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인간이라는 존재
연극 <파우스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1부와 2부로 나눠서 공연한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그중 1부만을 담고 있는 연극으로 결말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평생을 학자와 현자로 살아온 '파우스트'는 말년에 가서야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느낀다. 그는 한평생 연구와 지적 탐구만을 일삼으며 살아왔지만 그가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사실은 무엇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몰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악마 '메피스토'는 창조주인 '신'과 '파우스트'를 두고 내기를 한다. 절제와 인내를 미덕으로 삼아 살아온 '파우스트'에게 인생의 즐거움(인 듯 보이는 일락과 육체적 쾌락)을 알려주면 자신에게 넘어오리라 하는 내용의 내기였다. 지난하면서도 권태로운 일생에 싫증을 느끼는 '파우스트'는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메피스토'와 거래를 하게 된다. '파우스트'가 살아 있는 한 '메피스토'는 그가 원하는 모든 쾌락을 선사할 것을, '파우스트'는 생이 다하는 순간 자신의 영혼을 '메피스토'에게 넘길 것을. 그렇게 계약을 맺게 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도움으로 육체가 젊어지는 약을 먹고 젊은 모습으로 쾌락을 탐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그레첸'이라는 여인에게 첫눈에 빠지고 '메피스토'의 능력으로 그녀에게 구애하며 둘은 사랑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그녀와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파우스트'의 계략대로 파멸의 쾌락에 빠지며 잘못된 길을 걸어간다.
1) '메피스토'의 캐릭터
연극 <파우스트>에서 그려낸 악마는 두렵게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악' 그 자체라기엔 적당히 위트 있고, 또 상당히 매력적이라 공연을 보다 보면 그가 가끔 악마라는 사실을 잊을 때도 있다. 심지어 극 중 한 여인은 그의 관심을 사기 위해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악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파멸, 일락 같은 파괴적인 것들이다. 그렇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악마를 오로지 파괴와 파멸만을 이야기하는, 보기만 해도 표정이 일그러지게 되는 그런 캐릭터로 묘사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악마를 조금 더 인간답게 표현한 이유가 뭘까. 아마 관객이 '메피스토'라는 캐릭터에게 가지는 거리감을 조금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함이 아닐까. 나도 공연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그의 매력에 혹할 때가 간혹 있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가져야 하는 것은 경각심. 나쁘고 악한 생각이나 마음은 결코 악하게 보이지 않는다. 때론 그것이 선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극 후반부에 '메피스토'가 본모습을 드러내며 '파우스트'를 파멸로 끌고 가는 것처럼 그 끝은 결코 선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2) '파우스트'에게 복종하는 '메피스토'
극 중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그가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종이 되겠다며 그를 섬긴다. 아니, 그러는 것처럼 보인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능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요구하며 손쉽게 얻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악마를 부리고 악마가 자신을 높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섬기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를 파멸시키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악을 행하고 그러한 행동을 자처한다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이다. '그레첸'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에게 몰락당하고 모든 것을 잃은 상태로 '파우스트'를 마주했을 때도 결국은 신을 선택하며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와 반대로 '파우스트'는 신의 음성이 들림에도 이리 오라는 '메피스토'의 말을 듣고 악마를 선택한다. 이번 공연은 1부만이 진행되어 결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괴테의 원작에서는 '파우스트' 또한 구원받는다. 이는 그가 수동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악마의 곁에서도 끝까지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앞서 관람한 뮤지컬 <이프덴>의 감상과도 이어지는데 인간은 결국 닥쳐오는 것들 중에서 선택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능동적인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