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인간관계
복직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몇 년간 떠나 있었던 업무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며칠간 온몸으로 고군분투하는 와중이었다. 더군다나 하필 복직 시기와 당장 처리해야 할 큰 행사 업무가 딱 겹쳐서 여러 가지로 이중고였다. 최대한 차질 없이 행사를 진행시키기 위해 업무 흐름을 파악하고 일 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 학기이기도 해서 하루에도 수십 개의 쿨메시지가 뜨는 게 다반사였고 내 업무 말고도 잡다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때도 정신없이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갑자기 엄청나게 긴 장문의 쿨 메시지가 하나 내 앞으로 날아왔다. 무슨 메시지가 이렇게 긴가 싶어서 자세히 읽어봤다.
복직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기에 우리 실 동료 말고는 다른 층 사람들은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행히 전에 같이 근무했던 분들이 몇 분 남아있긴 한데 그분은 전혀 나와는 안면도 없는 사람이었다. 업무 때문에 보낸 메시지는 아니었다.
엄청나게 긴 장문의 편지 같은 글을 다 읽고 나니 결론은 하나였다. 일을 나에게 떠넘기기 위해 부탁을 한다는 게 메시지의 요지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구구절절 편지글 쓰듯이 아주 길게 돌고 돌아 장황하게 쓴 거였다. 보통은 개인사정으로 조퇴하게 되더라도 수업을 교체하는 게 흔한 일인데 그게 어려웠는지 아예 나에게 떠맡기겠다는 말이었다.
순간 고민을 했다. 다음 날은 결재받아야 할 업무도 두 개나 있었고 이미 수업도 꽉 차 있었는데 거기에 부탁받은 것까지 하려면 나에겐 좀 벅찬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의 고민 끝에 그냥 쿨하게 수락하기로 한 이유는, 언젠가 나도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다른 분께 어쩔 수 없이 부탁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만일을 위해서 해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껏 근무하면서 그런 철면피 같은 부탁은 사실해본 적은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나도 아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염치없는 부탁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냥 해드리기로 다짐했다.
엄청나게 긴 장문의 메시지에 간단하게 해 드리겠다고 부탁을 수락하는 답변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못내 억울했다. 아니,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다음 날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 같은데 그분 부탁까지 들어주자니 더 숨도 못 쉴 만큼 바빠질 것 같아서 괴로워졌다.
그 사람은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있지?
아니, 부탁을 하려면 직접 와서 얼굴 보고 사정 이야기하면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솔직하게 바쁠 것 같으니 이번에는 어렵겠다고 예의 있게 거절했으면 될 일 아닌가?
거절했다가 앞으로 쭉 볼 일이 많은 사람인데 불편한 상황이 펼쳐진다면 어떡하지?
근데 수많은 사람을 두고 왜 하필 나한테 부탁한 거지?
내가 이제 막 복직해서 어리바리한 틈을 타서 노린 건가?
수만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면서 이어졌다. 아무리 곱씹어보고 여러 번 생각해 봐도 내가 그냥 당한 것 같았다. 그 후에 업무 처리 차 얼굴을 잠깐 스치게 되었는데 그분은 굉장히 밝은 모습으로 웃으면서 나를 대했다.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이 어려운 부탁을 승낙하고 마음에 부담이 생기고 짐이 무거워졌는데 뭐가 좋다고 이렇게 웃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 분과 근무한 적이 있던 지인이 전에 한 번 지나간 듯 경고한 것 같았다.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 웃는 낯으로 코 베어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일은 절대 안 하시는 분인데, 본인 편할 대로 남한테 부탁은 쉽게 하는 사람이라 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건 업무 관련성이 적은 동료들과는 세상 둘도 없는 친한 친구처럼 잘 지낸다는 것이었다. 기가 찼다.
당한 거다. 분명히 내가 당한 거다. 억울하다.
만약 내가 여차저차해서 타당한 이유로 거절했다고 해도 내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 같다. 몸은 편했을지 몰라도 어찌 보면 한 번쯤 들어줄법한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 냉정한 인간이라는 험담을 감수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런 불편한 부탁을 한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다.
복직하고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었지만 같은 실 동료들도 좋으신 붙들고, 오랜만에 만나게 된 학생들도 아직은 다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몸이 힘든 것쯤 참을 수 있었다. 그래도 각오했던 것만큼 힘들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관리자분들도 그럭저럭 괜찮으신 분들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 얼굴도 듣도 보도 못한, 다른 층 다른 실 동료가 메시지로 나타나서 나에게 강펀치를 날리고 커다란 암적인 스트레스를 안겨준 것이다.
저번 일주일을 요약하자면, 정말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할만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분과의 일 때문에 다 망가져버린 것 같다. 부탁한 일은 어렵지 않게 해내드렸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다음에 또 그런 어이없는 부탁을 하면 절대 들어주지 않으리.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람과 최대한 얽히지 않으리 다짐해 본다.
업무 적응과 수업 준비, 학생, 학부모와의 관계로 힘들까 봐 정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작 의외의 복병은 따로 있었다. 직장에서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눈 뜨고 코 베이지 않게, 내 할 말은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되자. 불합리하다 생각되는 부탁은 그냥 단번에 거절하자.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서운해 하든, 내 험담을 하든 말든 그건 니 사정이라는 마인드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