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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

<베로니크 두아노> 비평문과 공연예술에 대한 생각

by 소소담

대학교 2학년 1학기 때 학교에서 '공연예술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는데 그 수업에서 교수님은 30분 남짓의 <베로니크 두아노>라는 무용 공연 영상을 보여주셨다. 이 공연은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군무 무용수로 오래 춤을 춰 온 한 무용수가 그간 자신이 춰왔던 춤을 보여주는 공연이다. 그녀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안무를 관중에게 얘기해주고 그 안무들을 짤막하게 자신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추거나 혹은 음악에 맞춰 추기도 한다. 그녀의 이야기와 그때의 감정을 듣고 춤을 보니 한 공연을 그저 관람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생애를 지켜보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공연 중간에 그녀가 좋아하는 안무가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같이 보는 식의 구성이 진행되면서 그 기분과 순간이 함께 공유되어 그녀의 세계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지젤’을 추는 것이 자신의 오랜 꿈이었다고 얘기하며 제대로 된 음악도, 파트너도 없이 혼자 노래를 부르며 ‘지젤’을 짤막하게 연기했다. 끝없는 애정을 담아 수없이 듣고 연습했을 그녀의 ‘지젤’을 볼 때는 시선이 그녀가 만들어내는 지젤의 아름다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내뱉는 숨소리, 자연스레 지어지는 표정, 한 동작 한 동작 정성스레 만들어내기 위한 그녀의 에너지로 점차 넓어졌다. 한 사람의 오랜 꿈을 지켜보기에 눈에 보이는 결과 하나로는 부족한 것 같아 따라갈 수 있는 모든 흔적을 따라가려 했다. 관중들 앞에서 짧게나마 자신의 꿈을 이루는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나도 벅차오르면서 그녀만큼 열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이 공연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두아노가 ‘백조의 호수’를 연기할 때였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 설명할 때 자신은 끝내 ‘star’가 되지 못한 채 오히려 ‘star’를 빛내 줘야하는 역할이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무용수들에게 정말 끔찍한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작품을 공연에서 선보인 작품 중 제일 길게,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 제대로 된 음악과 함께 보여줬다.

이 작품에서의 안무는 먼저 보여준 안무들에 비해 멈춰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아마 주인공인 다른 ‘star’를 빛내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정적이 많은 안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무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과연 어느 누가 은퇴 공연의 마지막을 싫었던 순간으로 마무리하고 싶을까?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을 그만두는 마지막 공연인 만큼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들로만 담았을텐데 그녀는 마지막 공연의 마지막 안무로, 그것도 제일 길게 이 안무를 보여줬다. 두아노가 끔찍이 싫어했던 이 안무를 추는 그 시간이 마치 내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생각보다 싫었던 기억들이 많이 떠오른다. 그러나 아무리 끔찍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와도 이 또한 나의 삶이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좋고 싫음 또한 내 삶에 애정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니 힘든 순간들이 너무 두려워질 때 ‘이 또한 나의 삶이다’라며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한 모든 공연을 끝마친 그녀의 표정과 몸짓, 분위기에서 편안함과 행복이 보였다. 이를 보고 마지막 순간에 느껴지는 행복은 결코 눈부시고 찬란했던 순간들만 모여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잠깐의 기쁨을 행복으로 착각할 수는 있지만 먼 훗날 길었던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때는 힘들고 고되었던 순간들,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이 한 데 뒤섞여 만들어내는 것이 최후의 행복인 것 같다.

베로니크 두아노의 공연을 보고 공연예술은 어쩌면 책과 같이 세상을 알려주는 지침서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책은 다른 사람이 겪은 경험과 그로 인해 깨달은 지식과 이성을 알려주는 매체라면 공연예술은 예술가 각각이 살아온 시간의 감각을 알려주는 것이다. 책처럼 정확히 예술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그 시간들을 살아내면서 느꼈을 감각을 눈앞에서 생생히 들려주는 것이다. 나는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들을 그 순간에 같이 느끼며 나의 삶을 더 다채롭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두아노의 공연을 볼 때는 마치 무용에 대한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세세하게 전해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위로도 받고, 같은 꿈을 꿔보기도 하고, 그 순간의 감정을 함께 공유하기도 하며 공연을 관람하는 30분 동안은 잠깐 내가 아닌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30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걱정, 불안, 틀에 갇힌 채 무한히 반복되는 같은 생각과 감각들이 잠시 나를 떠나고 그저 새로운 감각에 몰두할 수 있었던 정말 값진 순간이었다. 사실 정확히 어떤 점에서 새로운 것을 느꼈고 위로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공연이 끝나고 다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내 안에 느껴져 ‘아, 이 공연에서 나는 위로와 응원을 받았구나’하고 추측했을 뿐이다. 등장하는 모든 예술가의 수많은 감각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공연예술에는 다시금 내 삶을 힘차게 살아가게 해주는 정체모를 어떠한 힘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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