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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15. 2024

교육적인게 대체 뭔데?

한강 작가의 소설이 청소년 금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우리 나라 문학을 전 세계에 알리고, 때 아닌 서점가 웨이팅이라는 아주 긍정적인 기현상을 만들어낸 한강 작가의 책이 어떤 교육청에서는 금지 도서였다는 사실을 기사로 접했다.


채식주의자는 몇 년전에 읽은터라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약간 자극적인 부분이 몇 가지 있었던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해 도서로 지정될 정도로 외설적이었나 하는 질문에는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전세계가 인정해주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금기도서라는 타이틀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혼자 가졌다. 채식주의자에 도덕적으로 지탄받을만한 내용도 분명 들어있기는 했지만 그 책의 핵심에는 벗어나 있는 부분이었다. 결정적으로 외설적으로 느껴지고 비윤리적이라 평가될수도 있는 부분들을 읽을 때에도 좀 충격적이고 불편하다는 느낌이었지 이 책이 야하다거나, 그런 내용을 써서 독자를 끌어모으겠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문학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한 나지만 내용이 굉장히 깊고 문학적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한 교육청이 한강 작가의 책이 금기도서였다는 기사를 읽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나보다.

언론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학생들 사이에서도 아주 미세한 한강 바람(?)이 불고 있다는걸 느끼게 됐다. 한 반에 두 세명 정도는 한강 작가의 책을 학교에서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도 있고, 이번에 관심을 가지게 되서 한 번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비록 한 반에 두세명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중학교 교실 내에서 책을 읽는 학생의 풍경이란 참 생경하기도 하고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라 그런지 무척 반가웠다. 책을 정말 좋아하는 극소수의 아이들은 주로 쉬는 시간에 학교 도서관에 모여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본 학교 도서관의 역할을 책 자체를 정말 좋아하고 즐기는 독서애호학생들의 장이라기보다 조용하고 내향적이라서, 때로는 교실에서 소외당하는 학생들이 그들만의 사랑방 역할로 기능하는 성격이 강하다.


한강 작가의 여러 책 중에서 해봐야 내가 읽은 책이라고는 세권 정도 뿐인데도 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나를 가슴 설레게 했다. 공교롭게도 <소년이 온다>를 내 의지로 스스로 골라서 읽은게 불과 몇 달전이고, 그 때 한참동안 책의 여운이 깊게 남아서 책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내가 정말 감명깊게 읽은 책을 이제 막 십몇년밖에 살지 않은 십대 학생들이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동이 밀려들기까지 했다.


나잇살 좀 먹은 내가 읽어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고, 한강 작가가 쓰는 단어와 문장은 쉽고 간단하지만 그 내용의 깊이가 굉장해서 나조차도 제대로 소화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런 그의 글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어디까지 읽었느냐, 그 부분 이해가느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등 딴지 아닌 딴지를 걸어가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어느 부분에서는 아이들의 마음에 가닿아 약간의 감동은 받을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니 문학의 힘이란 얼마나 강한가하는 생각도 들고 문득 한강 작가에 대한 존경심마저 자연스레 일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한강 작가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말에 어떤 선생님께서 벌컥 화를 내시면서 그거 교육청에서 금기 도서로 정해진건데 학생들이 읽으면 안된다고 학교에서 소지하고 있는거 보면 지도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셨다.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강 작가 책을 학교에서 읽는걸 금지시켜야한다고?' 내가 알기로는 전국 모든 시도교육청이 아닌 한 교육청에서 몇 년전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는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상황에서 한강 작가의 책들이 금기도서가 되어야만 하는지 재검토를 해볼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무작정 청소년 금기도서였으니 학교에서 읽지 못하게 해야된다는건, 얼마나 구시대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그의 모든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감히 내 의견을 말하자면 그의 소설은 단연코 외설적이지도 않고 오로지 야한 내용에 초점을 맞춰서 독자를 노려보자는 저급한 목적성도 없어보였다. 다만 몇 가지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평상시에 '정상적인 삶'이라 여기는 도덕성의 잣대로 판단했을 때 일반적 정서에 어긋나는 부분은 있어보인다. 도덕과 윤리의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청소년이 봤을 때는 학교 교과서에서 배울법한 내용과는 좀 거리가 있어보이고, 그러한 내용을 가감없이 받아들였다가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학생들은 세상이 도덕 교과서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걸 초등학교 저학년만 되도 깨친다. 방송과 신문과 미디어만 들여다봐도 일어나지 말아야할 천태만상의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고, 학교안팎에서도 아이들의 교과서에서는 가르치는 내용과 정반대되는 세상을 몸소 경험한다. 세상은 그리 공정하지도 않고, 완벽하게 평등하지도 않으며, 힘의 논리가 전부일 때도 있고, 약자가 보호받지 못할 때도 있으며, 학교 선생님의 말이 모든 상황에서 정답은 아니라는걸 아이들은 귀신같이 체득하고 배워간다.


