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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Feb 15. 2019

결혼, 싸움이 시작되다 (7)

 난 ㄱㅏ끔 눈물을 흘린ㄷㅏ...

*이미지 출처: 가수 채연님 싸이월드


  그가 다시 철조망을 기어올랐다. 마음이 급했는지. 삐걱. 발이 미끄러졌다. 우스꽝스러웠다. 퐈.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눈꺼풀에 잔뜩 힘을 주고 시선을 피했다. 의도하지 않게 ‘진짜 화난 표정’이 연출됐다. 무사히 고속로로 갓길로 착지한 남편이 내 팔을 붙들고 말했다.

   

  “좀 봐줄래?”

  “?”

  “미세하게 실밥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    


  그가 뒤돌아 엉덩이를 내밀었다. 단단하게 묶여있어야 할 바느질 부분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터진 건 아니지만 충격을 받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나는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 주저앉아 흐느꼈다. 눈물이 흘렀다. 배가 아팠다. 눈물과 복통이 어우러진 웃음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버스에서 내린 지점부터 다시 출발했다. 중간중간 그늘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햇볕이 내리쬐는 곳과 온도가 달랐다. 목적지로 가는 길은 양지와 음지의 반복이었고. 남편은 시원한 그늘이 많은 길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의 앞날도 비슷할 것 같았다.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결혼했다.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시시각각 바뀌고 닥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함께 걸어가야 한다. 분명 순탄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혼자일 때보다, 함께일 때, 더 빨리 일어설 수 있으니까.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높은 전망에서 오페라 하우스를 비롯한 도시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장소였다. 남편과 사진을 찍었다.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도 선남선녀가 되진 못했다. 애초에 배경을 이길 수 없는 비주얼들인 건지. 유독 그날만 초췌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기억에 오래 남을 하루가 될 것 같았다. 특히, 고속도로 갓길에서 실랑이를 벌였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남편의 바지가 정말 찢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여러 번 해봤다. 아마도 위험했을 거다. 웃다가 무슨 일인가가 생겼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기로 했다. 에너지 충전이다. 저녁에는 달링하버에서 크루즈를 타고 선셋 디너를 즐기기로 했다. 신혼여행에서의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비 맞고, 헤매고. 굶주리고, 라면 먹고, 고속도로 갓길을 걷던 ‘코미디’는 끝이다. 이제부터는 ‘로맨틱’해질 것이다. ‘로맨스’는 어려워도 ‘로맨틱 코미디’는 될 수 있다.    

  알람이 울렸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일어나자. 가야지.”    


  월요일 출근길처럼 몸은 무겁고. 얼굴은 부었고. 목은 잠겨있었다. 그러나 일어나야 한다. 선셋 디너다. 정신력이 필요할 때다.    


  “티켓 어딨지?”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여행사에서 선셋 디너 티켓을 구매했다. 결제는 분명 남편이 했고. 티켓은 그와 나의 손을 번갈아 오갔던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간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 뒤로 여행사를 나와 비를 좀 맞았고. 우리 사이가 좀 냉랭해졌었고. 겨우 밥을 먹고 기분이 좀 풀어진 후에, 최악의 뷰를 선사한 부티크 호텔에 갔었다. 그 호텔에서는 하룻밤을 보냈고. 지금의 호텔로 옮겨왔다. 그러고 보니 그사이에 티켓을 본 기억이 없었다.    


  “나는 분명 너한테 줬어.”    





  남편의 기억력이 한 수 위다. 반면 나는 잘 까먹고.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다. 결정적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휴대전화를 찾아다녔던 일이, 그에게 발각됐다. 맨 정신에 그러고 있으니. 신뢰를 잃을만했다.

  

  “응? 기억에 없는데.”    


  그래도 그렇지. 내가 잃어버릴 리가 없다. 이건 선셋 디너 티켓이다. 정신없다고 손에서 놓칠만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디너는 오후 5시에 시작된다. 호텔에서 달링하버 선착장까지는 도보로 13분 정도 걸린다. 그리고 티켓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오후 4시 10분이었다. 지금 준비해서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일단 여행사에 서 있을 때 메고 있던 배낭을 열었다. 없다. 없다. 없다. 안 보인다. 캐리어도 열었다. 마음이 급해서 침대 위에 물건을 다 쏟아냈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 없다.    


  “너한테는 정말 아무것도 못 맡기겠다.”    


  결정타를 날렸다. 그도 답답한 마음에 내뱉은 말이란 걸 안다. 그러나 지금은 비난이 아닌 협업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야 할 때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도 때가 있다. 급하지 않다. 그의 굵고 짧은 한마디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그를 따라 고속도로 갓길까지 따라갔건만,    


  “아, 됐어. 안가.”    


