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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Sep 24. 2021

친구랑 둘이 제주살이 #1

일주일만 제주에서 살아보는거야.


서른두 살, 거의 동시에 퇴사를 하여 공백이 겹치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일생일대의 찬스다. 게다가 둘은 비혼의 상태(가치관과 관계없는)이며 운전이 가능한 자가 있고 돈도 있다. 떠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무려 3개 기업에서 입사 확정을 받고 (그중 두 곳을 두고) 고민의 늪에 빠진 친구는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51:49의 기로에 선다고 했다. 오늘은 A가 51이었다면 내일은 49가 되는 식으로. 친구의 또 다른 친구는 아침마다 '오늘의 51은 무엇이냐'고 톡을 보내기도 한다고. 



고민의 무게와 상관없이 나는 태평하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랑 놀자"고 했다. 지금이야 이 선택이 크게 내 인생에 영향을 줄 것 같지만, 사실 이러나저러나 후회는 있기 마련이고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 현재의 내가 자리 잡고 앉아 오래도록 고민을 한다고 해봐야 저만치 나아가서 돌아보면 또 막상 별 건 아닐 거라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쁜 선택지들 중에 그나마 나은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좋은 선택지 중에 더 좋은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고.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51인 그곳에 입사를 하기로 정하고 남은 시간은 서울과 일상과 부모님으로부터 떠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친구는 정말로 49%의 마음을 차지한 회사에 입사 포기 의사를 전달했고 급히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코시국으로 인해 제주도 렌트비가 천정부지 기수로 올라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현실은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7박 8일 경차 1대 대여료가 무려 599,000원. 평상시에 비하면 거의 4-5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여름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이 시기에 렌트 없는 제주 여행은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차를 빌렸다.


공항 근처에서 든든하게 밥을 먹고는 일단 바다를 보러 가자는 나의 제안에 협재 해수욕장으로 향한다. 사실 딱히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숙소만 겨우 예약했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끼니를 때우고 나면 제일 먼저 "이제 뭐 하지?", "어디 가지?"부터 생각했다. "그냥 일주일 동안 제주에 살아보자!"라고 했지만 서울에서 온 촌것들은 어디를 가고 뭘 하지 않으면 병이라도 나는 것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딱히 계획이 없어도 가만히 머무르며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어디든 목표를 찍고 '다녀왔다'고 표현할 만한 것을 해야 하루를, 시간을 잘 보낸 것 같은 안도감이 드는 슬픈 한국인.





비양도가 한눈에 보이는 협재 해수욕장. 해수욕장의 본 주자창은 이미 만차여서, 20-30m쯤 떨어진 버스 전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해수욕장 끄트머리로 들어섰다. 이미 오래전에 자리를 잡은 듯한 캠퍼들이 많았다. 이때부터였나. 텐트 하나 들고 제주 유랑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어딜 가든 캠퍼들이 있었다. 아무 데나 텐트를 펼치고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더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사실 이 나이 먹도록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해본 경험도 없어서 이번 여행은 '게하 첫 경험'으로 (나만의) 테마를 정하고 온 것이라 이 또한 소중한 경험이지만 캠퍼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 텐트만 있었어도!"



까만 돌, 에메랄드빛 바다, 하얀 모래, 파란 하늘. 제주를 가장 제주답게 만드는 그 모든 요소의 조합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던 여행길의 피로가 잊히는 풍경. 한 번이라도 제주의 바다를 본 사람이라면, 사진 한 장으로도 제주도를 알아볼 수 있다.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이런 곳은 없을 것이다. 지구의 아주 작은 나라 한국이 품은 섬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제주만이 가진 고유성 때문이리라. 



무더위에 지쳐 카페 찾아 삼만 리. 제주까지 왔으니 '느낌 있는 카페'를 가보기로 한다. 처음엔 검색해서 들어가 보고 그다음엔 음악에 이끌려 들어갔으나 두 곳 모두 소품샵이었다. 슬슬 목이 타기 시작한 우리는 빠르게 낭만을 포기하고 만만한 스타벅스로 들어갔지만 바글대는 인파에 도망쳤다. 코시국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시기라 언택트를 자처한 여행이었다. 유명 관광지에서 카페나 음식점을 취향에 맞게 선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까. 모든 조건을 내려놓고 가장 한산한 곳을 골라 들어간다. 꽤나 고급스러운 외관 때문인지 엄청나게 바가지 쓸 각오를 하며 마른침을 삼킨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반겨준 건 역시나 시원한 에어컨 공기. 멀쩡한 사람을 훈제 고기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푹푹 찌는 더위 앞에서는 문명의 이기에 무너지고 만다. 큰 숨을 몰아쉬고 메뉴를 정하는데, 열의 아홉(또는 열)을 아메리카노만 외치는 두 인간의 시선을 사로잡는 메뉴가 있었으니 그것은 칵테일. 한 잔에 만 원을 가뿐히 넘는 사악한 가격이었지만 '비양도 선셋'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에 넉다운 당하고 만 마케터. 생각해 보면 마케팅하는 사람이 오히려 잘 만든 마케팅에 쉽사리 감동하는 것 같다. 주문을 하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보니 어마어마한 자본의 향기가 난다. 뼛속까지 낭만주의적인 이 카페는 피크닉 세트를 대여하고 있는데, 해변에서 즐기는 낭만이라나. 바구니와 와인, 와인잔 등 '갬성' 넘치는 인증샷을 위한 소품이 되겠지. 주류의 라벨도 예사롭지 않다. 마치 누군가의 아트 컬렉션을 전시해놓은 듯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눈에 띈 초상화 컬렉션. 와인이 가진 특성을 의인화해서 각 와인에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넣었다. 만든 사람도 누리는 사람도 즐거운 브랜딩. 스토리가 담긴 것은 그게 무엇이든 인상적이다. 한 번 더 시선이 가고 그 시선은 관심이 되고 그로 인해 한 번 더 기억되는 그런 것.





