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하게 그냥 아무나 되고 싶다
상당히 오래전에 방송에 나왔던 장면인데 나는 이걸 이제야 봤다. 이효리 씨는 정말 명언 제조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능이든 어디 한 번 나왔다 하면 시원통쾌한 말을 날려주거나 강적 김구라 같은 사람에게도 거침없이 일침을 가한다.
어디서 이렇게 깊은 삶의 통찰이 나올까 궁금하기도 한데, 그건 아마 이효리 씨 자체가 남의 눈치를 덜 보고 하고 싶은 말을 그나마 할 줄 아는 드문 한국인(?) 혹은 연예인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보통은 자기 이미지를 생각해서, 말과 표현을 가려서 하는 게 흔한 연예인의 모습이니까.
그중에 하나는 이경규, 강호동 씨와 함께 진행됐던 <한 끼 줍쇼>에서 나온 장면이다. 지나가던 어여쁜 여자 어린이를 보고 잠깐 인터뷰를 했다. 어른이 어린이에게 하는 말이란 으레 그렇듯, 늘 커서 뭐 하고 싶냐 정도의 식상한 질문을 진행자들이 던졌고, 옆에서 이경규 씨가 훌륭한 사람 되어야지, 했다.
그 말에 이효리는 "뭘 훌륭한 사람이 돼?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아무나 돼." 라며 시원한 사이다 발언을 한다.
이 장면이 왜 짤이 되어 인터넷에 몇 년이 지나도 돌아다닐 정도로 유명해진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모두는 어려서부터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받으면서 자라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훌륭한 사람이 대체 뭐길래, 뭐가 어떻게 되면 훌륭한 사람이길래 매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건지, 그 말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져서 이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런데 또 웃긴 건 막상 머릿속에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인물을 생각해 보라고 하면, 딱히 없다. 몇 년 전엔 한창 반기문 유엔총장을 다들 훌륭하다고 칭했지만 요즘엔 또 별로 아닌 게 되었고, 굳이 꼽으라면 손흥민, 김연아 같은 유명 스포츠 스타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읽다가 눈물이 날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은 부분이 있다.
당신은 훌륭해지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부양을 위한 도구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돌봄의 끝은 자립이고 자립의 끝은 내가 나의 삶을 잘 사는 것입니다.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나는 훌륭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양을 위한 도구로 태어난 것도 아니라고 친절하게 써주셨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철저히 부양을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채, 끝이 어딘가도 모르면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이를 위해서, 아이만을 생각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삶도 도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보살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도리이나, 내 삶이 누군가를 돌보기 위한 자원으로 인식되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그 결과는 현재 극단적인 출생률 저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를 치료하고자 내 삶을 도구화시켰고, 도구화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진작 더 일찍 모든 걸 포기하고 도구화시키지 않은 나 자신을 탓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진작 더 일찍 휴직을 하던가 그마저도 아니면 다 때려치우고 아이에게 올인했어야지, 주 5일 내내 치료를 데리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더 증상을 완화시키고 언어발달지연이 되기 전에 개입했어야지, 하는 생각은 몇 년 동안 망령처럼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지금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에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이 여정이라는 게 끝이 없기 때문에, 끝이 없기에 더욱더 초반부터 온 힘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바닥나면 안 되고 길게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족하고 더 채워주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런대로 감안하고 부족한 점은 인정하고 또 그다음 페이지를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여유도 부리면서, 그렇게 아이의 치료에 매진하고 키워가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소중하기에 내 소중한 삶을 유예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관계 속 책무는 자신이 지켜나가야 할 내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부양하기 위한 도구로 내가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삶의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양의 의무는 '내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일 뿐이지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너무도 깔끔하고 담백한 말투로 정의를 내려주고 있어서, 나는 이 문장을 두 번 세 번 계속 멍하니 바라보고 또 곱씹었다.
그렇다. 부양의 의무는 내가 해야 할 여러 일들 중 하나일 뿐이지,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만약 이 한 가지 의무에만 매달려서 내 모든 걸 다 바쳤는데, 내가 목표한 바대로 결과가 산출이 안되면 어딜 가서 그 억울함을 토로할 것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내 탓만 하면 죄책감만 느끼다가 끝나게 되겠지.
삶의 중심에는 내가 있어야 한다. 내 자식이 삶의 중심이 되어서도 안되고, 남편이 삶의 중심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오롯이 내가 있어야 하고 중심을 나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나 자신뿐이다.
이 간단한 삶의 진리를, 초등학생 유치원생도 누구나 다 알법한 그 심플한 사실을 왜 이제야 알게 되고, 숨겨둔 옥석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워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 되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자질이 내게는 없다는 사실만 몇 년째 깨닫는 중이다.
훌륭한 아내, 훌륭한 엄마, 훌륭한 딸, 훌륭한 며느리.. 이 모든 단어들이 버겁고 낯설다. 왜냐면 난 훌륭한 인간이 아니니까.
까먹지 말고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겠다. 나는 부양을 위한 도구가 아니고 부양의 의무는 내가 할 일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아이에게 미안해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 꼭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