의 아이가 말이 늦거나 행동이 독특하다면 우선 검사를 받아보되 가정에서 적절한 언어 자극을 주고, 같이 몸으로 놀고, 뛰어다니면서 놀고, 엄마와의 애착을 탄탄하게 다지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할 수만 있다면 어린이집같은 보육기관을 보내기보다 힘들더라도 하루 종일 아이와 부대끼면서 함께 놀고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이 발달에는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된다. 비록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단순히 언어만 지연된 거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아이는 그런 "단순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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