여름의 볕이 내리쬐는 꼭대기 층에서 칵테일을 거의 원샷 하다시피 들이켰다. 만 원어치의 얼음과 2천 원어치의 오렌지주스, 천 원어치의 이름 모를 풀로 이루어진 음료라고 해도 무방했다. 분명 선셋이라고 했는데.. 내용물이 이름을 못 따라간 듯한 '비양도 선셋'. 진짜 협재 해변 선셋이나 실컷 구경하자는 마음으로 루프탑으로 나갔다. 아직 선셋을 보기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바다와 한껏 가까워진 태양빛은 수면에서 무수히 흩어졌다. 물결을 따라 화려하게 반짝이는 빛은 태양과 바다가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결실.






눈을 돌리면 어디서든 보이는 야자수가 모든 풍경을 이국적으로 만든다. 수 십 년이 흘러도 제주도가 한국 최고의 휴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유를 매 순간 느낀다. 나는 휴양지나 관광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제주도는 마냥 휴양이나 관광만을 위한 곳도 아니기 때문에 더 좋다. 조용하고 한적한 바닷가, 깊고 신비로운 숲, 구름 보다 높은 산까지 천혜의 자연을 다양하게 누릴 수 있다. '한반도가 품은 보석' 뭐 이런 류의 표현이 마냥 촌스러운 홍보 문구만은 아닌 것이다.















숙소까지 갈 길이 멀고 밤길 운전에 취약한 민치를 위해서라도 어두워지기 전에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첫날의 선셋은 차에서 맞이했다. 이상하게 앞에 보이는 하늘보다 옆으로 보이는 하늘이 더 타는 것처럼 붉게 보인다 했더니 선팅 된 창문이 자체 필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레이 필터 효과'라고 불렀다. 레이가 여러모로 열일 한다며 일주일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나의 플레이 리스트를 좋아하는 민치를 위해 아끼는 곡들만 골라 재생했다. 운전을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런 것뿐이기에 나는 늘 음악을 선곡하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달리는 바퀴보다 이야기하는 나의 입이 더 바빴을지도 모른다. 



민치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말이 많은 것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는다. 가끔은 조용하고 싶을 때도, 내 이야기에 공감이 안될 때도, "그건 지난번에도 했던 얘기잖아"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텐데 그녀는 항상 잘 들어준다. 말이 많은 것이 콤플렉스이면서도 절대 고치지 못하는 고집스럽고 모순적인 나. 그런 나에게 "말이 많으면 어때. 그냥 생긴 대로 살아"라고 말해주는 고마운 민치. 그래서인지 누군가와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내가 말이 너무 많았나' 늘 후회하는 내가 유일하게 민치에게만은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내 주변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랄까.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우리의 첫 게스트 하우스는 모슬포항 근처에 위치한 '자운당'. 멋진 정원이 대문처럼 집을 두르고 있는 곳. 처음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나와보는 사람이 없어서 잠시 기다렸지만 역시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불 켜진 식당에도 아무도 없다. 호스트에게 전화를 하니 받지 않고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게스트하우스란 이런 것인가. '이렇게 영업을 한다고?' 하는 날선 생각이 스칠 때쯤 웬 할머니가 정원에 차를 댄다. 큰 샤워 타월을 허리춤에 두르고 모래가 잔뜩 묻은 맨발로 차에서 내리는 깡마른 할머니. 까맣고 주름은 많지만 어딘지 꼿꼿하고 고고해 보이는 할머니는 '요 앞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급하게 왔다'고 했다. 방을 보여주면서 예약을 2명으로 했냐고 물었다. 1명이 예약한 줄 알고 이불을 하나만 펴두었다면서 우리에게 물었다. 



