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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n 07. 2024

싸움 구경 좀 하면 안 되니

벤치클리어링 보다가 혼난 사람


야구 직관을 하러 간 날이었다. 친구가 이번에 KT 대 한화전에서 벤치클리어링 사건이 있었는데 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벤치클리어링'이라는 표현조차도 생소했던 나는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


벤치 클리어링이란 영어권 국가에서 쓰이는 스포츠 용어로, 말 그대로 bench를 clear(빠져나가다, 정리하고 없애다)했다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는 팀 스포츠 경기에서 양 팀 선수 사이에  신경전이나 폭행이 벌어질 때, 벤치에 있는 모든 선수가 같은 팀 선수를 위해 경기장으로 뛰어나오는 일이다.


'아.. 야구에서 그런 용어도 있구나..'


새로운 걸 배운 느낌이었다. 야구라는 스포츠의 매력을 알게 되고 열심히 경기를 빠지지 않고 본 지 몇 년째인데 그런 개념은 처음 들어본 것이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양 팀 선수들 감정이 폭발한 건지 궁금해져서 영상을 찾아보았다.


사건은 이러했다. 한화 투수가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삼진 아웃을 시킬 때마다 승리감에 도취해서 환호의 세리머니를 좀 격하게 했다. 이에 격분한 KT 선수들이 불쾌한 감정을 더그아웃에서 감추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다행인데 경기가 정식으로 끝나자마자 KT의 선수가 화가 난 표정으로 누군가를 부르며 뛰쳐나왔고 소환당한 한화 선수도 뭘 잘못했냐는 표정으로 지지 않고 맞대응했다.


그 순간 양 팀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모두 경기장으로 나오게 되었고 물론 싸움이 더 크게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그래도 정규 방송 아나운서는 사뭇 격한 싸움으로 커질만한 상황이었는데도 굉장히 우아하고 정제된 표현으로 상황을 중계했다.


"선수들의 격한 감정이 표출되고 있는 장면을 보시고 계십니다.."


체구가 큰 야구 선수들 수십 명이 서서 대립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더럭 겁이 나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을 이렇게 순화된 표현으로 정리해 주는 아나운서도 사뭇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 팀 감독들이 나서서 상황은 금방 정리되고 선수들은 경기장을 떠났지만, 그 모습은 영상으로 남아서 많은 이들에 의해 반복재생되는 듯하다.


남의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다고 했나..


이 영상을 보고 나니 나는 그간 야구에서 있었던 또 다른 '벤치클리어링' 사건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화돼서 자칫 징계를 받을지도 모르는 프로 선수들의 경기에서 화를 표출하고 마는 선수들의 모습, 그리고 그걸 보면서 나라도 저 상황이면 화 날만도 하겠다는 공감 혹은 저건 좀 심 했다 하는 반감을 느끼는 데에서 나도 모르게 재미를 느꼈다.


그중에서도 대미는 선수들의 입모양을 보는 것이다. 소리에 묻혀서 방송에 나오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흔히 알만한 욕을 가감 없이 뱉어내는 선수들의 입을 보면서 방금 어떤 욕을 한 건지 맞춰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평소에 욕을 즐겨하지도 않고, 또 욕을 사용해서도 안 되는 도덕성을 지키는 게 중요한 직업인지라 편하게 욕을 써보지는 못한다.(?) 그런데 왜 선수들이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 쓰는 그 말들을 보면 약간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걸까.


그 후에도 벤치클리어링에 꽂혀서 역대급 벤치클리어링, 벤치클리어링 레전드, 메이저리그 벤치클리어링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검색하면서 재밌는 영상을 먹잇감 찾듯 훑어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이도 옆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잠깐 같이 보게 되었다.


남편은 처음에는 그런 영상 흔히 자주 볼 수 있는데 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굳이 찾아보느냐는 반응이었다.

아이도 야구선수들이 화가 나서 싸우는 모습을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는지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했다. 이어서 남편은 애도 있는데 그만 보라고 했다.


