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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n 14. 2024

남편 책 읽히기, 가능하냐구요?

아이 책육아보다 더 어렵다는 그것

내가 아는 한 남편은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고난 독서가는 아니라도, 블로그나 브런치에 보면 남자분들도 주식이나 재테크 등 관심 분야에 책을 꾸준히 읽는 사람들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내 남편은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한창 주식에 관심을 가질 때에는 큰 돈 투자해보고 싶으면 주식 책 몇 권이라도 읽어보라고 했더니 코웃음을 쳤다.


"흥, 재무제표 이따위 볼 줄 안다고 주식 투자 성공하는 줄 아니? 다 나만의 감이 있어."


제발 그 어설픈 감 따위 발휘하지 않기를 바랐다. 처음 한 두번은 운 좋게 초심자의 행운을 맛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글쎄 개미 투자자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은 아닌것 같았다.


차라리 책이라도 좀 열심히 읽으면서 나름대로 기업 분석도 하고 자기만의 투자 관점을 정립한 후에 천천히 시작해본다면 그나마 신뢰가 갈 것 같은데 유명 주식 유튜버 방송을 보고 단타를 치는 그런 식은 정말 별로였는데 말리지는 못했다. 정해진 한도 내에서만 할 것을 약속받은 후로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뼈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가지고 투자를 한다면 자기 돈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과 한 푼도 잃지 않겠다는 욕심이 있을터인데 이럴 때 보면 모험을 일삼는 남자의 본성은 이기기 힘든 것 같다.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갈 때마다 내 책을 빌리면서 주식 투자 관련 책도 한 권씩 빌려다가 식탁에 올려두었다. 감사하게도 요즘 책들은 제목이 저마다 굉장히 자극적이다. 육아서나 자녀교육서 쪽에 가보면 도저히 펴보면 안될것 같은, 자식을 잘 키워내고 싶은 엄마의 욕구를 뒤흔드는 제목의 책들이 넘쳐난다. 막상 읽어보면 거기서 거기, 자녀 교육에 뭐 특별나게 적용하는 마법의 육아 기술 따위는 없다.


주식 투자 책들도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약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주식으로 백억 부자 되다, 직장 그만두고 주식 투자로 성공하다 등 평범하디 평범한 너 같은 사람도 주식으로 나같은 부자 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책들로 즐비했다. 책에 대한 아무 기준 없이 그저 끌리는 제목의 책들을 한 권씩 가져왔더니 남편도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에는 책 좀 읽었던 문학 소년이었다던 말이 무색하게 연애시절부터 통틀어서 책 한 번 읽지 않던 남편이었다. 내가 아이 발달장애 책을 수십권씩 붙잡고 살 때도, 제발 한 권만 읽어보라고, 읽고 아이에 대해서 좀 이해해보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해도 한 두번, 몇 장 읽는척만 하고 말던 남편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내가 빌려다 놓은 주식 투자 책에는 조금 혹했는지 앉아서 잠깐씩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말 엄청난 변화였다. 아이랑 나랑 매일 저녁 시간 나란히 앉아 책을 읽는다. 독서 습관을 잡아주기 위해 시작한 루틴이었다. 엄마도 함께 책을 읽으면 좋지만, 아빠까지 다 같이 합세하면 아이에게 본보기도 되고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아 정식으로 남편에게 부탁했다. 다 같이 앉아서 책을 읽어보자고.



처음에는 흔쾌히 응했다. 자기도 그런 책 읽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거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런데 남편의 책 읽는 태도는 한 마디로 불량 그 자체였다.


책을 읽는다고 해놓구서 우리의 주의가 소홀한 틈을 타서 책 사이에 핸드폰을 껴놓고 보는 것이었다. 너무 꼴보기 싫었지만 애 앞에서 아빠가 몰래 핸드폰이나 보는 모습을 지적하는 것도 교육적이지 않을 것 같아서 참았다. 나중에 뒤돌아서서 곁눈질로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머쓱한 웃음을 짓고는 다시 핸드폰만 보는 남편이었다.


그래도 어쩌다 투자 책이 좀 읽힐만 하면 한 권 다 읽는 적도 있었다. 책 한 줄 안 읽던 과거에 비하면 그것도 어디냐 싶었다.


아이는 그래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기만 하면 나름대로 책에 흥미를 붙이고 곧잘 집중해서 읽기도 했다. 되려 제대로된 독서 습관을 들이기 힘든건 남편이었다. 아이와 내가 책에 빠져서 읽고 있으면 괜히 화장실 가는척 하거나, 무슨 일보러 다른 방에 가는 척 하면서 슬그머니 거실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뒤에 가보면 여지없이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이그.. 애를 위해서 몇 십분 책 좀 읽는게 그렇게 힘드냐..'