"내가 이불을 펴 줄까요? 아니면 직접 펼래요? 내가 꼴이 이래서.. 손님 방에 들어가기가 좀 그러네"


호스트가 생각보다 더 나이 든 할머니이기도 했고 발을 보니 정말 모래가 많아서 나는 얼른 "저희가 할게요. 이불만 가져다주세요" 하고 대답했다. 호스트는 "이건 이렇게 펴, 아니 그걸 아래로. 그렇지. 응. 저걸 올리고." 하면서 지시하고, 게스트인 우리는 열심히 이불을 펴고 있는 상황이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4일을 지낼 곳이니 이왕이면 서로 웃으며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컸고, 한편으로는 원래 게스트하우스가 다 이런가 싶기도 해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화장실 위치와 주변에 저녁 먹을만한 곳을 추천해 주고 할머니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8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할머니가 추천해 준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제주도로 향하던 비행기에서였던가. 첫날과 마지막 날은 지갑을 좀 열어서라도 멋진 식사를 하기로 했었다. 그 야무진 꿈이 가소롭다는 듯 우리의 현실은 <누나가 홀딱 반한 닭> 이었다. '제주도까지 와서 프랜차이즈 치킨집이라니. 분하다!'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맛있게 먹었지만..














치킨집의 영업시간인 10시를 꽉 채워서 먹고 마시다가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식당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갔다. 어떻게 생긴 곳인지 한번 둘러볼 요량이었다. 식당에는 젊은 여자가 긴 머리를 말리고 있고, 뉴에이지 같기도 하고 인도 음악 같기도 한 생전 처음 듣는 풍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가만 보니 LP 판이 돌아가고 있다. 집 곳곳에는 먹물로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예술 하는 아드님의 작품이라고 했다. 누군가 오랫동안 자기 취향과 생활에 맞게 쌓아온 공간은 그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는다. 어떤 사람의 공간을 엿보는 일은 1년 중 360일을 잠자고 있는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몇 안 되는 일이다. 뇌의 한구석, 활동하지 않던 어떤 부분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 시간 쌓인 것은 단지 물건만은 아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냄새는 이미 오래전 태워진 향이 쌓이고 또 쌓이다가 완전히 배어버린 냄새였다. 시간만이 만들 수 있는 것. 그런 자연스러운 것들로 가득 찬 낡은 공간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할머니가 되면 나에게도 나를 설명할 공간 하나쯤 있기를 바랐다.



주인 할머니는 우리에게 맥주를 마셨는지 물어보곤 차를 내려주겠다고 했다. 유리병에 담긴 여러 종류의 찻잎을 섞어 우려낸 차는 의외로 꽤 단맛이 났다. 어떤 차인지 물어보니 세 종류의 차 이름을 말해주었는데 그중 기억나는 것은 스테비아뿐이다. 천연 설탕이라고 할 정도로 단맛이 나는 재료라고 이전에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다. 단맛이 나는데 텁텁하지 않고 깔끔한 것이 좋아서 겨드랑이와 허벅지 밑에서 땀이 나는데도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며 몇 잔이나 마셨다. 머리를 말리던 젊은 여자는 주인 할머니와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조카처럼 살갑게 굴었는데, 이전에도 방문했던 적이 있는 손님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운당'을 에어비앤비에 등록해 준 은인이라고. 5월에 결혼을 하고 지쳐서 혼자 여행을 왔다는 그 손님은 주인 할머니에게 주례를 부탁하기도 했단다. '이런 인연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어딘가 똑 소리 나 보이는 그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가 냉장고에서 마시다 만 와인을 인심 좋게 내어주었다. 특별한 손님의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4일을 묵을 손님의 첫날밤이기도 해서 였을까. 고급 와인 같지도 않았는데 맛이 좋았다. 무엇보다 냉장고에서 꺼낸 그 온도가 딱 좋았다. 입안에서 한참 머금다가 삼키면서 몇 잔을 마셨다.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어흐" 하는 소리를 내며 냉수 샤워를 하고 오래된 냄새가 나는 방에 누웠다. 이불은 낡았지만 시트는 깨끗했다. 바스락거리는 바짝 마른 시트와 한 사람당 두 개씩 배급된 베개에서 배려가 느껴졌다. 무척 피곤했는데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내가 잠자리에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취기가 잔뜩 올랐을 때야 어디서든 잠이 잘 드는데 기분 좋게 적당히 오른 취기에는 영 잠이 오지 않는다. 평소 에어컨 켜고 자는 것을 싫어하지만 우리가 묵은 방은 전원주택이라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왔다. 아직 열대야가 가시지 않았기도 해서 취침모드로 켜둔 에어컨 바람 때문에 마른 목에서 자꾸 기침이 났다. 밤새 잠인지 고통인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동트기 전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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