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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an 12. 2024

어휘가 전부였다

전문가를 만드는 단순한 차이

주일날 교회 예배당에 앉아 여느 때처럼 영혼 없이 설교를 듣고 있었다. 아무런 직책도 맡고 있지 않고 그저 주일날 한 번 예배에 한 시간씩 참석하는 것만 겨우 지키고 있는 나일론신자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자면, 가끔은 마음에 와닿기도 하고 감동적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날은 평소 담임목사님이 아닌 다른 부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셨는데, 어찌나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시는지 그 기운에 이끌려서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정말 말을 잘하신다. 언제부터 저렇게 남들 앞에서 말을 잘했을까, 태어났을 때부터 저런 능력을 타고난 건가 궁금해질 정도다. 말투는 부드럽고 온화한데 높낮이가 있어서 지루하지 않고, 설교 말씀 내용에 따라 표정 변화도 더해져서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다 설교에 능하다. 그리고 성경 공부를 많이 하셔서인지 성경속 어휘들을 쉴새없이 쏟아낸다.


아이가 주일학교에서 대표기도를 맡게 되었는데, 간단하게 1분짜리 기도문을 대신 써주어야 했다. 대단히 잘 쓸 필요도 없고, 아이 눈높이에서 간단하게 쓰면 되는 거였는데도 막상 쓰려니 너무 어려웠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독서 습관 들인다고 꽤 많은 책을 읽었는데도 이 짧은 기도문 하나 쓰기 어려운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결국 시어머니께 SOS를 보냈고, 단 몇 분만에 아주 그럴싸한 기도문을 뚝딱 작성해서 보내주셨고, 확인해 보고 고칠 부분은 손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은혜, 영광, 거룩하심 등 교회에서 주로 쓰는 성경 구절에 나오는 단어들이 있는데 내가 평소에 주로 쓰는 어휘가 아니다 보니 영 머릿속에서 떠오르지를 않았다. 어머님은 젊은 시절부터 수십 년간 신실한 기독교 신자셨고 성경 필사도 몇 번 하실 정도로 열렬하셨다. 큰 교회에서 대표 기도쯤 수백 번 하셨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문에 쓰일만한 적절한 어휘들이 금방 팍팍 떠올라서 순식간에 글을 써주신 것이다.


아이는 어머님이 주신 글을 바탕으로 한 기도문을 가지고 나와 함께 의논하면서 수정한 후에 주일학교에 가서 멋지게 기도를 드렸고, 전도사님과 주일학교 선생님께 무한 칭찬을 받았다. (이 분들은 잘하든 못하든 늘 폭풍칭찬해주신다.)









한 달에 한 번씩 아이 약물 처방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본다. 길어봐야 10분이고, 혼자 갈 때는 5분 이내에 진료는 끝이 난다. 요즘 아이의 행동은 어떠한지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가 아이의 문제 행동과 갖고 있는 의구심이나 고민들을 이야기하면 원장님은 그에 걸맞은 적절한 정신의학적 용어로 설명해 주신다.


그러면 나는 답답했던 마음이 탁! 풀리면서 아, 그런 거였구나 하는 마음이 들고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사실 원장님의 그 짧은 의학적 조언이 당장 상황을 달라지게 하는 것도 아니고, 해결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나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전문가가 전문가만 알법한 적법한 언어로 문제행동과 어려움에 대해 설명해 주면 마치 마술에 걸린 듯 혜안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곧 편해진다.


아이의 원인 상세불명의 언어발달지연과 자폐 의심이 가는 행동양상들로 너무 괴로웠던 시기에 대학병원에서 서 진료를 보고 각종 발달검사를 하고 나서 ADHD라는 진단명이 주어졌을 때에도, 나는 십 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듯했다. 그저 아이의 문제점과 부족한 사회성과 늘지 않는 언어 수준만 보고 있을 때는 걱정되고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의학적 진단명이 주어지고 나니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발달장애에 관한 비주류 치료요법이라 할 수 있는 토마티스 청지각 훈련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에도 나는 이 "전문가의 어휘"라는 화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뇌발달 관련 책을 읽다가 우연히 청지각 훈련히 ADHD 증상 완화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되었고, 그 치료를 운영하는 센터에 연락하고 방문해 보았다.


