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엄마의 반성문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후회하고 싶지 않은 내 욕심이 더 컸었다.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게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고.
다른 엄마들이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면 그 말에 힘을 얻었고, 친정엄마를 비롯한 어른들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말해주면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9개월쯤 되었을 때, 나는 육아에 찌들어 있었다. 6개월부터 이유식을 시작하고 나서는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다. 주부습진. 손 끝을 갈라지고 터지게 하는 그것은, 마치 최선을 다 한 엄마에게 주는 적립 스탬프 도장 같은 것이었다.
드디어 열손가락이 모두 습진으로 터졌던 그 날, 골무같은 밴드를 손가락에 감고 피 묻은 아이 옷과 이불을 바라보고 울었더랬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려오는 손 끝의 통증 때문이 아니라 빨랫감이 늘었다는 사실이 더 싫었던 것 같다.
아이 식기에 미세플라스틱이라도 남을까 봐 고무장갑도, 수세미도 거부했다. 맨손으로, 우리 집에서 제공되는 가장 뜨거운 온도의 물로 매일 설거지를 했다.
매일 밤 아이가 잠들고 나면 그 역시 맨손으로 아이의 장난감에 소독용 알코올을 뿌려 닦고 말렸다. 나는 손이 너무 아팠다. 그렇지만 내가 힘든 것을 참으면 참을수록 아이는 더 잘 자랄 거라고 믿었다.
카페인 수혈이라는 말이 그 때도 있었던가. 하루 서너잔의 커피에 물을 붓고 또 부었다. 그걸 홀짝 거리며, 가끔은 원샷으로 들이키고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우울과 슬픔은 전염도 잘 된다지. 항상 즐겁고 신나는 엄마이고 싶었다.
주부습진은 손에 물 마를 없이 노력한 나의 인증샷 같은 것. 출처: 픽사베이
그렇게 하루를 불태우고 아이가 잠들고 나면 주방으로 나왔다. 분명 매 끼니마다 설거리를 했는데, 뭐가 저리 많은걸까.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냉동실에서 마카롱을 하나 꺼내 싱크대 아래에 쭈그리고 앉았다.
동네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에 줄서야만 살 수 있는 마카롱 가게가 있었다. 나는 딱 한번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유모차를 끌고 갔다. 그 좁은 길에 커다란 유모차를 잡고 서 있는 것이 좀 창피하기도 했다. 유모차 좀 끌어본 아줌마들은 다 알 것이다. 좁은 길에 유모차 잡고 서 있을 때 사람들이 쳐다보는 눈빛과 표정.
‘저렇게까지 하고 여기 와야하는거야?’
그 가게는 유모차가 들어가기엔 입구의 턱이 너무 높아 힘들었지만 그래도 난 꾸역꾸역 유모차를 끌고 그 가게에 들어갔다. 2500원. 뭐가 저리 비쌀까.
그때 우리 집은 외벌이였고, 집 매매 대출금도 있고, 아이의 식재료는 무조건 유기농과 한우만 고집하는 나의 욕심으로 지출이 많았었다. 수입 없는 전업맘에게 이런 고급 디저트가 가당하기나 한가. 이건 정말 사치야, 사치. 지금 생각해도 우습지만 그 때 나에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을까. 과감하게 내민 카드.
“종류별로 하나씩 주세요. 10개요.”
그게 내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고, 마치 월급 같은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다시는 유모차를 끌고 여기에 못 올 것 같아서 많이 사다두고 싶었다. 그렇게 냉동실에 고이 모셔둔 마카롱을 아이가 잠든 밤이면 하나씩 꺼냈다.
싱크대 아래에 쭈그리고 앉은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비닐을 뜯었다. 그리고 한입 깨물었다. 어랏. 내가 상상한 것만큼 맛있진 않네. 그치만 이거 비싼거잖아. 바닥에 떨어진 마카롱 가루를 두 번째 손가락으로 꾹 눌러 붙여 다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살짝 나온 나의 똥배가 보였다. 이럴 때가 아니었네. 돈도 쓰고 배도 더 나왔잖아. 괜히 서글퍼져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조금은 처량하고 청승맞은, 그렇지만 살림과 육아 부문에서 나의 최고 능력치를 매일 갱신하는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은 일상이었다. 나는 이 작고 고운 아이를 잘 키울 수만 있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직 전업맘에게 마카롱은 스몰럭셔리 그 자체였다. 출처: 픽사베이
그날, 그날은 하필이면 배가 너무 고팠다. 왜 그런 날 있지 않나. 전쟁이 난 것도, 보릿고개를 넘는 중도 아닌데 나 혼자 허기에 유독 지치는 이상한 날. 엄마 젖을 찾는 신생아도 아니면서 그날따라 배고픔을 참기 어려웠다. 좀 지나면 지나가겠거니 했는데, 왠걸. 점점 더 힘들다.