나도 이런 내가 싫었다. 왜 내가 감시해야만 책을 읽는건지, 스스로 좀 할 수는 없는건지, 하루종일 뼈빠지게 힘들게 일하고 온 양반한테 애 데리고 몸놀이하고 운동시켜달라는것도 아니고 옆에 지긋이 앉아서 책 좀 봐달라고 하는건데 그조차도 협조를 안하니 신경이 곤두섰다.


도서관에서 애써 주식 투자 책을 빌려와봤자 안 읽고 반납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자 아예 대출도 하지 않았다. 읽을 책이 없으니 괜히 아이 옆에 와서 읽는 책 내용을 물어보거나 제대로 읽는지 감시하면서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줬다.


내 원칙 중 하나는 애가 어떤식으로 책을 읽든간에 그저 뭐라도 읽기만 한다면 내버려두는 것이다. 책을 대충 읽든, 몇 장씩 그냥 넘겨버리든, 이해하지 못하든,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든, 완독을 다 하지 않든간에 그냥 잠깐이라도 글에 몰입하기만 한다면 상관 없다.


중요한건 아이가 책이라는 대상에 흥미를 가지고, 유지하면서 장기간의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특히나 언어발달도 느렸던 초등 저학년 아이에게 있어 책이란 무조건 재미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책이 공부의 대상이 되버리면 그나마 붙였던 관심조차 쉽게 나가떨어져버릴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 조심스러운 원칙을 묵살한 채 남편은 아이의 책 읽는 태도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본인이나 잘 읽을것이지 왜 애를 잡고 난리인지 어이가 없었지만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참았다.


어느 날은 아이도 애아빠도 읽고 싶은 책이 없다면서 나를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읽을게 정 없으면 만화로 나온 그리스 로마 신화나 보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한 두권 읽고 관심을 보이더니 점점 스토리가 꼬이고 복잡해지니 만화조차도 버거웠던지 안 읽고 내버려둔지 오래였다.


둘 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억지로 그리스로마신화 만화를 한 권 집어 들더니 같이 읽었다. 따로 읽을 책이 없던 남편도 아이와 같이 옆에서 읽었다. 의외로 둘은 점점 내용에 빠져들더니 생각보다 집중해서 읽었다. 서로 내용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주고 받으면서 대화도 나눴다. 왠일이야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는 책을 덮고 바로 티비를 보러 향했는데 남편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렸을 때 보고 다 잊었는데 오랜만에 보니까 재밌다면서 혼자 앉아서 계속 읽는 것이다.


'이거 왜이래.. 이 모습 너무 낯선데?'


나랑 아이가 이제 재밌는 예능한다고 그만 보고 티비 보자고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남편은 심각한 얼굴로 계속해서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었다. 한참을.



이 정도면 나.. 남편책육아에 성공한건가?


애보다 남편 책 읽히는게 세상 가장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는데, 본인이 재미를 느끼니까 '스스로' 앉아서 그 좋아하는 예능을 포기하고 책을 읽는 것이다. 내색은 안했지만 상당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하기도 하구나..?!

아이 발달 문제로 고민이 많을 때 제발 읽어보라던 발달장애 서적도 거들떠도 보지 않던 사람임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이고 발전인 것이다.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책을 읽게 만드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미요, 흥미라는 것이다.

본인이 재미를 느끼니까 티비도 핸드폰도 마다하고 책을 읽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느꼈다.


그 후로 나는 아이에게도 원하면 만화책도 얼마든지 보게 하고 있다. 문해력 키우는데에 하등 도움이 안될것 같고 교육전문가들도 하나같이 학습만화에 빠지만 위험하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일단은 아이가 책에 대한 호감을 유지하는게 중요하니까.


고학년 되면 학습만화라도 제발 봐라,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고 하니. 하루에 한 번이라도 스마트기기 대신 책이라는 형태에 집중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경험 아닐까 싶다.


그리스로마신화 만화를 다 읽고 나서 남편의 독서 이력은 다시 방황기로 접어 들었다. 그래도 최소한 우리가 책읽을 때 몰래 가리고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는 행동은 더이상 하지는 않는다. 신문이라도 들고와서 재미없는 기사라도 읽는 척은 해주니, 뭐 그 정도라도 감사할 뿐이다. 이럴 땐 정말이지, 내가 키우는건 자식뿐만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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