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감기
날씨가 추워지며 모임이 생겨난다.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모임에 여성 게스트도 한분 있었는데 나이가 모두 동갑이라 금방 격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은퇴가 가까워지며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게스트분이 자기는 여전히 일상이 5분 단위로 촘촘히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젠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고 내려놓고 타고난 본성대로 편히 지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타고난 본성과 소질이 뭘까 생각해 보니 나는 게으름 이란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게으름의 장점이란 게 있을까? 한 가지가 생각났다. 나는 여전히 잠을 잘 잔다. 물론 올빼미 기질도 남아 있긴 한데 한번 잠들면 최소 6시간 이상 주말에 조금 피곤할 때 8시간 이상도 잔다. 아직 수면제라는 걸 한 번도 먹어 본일이 없다. 주위에 앉은 친구들이 부러워한다. 수면제 말고도 나는 안 먹어도 되는 약이 더 있다며 마저 자랑을 했다. 탈모약과 또...
부러움을 받은 기세로 게으름을 더 자랑을 해보려 한다. '나는 머리도 이틀에 한번 감어.'
뜨헉.. 친구들이 놀란다. 그리고 약간 혐오? 스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아니 어떻게 머리를 매일 안 감고 버티지? 나는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도 감는데? 하는 친구들..
'요즘처럼 모든 사람들이 밤낮으로 매일 씻고 닦고 한 지가 인류 역사를 비춰본다면 몇 년이나 된 거 같냐?' 나의 역설에 친구들이 주춤한다. '그건 그렇다 해도..'
'그리고 우리 어렸을 때 너네 일주일에 몇 번이나 목욕했냐? 집에 더운물도 안 나오는데 나는 주말에 아버지랑 목욕탕 가는 게 유일했다.'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지금이랑 같냐?'
'지금이랑 뭐가 다른데?...' '음...' 친구 놈은 선뜻 대답을 못한다.
'뿐만 아니다. 나는 양치질도 자기 전 하루에 한 번만 한다!' 크어억.... 다들 어이없어하고 여성 게스트도 있는데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대신 틈틈이 치실을 한다. 사실 물을 아끼기 위해 샤워하면서 소변보는 얘기도 있는데 참았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감겨주는데 습관적으로 오줌을 지렸다는 라디오 시청자의 유명한 일화도 있지 않은가?
대학교수 한 놈이 AI 가 바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지 한참이 지나는데 여기저기서 듣고도 남을 만한 이야기의 재탕이라 재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또 제안한다.
'다시 우리 원초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는 게 어때? 사실 우리 집은 내가 빨래 계엄령을 내려서 애들이 겉옷은 무조건 3일 이상 입어야 한다?!' 물론 여름은 예외다.
끄어어... 이건 정말 못 참겠다는 친구들. 그리고 아니 감히 어떻게 애들과 아내에게 그런 무리한 강요를 하냐는 에겐남 친구들. ㅋㅋ
아내에게 무리한 요구?
게으를 뿐 아니라 꼰대, 마초, 테토남은 일단 여기엔 나 밖에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글쎄.. 난 그래도 주말에 설거지도 한다. 물론 아이들과 가위 바위 보로 정하긴 하지만 ㅋㅋ 천성이 게으른 건 인정한다만 불필요한 빨래를 줄이려는 내가 정말 이상한 것인가?
나의 계엄령이 내려진 지 10년이 되어 가지만 우리 가정은 아직 별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건강하면 될 일 아닌가? ㅎ 그런데 요즘 아내는 머리를 나보다 더 안 감는 거 같아 가까이 가기 싫어지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