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번 일을 계기로 미투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성폭행, 강간 피해자들 혹은 직장내 괴롭힘 피해자들이 겪는 고충을 어렴풋이나마 알것 같다.
그러한 일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작고 경미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나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일을 겪게 되었다.
처음 그 일을 겪었던 이삼일동안은 정말 손이 떨리고 심장이 벌렁거려서 잠도 오지 않았다. 자꾸 그 학생 얼굴, 그리고 내게 쏟아냈던 말과 행동이 떠올라서 꽤 고통스러웠다.
당연히 내가 사과받아야할 일이고 일어날 사안의 중함만큼 그에 응당한 처분을 받아야한다는게 내가 가진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난 조직내에서의 일련의 흐름들을 보고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런 식으로 그런 성추행이나 갑질 피해자 등 온갖 종류의 피해자들을 2차가해하면서 결국 “네가 조장한것 아니냐” “너는 아예 잘못이 없었을까” “좀 참으면 될것을 왜 긁어부스럼 만드느냐” “사회생활 못하는 성가신 존재” "성격이 둥글둥글하지 못하고 너무 예민한 사람"따위의 비난들이 가해지는지 사뭇 이해가 갔다.
아무도 대놓고 내게 이런 표현을 하지는 않았다. 다들 상식적이시고 능력도 있으시고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한 분위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게중에는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안그래도 바쁜 학기말에 일을 가중시킨게 될 수도 있고, 징계를 위해서 회의를 열어야한다는게 귀찮은 짐이 될 수도 있고, 애매하니까 그냥 좋게좋게 넘어갈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걸 지난 며칠간 알게 되었다.
내가 좀 참으면, 그냥 좋게 넘어가면, 별 일 아닌듯이 숨죽일 수 있으면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뉴스 기사에 나올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굉장히 무례하고 약간은 위협적인 상황임은 분명했고, 공식적인 징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같이 힘을 모아 한 번쯤은 대처해주는게 필요한 사안임에는 분명했다. 그게 내가 가진 상식이었고 그래서 별 계산하지 않고 사안을 넘기면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었다.
그 뒤에 들려오는 말들과 뒷말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말이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거구나라는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별 뜻 없이, 큰 의미없이 한 말들이었겠지만 그게 나를 참 아프게했다. 도중에 그냥 놔두시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고민도 깊게 해봤다. 하지만 그러고 유야무야 넘어가기에는 내 유약한 자존심이 아니, 학교라는 조직의 별 것 없는 그 얄팍한 허울의 교사라는 권위가 하나 하나 무너지는걸 확인하게 될 것 같아서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조금 일이 되더라도, 번거롭고 귀찮더라도, 비록 환골탈태급의 긍정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학생에게는 경미한 징계를 통한 반성의 기회와 부모에게도 자녀를 한 번더 단도리시키고 지금 그대로 두면 더 나빠질거라는 염려가 담긴 경고가 주어지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일은 큰 잡음없이 마무리되어가는 단계다. 내 마음도 편해졌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미안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괜히 내 시간에 그런 일이 발생해서, 하필이면 나와 있을 때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다들 그냥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마인드로 쉬쉬하며 참고 있었는데 나는 그러질 못해서, 어떻게든 지도해보려다가 그런 꼴을 당하게 되어서 다 내 탓이 아닐까하는 자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나중에는 무능력감이 느껴져서 괴롭기까지 했다.
하물며 이 정도 규모의 사안도 이러할진대 정말 큰 사건을 겪은 피해 당사자나 그 가족들은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받으며 말로 못할 억울함을 지니고 살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 기사나 뉴스에 나와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피해자들, 왜 저렇게까지 할까 싶을 정도로 끝까지 계란에 바위치기 격인 소송을 이어나가는 사람들, 생업을 내던지고 억울함을 벗기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나도 그런 큰 사건에 연루된다면 더군다나 피해자가 된다면 그 모든 과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뚜벅뚜벅 나아갈 정신력이 있는 사람일까 나는.
세상 살면서 왠만큼 고생도 하고, 느린 아이 키우면서 멘탈도 강해질만큼 강해졌다고 자부하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리 강하지 못한 사람인듯하다.
그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다음번에 또 비슷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나는 원칙과 규정으로 해결해나갈거라고 다짐해본다. 나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때,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마지노선은 그나마 정해진 시스템이라는걸 이번 일을 통해 어렴풋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