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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pr 08. 2024

조건부 협박육아

육아서 수백 권 읽고 겨우

끝없이 도파민 자극을 추구하는 아이의 성향 탓인지, 나를 닮아 여행을 좋아하는 건지 알 수 없는데 언제부터인가 아이는 여행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언어발달지연 진단을 받고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쏟아붓던 시기,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든 많이 데리고 다니면서 "다양한 체험"을 시켜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발달에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다고 들은 탓이다.


가까운 근교부터 몇 시간 걸리는 먼 지역까지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다. 여행에 드는 비용은 크게 아깝지가 않았다. 능력이 되는 한에서 기왕이면 편하고 깔끔한 숙소를 예약해서 주말마다 1박 2일 여행도 자주 갔더랬다.


각고의 노력으로 아이는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그런대로 잘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작용이 생겼다. 네다섯 살부터 여기저기 여행을 자주 다녀서인지 아이는 어디론가 여행 떠나는 걸 너무 좋아하게 돼버린 거다.


가까운 일본과 동남아까지 다녀왔더니 이제는 스케일이 제법 커져서 더 먼 곳으로의 해외여행을 꿈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애 성장시키려고 자주 여행을 다닌 것은 후회되지 않으나,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기니 사뭇 당황스러웠다.


예전에는 내 주도로 여행을 계획하고 숙소를 알아보고 일정을 짰다면, 이제는 거꾸로 아이 주도형이 돼버린 모양새다. 제 스스로 노트북을 켜고 여행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각 대륙별 여행 상품을 검색하면서 어딜 가볼까 연구하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면 한숨부터 나온다. 여행비용은 뭐 땅 파면 다 마련되는 줄 아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크다는 걸 깨달은 만큼 자란 것 같기도 해서 흐뭇한 마음 든다.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쏠비치 리조트가 좋아 보인다면서 얼마 전부터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해외여행은 올해에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더니 이제 국내 여행으로 한 수 양보하고 알아보는 것이다. 애가 어렸을 때는 나도 그만큼 어렸어서(30대라 펄펄 날아다녔음?) 어디든 데리고 다닐 에너지가 넘쳤지만 이제는 주말에 멀리 안 가고 집 앞 산책만 해도 딱 좋다. 여행을 가면 당연히 흥도 나고 재미있지만 여행 끝에 그 여독이 생각보다 오래간다.


엄마, 아빠가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아랑곳도 하지 않는 녀석은 날짜까지 정하고 같이 갈 친구네 가족까지 정해서 빨리 쏠비치 리조트를 예약해 달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1박 가격도 다 알아보고 이 정도면 비싼 편은 아니라고 어필하기까지 하면서.


아이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예약을 해주었다. 전에 한 번 가 본 곳이라서 굳이 다시 가보고 싶은 리조트도 아니지만 몇 주 동안 조르는 아이에게 못 이기는 척 넘어가주었다.


대신 그때부터 내 협박 아닌 협박은 시작되었다.


"너, 이렇게 말 안 들으면 리조트 취소할 거야."

"학교 가기 싫다고 등교거부하면 리조트 취소야, 알지?"

"뭐라고? 학습지 풀기 싫어? 지금 앱 들어가서 취소할까?"


숙소 예약을 한 뒤로부터 하루에도 열 번씩 나도 모르게 "취소 협박"을 아이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취소하겠다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대 충성을 다짐하며 숙제도 하고 제 할 일도 해내려고 한다.


여행이 이 정도로 강력한 동기부여 자극제가 될 줄 알았다면 진작 더 유용하게 활용할걸 그랬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너무나 자주 이걸 협박용으로 애용하는 나 자신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설득하는데 겨우 이런 외부적인 자극제를 가지고 볼모 삼아 한껏 이용하게 있는 게 과연 적절한 방식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방식으로 아이의 동기를 이끌어내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모해주어야 하는데 기껏 이따위 것으로 아이의 행동을 제재하려고 들다니. 나 지금까지 그 많은 육아서 왜 읽은 거지? 현타가 온다.


육아서란 무릇 읽을 때는 반성하고 나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만들지만, 뒤돌아서면 다 까먹게 되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읽을 때만 한 순간이다. 막상 아이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보낼 때면 당장에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손쉬운 방법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도 순간이나마 반성하고 다짐하며 각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면에서 읽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볼 수 있지만 육아서 한 권 안 읽고도 육아하는 엄마보다 내가 더 나은 엄마라는 확신은 없다. 엄마로서의 자존감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기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로 인한 행동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데, 나를 보고 있으면 육아서의 영향력이 참 미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5월 초에 예약된 리조트 여행 덕분에 4월까지는 애가 등교거부 안 하고 말 좀 잘 듣겠구나 하는 생각에 한시름 놓게 되는 나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 나은 방식은 없나 하고 질문하게 된다.


"이거 해주면, 엄마도 이렇게 해줄게." 식으로 네가 잘 협조해야 나도 그만큼을 내어 줄 수 있다는 조건부 협상을 끝없이 한다. 아이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에 이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궁금하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아니라서, 엄마는 처음이라서 그런다지만 가끔은 내 능력치의 한계가 여기까지라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도 들고.


생각은 생각일 뿐, 그럼에도 참 다행이다. 여행 전까지 아이를 협박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겨서. 벌써 걱정된다. 여행 다녀오면 또 무슨 구실로 애를 구슬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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