짧은 쇼츠 영상 하나가 더 뜨길래 그것만 보고 끄겠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불쑥 남편은 화를 냈다.


"그만 보라고 말했잖아. 이제 꺼! 옆에 애도 있는데 그게 뭐가 재밌다고 뭐 하는 거야..?!"


"..."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어이가 없었다.


평소에 아이에게 유튜브를 안 보여 주려고 최대한 차단하는 나의 노력을 잘 안다. 가끔 아이가 봐도 될만한, 크게 불건전하지 않은 영상 정도만 같이 보려고 신경을 쓰는 편이다. 하지만 벤치클리얼이 장면을 보는 건 아무래도 자극적일 것 같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십분 이십 분 넋 놓고 연달아 본 것도 아니고 잠깐 찾아보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못마땅할 일인가..


어찌 보면 남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니, 나는 그대로 순응하고 유튜브를 끈 채 바로 설거지를 하러 갔다.



남편 말이 맞긴 하는데 왠지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애도 이제 클 만큼 컸고, 욕을 모르는 나이도 아니다. 반에서는 항상 외향적이고 활달한 아이들 몇 명이 욕을 쓰다가 선생님에게 걸려서 벌을 받는 일이 자주 있다고 했다. 아이는 워낙 사회성도 없고 유순한 편이라서 욕을 쓸 줄도 모르고, 더군다나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시점에 욕을 적절히(?) 써야 하는지에 대한 화용능력은 더더욱 부족하다.


그런 아이에게 욕을 먼저 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너에게 악의를 가지고 욕을 한다면 그에 준하는 강한 표현으로 맞설 필요는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안다고 상대가 만만하다고 여겨지면 더 건드리고 싶고 자극하고 싶은 게 어린아이들의 본능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따뜻하고 예의 바른말만 사용하는 교과서적인 세상은 이미 학교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가정에서 아무리 바른말, 고운 말만 쓰며 지낸다고 해도 학교에 가서 또래집단을 만나면 여지없이 유행하는 비속어와 욕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비록 느린 아이지만, 또래 집단의 속성을 조금씩은 인지하며 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벤치 클리어링 사태 영상을 함께 보여준 건 아니지만, 그 정도 수위의 영상을 아이와 함께 본다고 해서 아이의 정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폭력이 동반되는 내용도 아니었고 화가 나서 몸싸움을 시도하려다가 양 팀 선수들에 의해 중재되는 흐름의 영상이었다. 이런 것도 뭐 안 보여주는 게 이상적이라 할 수 있지만.


남편은 그런 거 보고 싶으면 혼자 있을 때 보라면서 일침을 가했다. 할 말이 없었다. 화도 났다. 틀린 말은 아니기에 별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참고 넘겼다. 한동안 냉랭하게 대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설마 그런 일로 화가 났냐는 제스처를 보내왔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남의 싸움 구경 좀 한 게 무슨 죄냐..

솔직히 그런 거 처음 봐서 좀 재밌어서 넋 놓고 봤다고.. 한 시간 두 시간 본 것도 아니고 잠깐 본 걸 가지고..


남편 말대로 아이 등교시키고 나서 혼자 찾아봤는데 몇 개 보다 보니 금방 질린다. 그게 그거고, 경기하다 보면 화가 나는 순간들의 패턴은 다들 비슷하고 양 팀선수들이 뛰어나와서 난장판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중재하는 게 대부분인데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나오니 상황이 더 격 해 보일 뿐이다.


아무튼 남편님 말대로 애 앞에서는 앞으로 자극적인 영상은 보지 않겠습니다.. 본인은 뭐 얼마나 교육적인 영상만 보는 것도 아니면서,라고 응수하고 싶었지만 혼자 보는 거라고 하면 할 말이 없으니 오늘의 부부싸움은 요기까지만 하는 걸로. 끝.




*이미지출처: MBC 중계화면, MHN스포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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