처음에는 반신반의였다. 생각보다 비용도 상당히 비쌌고, 정말 효과가 있는 치료라면 약물치료나 행동수정치료와 함께 이미 대중화되어 각종 병원에서도 운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토마티스 트레이닝을 받은듯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나는 안심이 되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제외하고 내가 여태까지 아이의 발달치료를 하면서 만났던 센터선생님이나 전문가들 중에서 가장 신뢰가 갈만한 역량을 갖추고 계셨다. 그분은 발달 문제에 관해 다방면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나의 시선에 맞춰서 풀어 설명할 줄 아셨고, 아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를 바탕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장시간 설명해 주었다. 마지막에는 내가 지칠 정도로 오랫동안 붙잡고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셨는데, 지금까지 이쪽 관련 일을 하는 분들 중 어느 누구도 발달문제에 대해서 이토록 깊고 상세하게 나와 상담해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치료라는 것도 결국 비용과 연결되는 것이고,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자기네 치료법에 대한 신뢰를 주기 위한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선생님이 설명을 할 때마다 나 나름대로 책을 통해 읽었던 청지각 치료에 관한 정보와 지금껏 아이를 위해 공부한 발달장애와 ADHD 관련 내용들에 대해서 가감 없이 말했다. 설명하고 있는 내용에 걸맞은 용어를 내비치며 맞장구치는 식으로 말이다.


부모인 내가 아이가 받을 치료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고, 그 누구보다 아이의 지금 상태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 전문가가 말하는 용어들을 어휘들을 절반 이상은 알고 이해해야 하며 그 어휘들에 압도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필히 나도 아이에 대해서, 발달 문제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그 세계 어휘들을 접하기 어렵고, 그러면 그들이 내세우는 치료법에 관해 이해도 못할 것이고 무엇이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 감을 잡기도 힘들 것이다.


비주류 치료 요법이지만 나 나름대로 공부한 걸 바탕으로 어느 정도 타당한 근거가 쌓였고, 센터 치료 방식도 괜찮아 보여서 일단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고 치료를 받는 중이다. 그 와중에도 청각치료법에 관한 책을 꾸준히 읽는 중이다. 전공이 아니라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지도 그래도 조금이나마 알아가려 한다.









처음 엄마표 영어 책을 접했을 때에도 나는 이와 비슷하게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의 영어란 무조건 좋은 학원을 보내고 능력 있는 원어민 선생님을 붙여주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나도 어려서 사교육을 통해 영어를 시작했고, 흥미를 갖게 되었고, 실력을 쌓은 케이스다. 그 시절엔 집에서 엄마가 붙잡고 아이의 영어를 집에서 가르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그저 내가 사교육에 노출되던 시기보다 한 발 앞서 더 어린 나이에 더 신속하게 적절한 사교육으로 영어를 노출시켜 주면 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전 엄마표영어라는 개념의 창시격인 책을 접했을 때의 그 충격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영어 노출이라는 그 방식도 신선하긴 했지만, 그 책에서 나오는 용어들이 너무나 생소했다. 영어전공이라는 내가 부끄럽게 느껴질 만큼 엄마표 영어에 관해서 나는 무지했고 아는 바가 없었다. 챕터북이니 리더스북이니 집들이니 흘려듣기니 렉사일 지수니 ORT니 하는 용어들이 너무나 낯설고 어색했다. 이 많은걸 언제 다 공부하고 연구해서 내 아이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지.. 책을 읽고 나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느낌보다는 더 답답하고 암울한 기분만 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전문적으로 각 잡고 엄마표 영어에 대해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눈에 띌 때마다 한 번씩 그 분야 책을 읽었다. 지금은 아이의 발달 문제로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한 번씩 훑는다는 기분으로 읽곤 했다.