  침대 위에 쏟아낸 물건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빈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도 마음이 답답했는지.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테이블 위에 책이 보였다. 제목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여행지에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챙겨 왔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책을 펼쳤다. 그러자 고이 접어둔 선상 디너 티켓이, 툭 떨어졌다.    


  기억이 재구성됐다. 비행기에서 읽던 책을 배낭에 넣어뒀고. 여행사에서 결제하는 사이 남편에게 받은 티켓을 들고 서 있었고. 여행사를 나오면서 다시 남편에게 티켓을 건넸고. 캐리어를 끌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운 그가 다시 내게 티켓을 건네며    


  “캐리어 나한테 줘요.”    


  라고 했고. 다시 티켓을 받아 든 나는 가방을 열었고. 구겨질까 봐 책 사이에 끼워뒀었다. 스님의 말씀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였다. 사라졌던 티켓마저도.     




  “찾았어?”    


  그가 돌아왔다. 나는 대꾸 없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자칫 뭐 뀐 놈이 성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뭐 뀐 놈도 자존심이란 게 있다.     


  “빨리 가자.”

  “안가.”    


  4시 30분. 초조함과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됐다. 옳다구나 시시덕거리면 나갈 경우. 다음에는 남편에게 더한 말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버틸 경우. 다시없을 신혼여행의 유일한 낭만 코스인 디너를 포기해야 한다.    


  “그럼, 나 혼자 갈게.”    


  그가 일어섰다. 옷을 갈아있고 티켓을 챙겨 들었다. 터벅터벅. 진짜 혼자 갈 생각인 것 같다. 문이 열린다. 내 심장이 오그라든다.     


  “진짜 안 갈 거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오빠도 아까 철조망에 기어 올라갔잖아!”

  “그래서 너도 나한테 소리 질렀었잖아.”    


  그랬다. 나도 썩 관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빨리 가자. 이러다 진짜 늦어.”    


  가방에 쑤셔 넣은 원피스가 구겨졌다. 시간은 4시 40분.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배가 떠나면 끝이다. 구겨진 원피스로 갈아입고 구두를 신었다. 악, 소리가 터졌다. 오전에 혹사당한 발이 하이힐을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운동화를 신었다. 이번에는 바닷바람에 대비할 카디건이 보이지 않는다. 또 어쩔 수 없이 후드 점퍼를 챙겼다.     




  헝클어진 머리, 화장기 없는 칙칙한 얼굴, 구겨진 원피스, 지저분한 운동화, 한 손에는 손가방, 또 다른 손에는 후드 점퍼를 들고뛰었다. 도어 투어 도어. 선착장까지 10분 만에 도착했다. 선착장 앞에는 긴 줄이 있었고. 많은 커플이 있었다. 비로소 내 모습이 보였다. 초라했다. 어쩌다 이렇게 엉망이 됐을까. 하긴, 늘 기대가 크면 더 큰 실망을 맛보곤 했었다.     


  바다 위. 하얀 테이블, 코스요리. 상상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자기야.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그때였다. 내 귓가에 달콤한 고백이 들려왔다. 그였다.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 그. 옆 테이블에도 신혼부부가 있었다. 한껏 꾸미고 온 그들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손을 잡고 있었다. 신혼여행의 클라이맥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친구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될 여자에게 저렇게 속삭였다. 결혼해줘서 고맙다고. 지금 이 순간 정말 행복하다고.

  그 순간, 눈물을 흘린 건 옆 테이블 여자가 아닌 나였다. 이런 내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물론 쪽팔렸다. 그런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왜 그래?”    


  당황한 남편이 나를 달래 보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눈물, 콧물, 심지어 침까지. 내 얼굴의 모든 구멍이 촉촉해질 뿐이었다.     


  코스요리를 먹고 공연을 본 후 선착장으로 나왔다. 모든 도시가 그렇듯. 시드니의 야경도 참 예뻤다. 하지만 바닷바람은 역시 차가웠다. 남편이 내 어깨에 후드 점퍼를 올려줬다.    


  “그래도 오니까 좋지? 시드니 야경, 쥑이네. 낭만도 있꼬!!!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아무리 찍어도 우리의 얼굴은 배경과 어우러지지 못했다. 남편은 답답했는지. 자동이 아닌 수동으로 바꿔보겠다며 열심히 휴대전화를 만져댔다. 그런 그를 보며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지금까지 이런 신행은 없었다. 이것은 낭만인가. 낭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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