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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l 17. 2024

감사도 함부로 하는거 아니다

감사는 정말로 순수한 마음인가 관한 통찰

교회 예배 시간이었다. 그 날은 특별히 해외에 선교활동을 다녀온 청년부의 간증이 있었다. 주로 선교활동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와 같은 제3세계 국가들로 가는것 같았다. 이번에도 기독교가 아직 탄압 당하고 있는 종교와 정치에 있어 민주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나라로 선교활동을 다녀왔다. 그 나라에서도 신체 정신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어린이와 유아 장애인을 돌보는 기관으로 다녀왔다고 했다.


짧은 선교 영상만 봐도 그냥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로 그 곳의 상황은 많이 어두워보였다. 우리 나라같은 OECD에 속하는 나름 선진국 대열에 속했다는 나라도 아직 장애인에 대한 교육과 처우가 열악하고 어려움이 많은데, 그 국가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싶었다. 더군다나 시골 지방 쪽이라 더욱 제대로된 지원과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인 것 같았다.


청년들은 그 곳으로 선교를 다녀와서 무엇을 느꼈는가. 대체로 내용은 다 비슷했다. 그들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고 슬펐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해간 것들을 보여주고 공유했고 힘든 상황에서도 해맑게 웃으며 함께해준 장애우들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정말로 영상에서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한 불구의 아이들도 함께 율동을 하고 게임을 하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모습이 유독 많이 잡혀 있었다.


청년들이 전한 간증의 마무리는 감사함이었다. 그들의 열악한 상황을 보니, 어떻게 해서도 더 나아지기 힘든 환경을 보고 나니, 지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며, 그것들을 당연시하며 살고 있었는가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고 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들에 비해 나는, 또 우리는 깨끗하고 아늑한 집이 있고 내 방이 따로 있으며, 늘 마실 깨끗한 물이 있고,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당장 오늘 하루의 먹을 음식이 없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 먼 나라까지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면서 느낀 것이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공감하며 들었다. 그러나 후에 혼자 깊이 생각해보면서 그 간증에서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을 읽었다. 소설은 '재난 여행'을 주제로 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충격-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 - 내 삶에 대한 감사 -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으로 진행된다.
어느 단계까지 마음이 움직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

<밤의 여행자들>


이 구절을 접하면서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예배 시간에 선교 활동 간증을 들으면서 느꼈던 묘한 불편한 감정, 그게 무엇이었는지 뚜렷이 알게 된 것이다.


선교활동 자체야 숭고하고 정말 대단한 봉사이며 헌신일 수 있지만 그 사람들보다 내가 더 낫다는 우월감을 느끼며 그러니 마땅히 내 삶에 감사해야할 명분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워보인다.


그들보다 더 잘사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타고나기를 덜 가진 환경에서 자랄 수 밖에 없는 더 못 사는 나라에서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목도하고, 적어도 나는 그들보다 나으니까 불평 불만하지 않고 지금 내 삶에 감사하자는 깨달음 혹은 교훈을 얻는 일련의 과정은 과연 선하고 정당한 일인지 궁금해졌다.



 <밤의 여행자들>에서는 재난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요소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처참할 것과 재난의 끔찍함 속에서 피어난 감동스토리 등 말이다. 그래야만 바쁜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동정하고, 신선한 아픔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쾌락원칙에 의하면 우리는 재난이나 고통을 원해서는 안되고 지독한 가난이나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하면 안된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잔혹성에 눈을 뺏긴다.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 고통을 이미지로 확인할 때, 사람들은 값싼 우월감을 느끼고 숭고를 접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 속에서 살아갈 힘, 에로스를 얻는다.

<밤의 여행자들>



자기계발서는 심리서든 수많은 책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사항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감사하라는 것이다. 지금 내 삶에 감사,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 또 감사하라고. 심지어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감사한 것 세 가지를 쓰라고. 어떤 친절한 책에서는 감사해야할 범주도 정해서 소개해줬는데 나에 대한 감사, 남에 대한 감사, 세상에 대한 감사 등으로 분류해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쓰면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당연히 감사 그 자체는 아무 죄가 없다. 불평, 불만하고 투정하는 감정보다야 훨씬 상위에 있는 긍정적인 감정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 감사라는게 남과의 비교에서 나온 우월함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그게 진정 의미가 있을까?


나도 한 때 감사일기를 죽어라 썼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 때문에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삶이 고통스러워서, 견디기 힘들어서 매일 새벽 일어나서 다이어리에 이것 저것 감사할 것들을 썼다. 그 내용을 보면 차마 내놓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아이를 빼놓고는' 나머지 내 인생에서 감사해야할 게 의외로 많았다.


더군다나 숭고하고 본질적인 감사를 할 줄 몰랐던 나는 나에게 주어진 물질적인것에 대한 감사가 적지 않았다. 직업이 없는 사람보다는,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보다는, 생활보호대상자보다는, 이혼가정보다는, 그래도 그들보다는 내 형편이 더 낫지 않은가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감사가 꽤 많았다.


나의 기본 인간됨이 부족한 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은 우월함에서 비롯된 감사함을 느끼는것 같다. 뜻밖의 재난과 황당한 사고로 인해 세상을 등지게 된 사람들 기사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에는, 최소한 나는 그 현장에 없었고 나는 그 재난을 피했다는 일말의 안도감도 포함되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녕 인간은 타인의 고통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 존재일까.


아이를 데리고 발달센터에 다니면서 봤던 수 많은 장애 등급을 받았을법한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내 아이는 장애등급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받을 정도는 아니라서, 그나마 경계에 서 있는 장애라서 다행이다라고 스쳐지나가는듯한 생각으로라도 한 적이 없었을까. 동정과 연민의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는 않았나. 부끄럽지만 전혀 그런 적 없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외관으로 봐도 특수학급에 다니고 있을 것 같은 아이를 동네에서 자주 마주쳤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인근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최근에는 늘 사복을 입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키가 큰 편이 아니어서 고등학생이 됐을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궁금해졌다.


어느 날 엄마랑 함께 학교에 가는 그 아이를 마주쳤다. 왠만하면 주변 이웃을 만나도 간단한 목례 인사 이외에 말을 걸지는 않는 편인데, 나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느냐고, 많이 큰것 같다고 그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갑작스런 나의 다가감에 살짝 놀란듯한 엄마는 작년에 졸업하고 이번에 인근 고등학교 도움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대화 끝에 그 어머니께서 내게 "제 아이에게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근래에 남에게 들어본 말 중 가장 예쁜 말이었다. 아이를 향한 내 관심을 불편해할 수도 있고, 네가 뭔데 남의 애를 궁금해하느냐고 볼 수도 있는데 그 엄마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반응해주신거다.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왜 그간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내 아이도 어려움을 겪는 처지라 동정과 연민의 감정에서 관심이 간걸까? 혹시나 값싼 우월감에서 나온 이기적인 위안에서 그 아이를 바라본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나는 정말 역겨운 인간이다. 굳이 핑계를 대보자면, 어려움이 있는 자식을 키우다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내 스펙트럼도 더 넓어진 덕에 전같으면 관심도 없이 지나칠 그 아이가 유독 눈에 들어왔던게 아닐까 싶다.


앞으로 어떤 일에든 감사함을 느끼더라도, 또는 의도적으로 감사일기를 쓰면서 범사에 감사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쓰더라도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남과의 비교에서 나온 저질스러운 감사함은 되도록 피해야겠다. 차라리 그건 안하느니만 못한 못난 감사함이 아닐까. 좀 더 순수하고 신성한 감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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