신기하게도 읽으면 읽을수록 이제는 덜 압도당한다. 아직 스토리북이나 리더스북들의 종류와 추천서들은 너무나 방대해서 모르는 게 대다수지만 기본 개념은 알고 있으니 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책 제목들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잘 정리된 내용들을 저장해 두고 내가 필요할 때, 아이의 취향을 고려해서 적절한 자료를 취사 선택하면 된다. 선택에는 비용이 따르기 때문에 신중함이 필요하지만 엄마표영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를 때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사실 영어교육 전공을 나도 이러할진대 전혀 관련 전공이 아닌 엄마라면, 더 부담될 거라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엄마표영어 인플루언서들 중에는 전공이 아닌 분들도 분명히 계시고, 아이에게 노출은 시켜줬지만 본인은 따로 공부하지 않아 영어실력이 늘지는 않았다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관련 정보를 끊임없이 검색하고, 선택하고, 저장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을 것이다.


아직 나도 본격적으로 엄마표영어를 한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나와 내 아이에게 가장 맞는 방식이 무엇일지 계속 고민하는 중이고, 어떤 식으로 하면 효과적이겠다는 느낌은 대략적으로 갖춰진 상태다.









아는 형님의 김희철 씨를 보다 보면 놀랄 때가 있다. 가끔 유명한 영화의 유명 대사를 그 어조와 톤에 정확히 맞게 읊을 때가 있는데, 정말 한 씨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다. 옆에서 다들 놀라면 "나 이 영화 스무 번 넘게 봤어."라고 대답한다. 좋아하는 걸 여러 번 보고 그것을 툭 치면 바로 나올 정도로 달달 암기했다는 건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을 방송에서 가감 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예능에서는 그게 전문가고 전문가의 어휘인 것 같다.


아이돌 중에 본인의 노래에 따르는 춤 말고도, 최신 아이돌 노래가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춤을 정확히 재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놀랍다. 아무리 타고난 춤꾼이라고 해도 본인 노래가 아닌 이상 다른 가수들 춤이라면 보고 똑같이 따라 하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 연습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노래와 춤이 아이돌들에게는 그들을 일반인과 구분하는 전문가로서의 어휘이다.


어차피 예능은 나와 거리가 먼 분야라 상관없지만 시사하는 바는 크다. 목사님이든 의사든 치료전문가든 법조인이든 엄마표영어 산증인이든 연예인이든 자기 분야에 통달하기 위해 몇 년간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정제되고 시의적절한 어휘로 표출된다.


내가 그 직업을 가질 것은 아니고, 그 분야 일을 할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일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럴 때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내 코 베어가시오, 하며 당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한다.


정문정 작가가 큰 교통사고가 나서 장기간의 입원 및 통원치료를 받은적이 있다고 했다. 생사가 오갈 정도로 심각하진 않아도 부상이 상당히 컸기에 치료과정도 고통스러웠고 언제 완쾌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사고 가해자 보험회사 담당자가 와서 적당한 금액에 합의할 것을 종용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금액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 다 나을지도 모르고, 치료에 전념하느라 계속 거부했고, 나중에는 점점 더 직급이 높은 사람이 와서 자꾸 합의하자고 설득을 했다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교통사고 보험 합의금 관련된 정보를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공부도 하고, 변호사나 손해사정사같은 전문가에게 유료 상담도 받아 적정 합의금선을 알아낸 후에 보험회사에 준비한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고, 결국 받아들였다고 한다. 보험에 대해 아는게 없었다면 초반에 그냥 합의하라는 대로 무턱대고 합의하고 아쉽게 끝날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부를 해야, 알고 있어야 그 어휘에 조금이나마 친숙해질 것이고 내가 필요한 부분과 그들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부분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다.


반성도 한다. 그간 나는 내 전공분야에서 얼마만큼의 어휘를 습득하고 내공을 쌓아왔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다. 조금, 아니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리고 새롭게 고민을 시작해보려 한다. 지금 내가 쌓아가야 할 어휘는 어떤 분야의 것이어야 하는지. 어디에 집중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서 소화시켜서 나를 발전시키고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꼭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조금씩, 꾸준히 쌓아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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