한강 작가의 소설에서 나오는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져서는 안되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이라고 해도 그것조차 아이들 스스로 읽으면서 생각하고 판단해볼 기회를 가지는건 너무나 당연하다고 본다. 몇 년전 읽은 채식주의자의 내용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억에 유독 남는 내용에서 사람들이 외설적이라고 했던 건 전혀 없다. 그런데 다들 하도 외설적이고 비도적적이라 하기에 '어디가 그렇게 야했는지' 생각이 안 나서 찾아보았다. 내 기억에 그다지 크게 자리잡지 않은걸 보면 그렇게까지 자극적이거나 충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그냥 주인공 입장에서는 그럴수도 있었겠다,하고 넘긴듯 하다.


부끄럽지만 내 과거를 고백하자면,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두꺼운 소설을 학교에 들고와서 성적관계가 묘사된 부분만을 찾아서 페이지를 접어놓고 애들이랑 돌려 읽었다. 서로를 쿡쿡 찌르면서 웃고 손가락질 하면서 혈안이 되어서 그 부분만 읽고 또 읽고 얼굴이 벌개진 서로를 놀려댔다. 삼백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두꺼운 책에서 야하다고 여겨지는 페이지는 고작 두세장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고 좋았는지 몇 번을 돌려 읽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소설에서 그런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럼 나와 내 친구들이 도덕적인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비행청소년으로 자랐냐고 하면 웃음만 나올 뿐이다. 당시에 우리 대부분은 아침 0교시부터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야자를 하는게 당연한 학생의 본분인줄 알고 살았다.


한강 작가의 소설보다 더 위험한 건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으로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는 SNS 세상이 아닐까. 짧은 영상으로 도파민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쇼츠, 온라인 도박의 유혹,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게임, 딥페이크를 이용한 성범죄에 이르기까지. 가상세계에서 아이들이 매일같이 실시간으로 접하는 것들이 한강작가의 소설보다 몇 만배는 더 위험하다고 단언한다. 학부모단체와 교육청과 나라에서 막아야할 건 가상세계에서 무차별적으로 제공되는 SNS 세상이지 한강 작가의 책이 아니라고 본다.


한강 작가의 책이 금서라서 학교에서 읽으면 안된다고, 학교에 못 가져오게 지도해야한다고 목소리 높였던 그 선생님께 묻고 싶었다. 한강의 소설을 한 권이라도 읽어보신 적은 있냐고. 그들이 야하다고 부르는 그 부분에만 너무 매몰된것 아니냐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건 그 부분에만 있지 않다고. 아이들도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스스로 거를 줄 알거라고. 나도 어렸을 적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며 자랐지만 이렇게 잘 자랐다고. 이런 말을 입밖에 꺼냈다가는 직장내 인간관계는 포기하고 영원히 제명당할것 같아서 차마 하지는 못했다.


우리 나라 청소년 중 대부분은 이미 외설적인 야동쯤은 어렵지않게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안 본 아이를 찾기가 더 어려울거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영상이 아닌 글로 접하는 야한 이야기는 얼마나 건전한가. 상상의 나래라도 펼칠 수 있고 시각적인 자극이 없으니 성인용으로 만들어진 무차별적인 영상에서 나오는 폭력적인 모습보다는 훨씬 덜 자극적이라는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차피 역사적으로도 이런 삼류 외설이나 야설은 항상 있어왔다면, 기왕에 접할거 글로 읽고 보는게 더 낫지 않겠나.


아무튼 내 개인적인 생각은 한강 작가의 소설은 어느 누구나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걱정이 좀 된다면 미리 읽기 전에 아이들에게 미리 마음의 대비를 할 수 있게 작가의 문학적 장치에 관한 가벼운 조언정도는 해줘도 될 것이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원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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