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천성일까 착한사람 콤플렉스일까
내 스스로 나를 평가할 때,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이기적이고 욕심도 많고, 개인주의적이며 크게 봉사정신이나 희생정신을 갖추지도 않았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 정도만 근근히 해내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나한테 자꾸 너무 착해서 그렇다, 착해서 당한다고 말한다. 특히 올해 그런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직장에 남에게 일 전가하고 자신은 최소한의 의무만 겨우 해내면서 생색내고 아무렇지 않게 폐끼치고 다니는 사람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참 재수없게도 그런 사람들이 하필 같은 과에 배치되어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공공기관이고 공무원신분이라 누가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상주는것도 아니라서 일을 미루거나 얄밉게 한직만 찾아다니는 캐릭터는 언제나 있기는 했다. 그런데 올해는 그 정도가 심하고 그 사이에서 나는 꽤 만만한 먹이가 되었던 것이다.
상반기 내내 너무 힘들었다. 초반 업무 배정 때 내가 할 말을 더 강하게 하지 못해서, 끝까지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해서 견뎌야 하는 업무량이 나를 괴롭혔다. 그 때 제대로 말을 못한게 한이 되서 내내 정신적으로 힘들고 그 사람을 보는게 고통이었다. 하반기 들어서는 업무가 그나마 좀 정비되어서 아주 조금 상황이 나아지기는 했는데도 여전히 그는 활개를 치는 중이다.
어떤 분은 퇴직 직전이라 나이가 너무 많아서, 어떤 분은 경조사 휴가 중이라 갖가지 이유로 일을 할 수 없는 사태는 늘 발생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자동적으로 구원투수가 되어서 그들의 몫을 해내게 되었다.
저번 주에도 내내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내 담당업무도 아닌 일을 두 자리가 갑작스레 공석이 되니 어쩔수없이 떠안게 되었는데, 도무지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기도 했고 원칙상 나도 아주 얕게나마 발을 담그고 있는 업무였기에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말의 책임감으로 꾸역꾸역 해냈다.
그러나 일을 하는 내내 씨발,씨발이 나도 모르게 입에 맴돌았다. 평상시 나는 욕을 아예 하지도 않고 입밖에 내는 것도 불편한 사람인데도 욕이 자연스레 나올 정도로 화가 나고 한 숨을 푹푹 쉬었다.
너무 화가 났다. 왜 나는 지금 이 일을 떠안게 된건가. 사람 좋은 척 웃으면서, 미안한척 하면서 남에게 일을 떠넘기는 그 철면피들을 대체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어쩌다 나는 이런 호구가 되었나. 피해의식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결국에는 괜히 주변에 아무 죄도 없는 동료들에게 죽는 소리를 하고 뒷담화를 하면서 온갖 생색을 내고 말았다.
나란 사람은 애초에 희생정신도, 봉사정신도 없는데 왜 이러고 있는지 나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내 몫의 일을 폐끼치 않고 해내고 있는데도 같은 과에 민폐캐릭터거 여럿 있는 바람에 나까지 싸잡혀서 욕 먹는것도 싫었다. 그걸 만회하려고 어찌됐든 기본은 해가야한다는 생각에 아둥바둥 도와주려 애썼다. 그래봤자 뭐가 달라지는지도 이제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가 너무 착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거라고 했다. 그럼 나도 안한도, 쟤도 안한다, 아무도 안한다고 하면 대체 이 일을 누가 해야한단말인가.
내가 정말로 '착한사람 콤플렉스'라도 걸려서 이 꼴을 당하고 있는걸까. 왜 나는 이따위 콤플렉스에 걸리게 된걸까. 천성인걸까.
어쩌자고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읽고 있던 책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게 되었다. 그저그런 자기계발서인줄 알았으나 썩 실질적으로 유용할 내용들이 있었다.
남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냥 관심을 끄고 내버려두라고 조언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어떻게 노력하든 남들은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나 생각을 얼마든지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거다.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했다가는 결국 나는 사라지고 그들도 원하는만큼 만족하지도 않을게 뻔하다고.
며칠을 골머리를 앓다가 내가 할 수있는 선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관계부서에 넘기면서 선언했다. 그 쪽 담당자도 나와 친분이 있기 때문에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책임하고 끝까지 살펴보지 않는다고 욕할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나는 더 해줄 에너지도, 의지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욕먹더라도 대놓고 말했다. 여기까지만 해줄 수 있고 더는 못하겠다고, 당사자에게 어떻게든 접촉해서 해결하든말든 모르겠고 나한테는 더이상 이 건으로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당황한 그들의 얼굴을 뒤로하고 그냥 나와버렸다. 그제서야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착하게 행동하다보면 결국 이용만 당하는게 직장생활의 생태인듯하다. 특히 남에게 미루려고 마음만 먹으면 철면피로 남의 피 빨아먹으면서 일하는게 가능한 공공기관에서는 더 가능한 이야기다.
착한 사람은 결국 만만한 사람이 된다. 책임감 있는 사람은 결국 아무 일이나 맡겨도 끝까지 해내주는 사람이 된다. 조용히 있으면 정말로 가마니로 안다. 나는 더이상 못 견디겠다.
나는 남의 일을 대신 해주고도 조용히 티도 안내면서 묵묵히 모든 일을 떠안으며 해내는 그런 훌륭하고 대단한 인성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럴 위인이 못 된다. 되려 이렇게 스트레스 받아서 고통만 느낄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거절할건 당연히 거절하자. 이용 당하지 말자. 적당한 선에서 도와주는척 하고 뒤로 물러나는 척하자. 미안해하지 말자. 남이 나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크게 신경쓰지 말자.
매일 다짐하는 말들이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그래도 자주 되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