엄마가 해다주셨던 냉장고 속 나물반찬이 간절한 순간. 따스한 쌀밥 위에 고소하게 무친 나무 두어가지와 반들반들한 참기름을 쪼르르 두르고는 고추장 한 숟가락 푹 퍼넣고 비벼먹고 싶었다. 달걀 프라이까지 바라면 욕심인건 나도 안다.
배고픔도 참을 줄 알고 그러면서 아이를 돌보는 게 엄마의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배가 고팠다. 아이를 거실에 앉혀두고 급히 식탁에 앉아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이를 쳐다보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밥그릇만 쳐다봤다. 우걱우걱.
그때 아이의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쪽을 바라보니 아이가 소파를 잡고 일어나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이, 기저귀를 찬 엉덩이가 어찌나 귀엽던지.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주는 것도 엄마의 의무니까. 사진도 찍어주고 엉덩이도 토닥토닥 해줘야지. 꺄악.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땀범벅.
아이의 얼굴은 말 그대로 땀범벅이었다. 아직은 추운 기운이 남아있는 3월의 저녁시간. 방금 씻고 나온 것처럼 모두 젖은 머리카락. 동그란 콧등이며 볼에도 흥건한 땀방울. 힘을 잔뜩 주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의 두 다리. 그렇게 서서, 엄마를 바라보고 씨익 웃어주는 나의 아가.
2018년 03월 29일, 처음으로 혼자 붙잡고 섰다. 야들야들한 발바닥이 드디어 땅에 닿았다. 출처: 픽사베이
신기하고, 대견하고, 기특했다.
그러나 곧이어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들켰을 때, 그럴 때 마냥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아이의 얼굴.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해 준 것이 아니었다. 이건 우리 아이의 노력으로 된 것이었다.
아이가 설 수 있게 된 그 순간, 그 날까지 고생한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동안 확신했었다.
내 수고가 아이를 키운다고. 이 모든 것이 내 공이라고. 내 노력의 크기만큼 아이가 큰다고.
하지만 땀과 미소가 뒤섞인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내 수고와 고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자라기 위한 아이의 노력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었다. 태어나 일이 년만 지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잡고 서는 건데, 이 마저도 이 아이는 그토록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후회, 미안함, 그리고 부끄러움. 일그러진 내 눈과 입.
아이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슬프냐고, 무슨 일이있는거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물었을 테지. 아이가 아직 말을 못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내 무릎에 얼굴을 부벼대는 아이를 그 어느때보다도 벅차게 안았다.
그 이후 나는 다짐했다. 나 역시 처음 하는 엄마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겠지만, 성장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그 노력의 크기는 아이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자는 것도 함께.
또, 엄마니까, 그래야먄 한다는 의무감으로 참고 이겨내라고, 힘들면 안 된다고 수백 번 외쳤던 나의 강박, 건강한 아이로 낳아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 미래에 혹시 하게 될 내 후회에 대한 걱정, 이 모든 착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우리 아가는 이제 아침마다 더 자고 싶다, 숙제가 많다, 놀고 싶다, 학원 가기 싫다, 투덜 되기 시작했다. 이제 제법 컸다고 엄마는 잔소리가 많다고 삐죽거릴 때도 있다. 내 뜻대로 아이가 따라오지 않거나 잘하지 못할 때에는 속상하기도 하다. 그럴 때면 그날, 아이 얼굴에 흐르던 땀방울을 떠올린다.
한 사람의 몫을 다 하기 위해 커가는 아이의 수고와 노력. 오늘도 내 것보다 더 큰 아이의 수고와 노력. 그러면 아이에게 한번 더 웃어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나에게도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오늘도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나의 노력이 가득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