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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Feb 14. 2019

결혼, 싸움이 시작되다 (6)

지구 반대편에서 쥐구멍 찾기


  바스락바스락. 이 소리가 좋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보다 잘 마른 이불의 사운드가 나를 편안하게 한다. 깨우는 알람과 사람이 없어도 눈이 떠진다. 아직 오전 7시. 시드니에서의 아침이 또 밝았다.


  창문으로 햇볕이 들어왔다. 외쿡이라 그런가. 하늘도 햇볕도 공기도 맑은 느낌이다. 고개를 돌리면 아직 잠들어 있는 남편이 보인다. 움직임 없이 쌕쌕거리고 있다. 그는 안경을 쓸 때와 벗을 때의 인상이 참 다르다. 나는 예전부터 ‘안경 쓴 고시생 오빠 스타일’을 좋아했는데, 그가 딱 이렇다. 안경을 썼을 때, 순박하지만 똘똘해 보인다. 굳. 굳. 굳. 하지만 안경을 벗으면 투박하고 강한 인상이다. 처음에는 잘 때도 안경을 쓰게 하고 싶었지만, 이건 내가 적응해야 할 문제. 보고 또 보고 또 보니. 안경 벗은 얼굴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갑자기 뽀뽀하고 싶다. 그가 내뱉는 얕은 바람이 내 얼굴에 닿았다. 웁스, 스멜! 그 바람에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역시 모닝 키스는 너무 비현실적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침대를 빠져나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건너편에 제법 큰 규모의 카페가 있다. 아침마다 빵을 굽는지. 호텔 현관까지 그 냄새가 진동한다. 산책이나 하려고 나왔건만, 어느새 내 발은 카페로 향했다. 롱 블랙 한 잔과 치즈 크루아상을 시켰다.   

 

  “혹 씨 한쿡푼이세요?”    


  카페 점원이 물었다. 20대 초반이나 됐을까? 까만색 빵모자와 앞치마가 잘 어울렸다. 부모님이 두 분 다 한국분이라고 했다. 경계심이 풀어진다. 나도 반가운 척을 했다. 외국에서는 외국 사람보다 한국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외국에서 태어난 이 한국 남자가 내게는 기회다.     


  “저, 아까부터 고민했는데요. 치즈 크루아상이랑 버터 크루아상이랑 어떤 게 더 맛있어요?”    


  그는 친절했다. 덕분에 어설픈 영어로 인해 참았던 궁금증을 해결했다. 메뉴를 치즈&햄 크루아상으로 바꿨다. 한 입 먹고 놀랐다. 역시 그 남자는 내게 기회를 줬다. 시드니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맛볼 기회.    


  30분쯤 후 방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가 뒤척이며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묻는다.     


  “입술에 뭐가 묻은 거 같은데?”    


  혹시나 그가 모닝키스를 시도할까 봐.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다. 응? 손바닥에 뭔가가 묻어난다. 빵가루였다. 혼밥이 발각될 위기다. 식탐이 있는 그가 삐질 수도 있다. 당황하는 사시, 그는 다시 잠들었다. 또 잠버릇다. 남편은 긴 잠에 빠질 때, 한 번씩 현실 세계를 확인하고 다시 꿈속으로 빠져든다. 그 후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잠결에 했던 말과 본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내 얼굴에 니킥을 날렸던 밤에 대한 기억이 없던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호텔 방을 나선 건. 그로부터 두 시간 뒤였다.     


  “와. 오늘 날씨 쥑이네. 어? 저기 카페에 사람이 많네? 맛집인가?”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내게 ‘최고의 크루아상’을 맛보게 해 준, 그 카페였다. 찔린다. 피할 수 없다. 고백 타임이다.


  “맛있더라.”

  “?”

  “아침에 눈이 빨리 떠져서, 혼자 나와서 사 먹었어.”

  “대박. 혼자 먹었다고?”

  “오빠가 깊게 자는 것 같아서”

  “넌 치사하게 집에서도 보면 주말에 아침을 혼자 먹더라.”

  “오빠가 11시 넘어서 일어나니까 그렇지. 밥 먹고 또 낮잠 자고. 종일 잠! 잠! 잠!”    


  우린 결혼식 3주 전부터 같이 살았다. 서로의 생활방식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없을 리 없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불편하지만 내 입을 닫는 것’이라 믿었다. 결국, 이렇게 진실의 베일이 벗겨질 거면서 말이다.    


  지난밤 계획대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호텔 바로 앞에 정차했다. 순조롭다. 시드니로 오면서부터 돌발상황과 돌발 싸움이 잦았다. ‘비 온 뒤 맑음’이다. 티격태격 뒤 남태평양의 낭만이 시작될 차례다.   



  

  “잠깐. 잠깐. 설마 고속도로로 가려고?”    


  맑음 뒤 다시 먹구름이다. 또 길이 문제다. 지도로 봤을 때는 분명 걸을만한 거리라고 느꼈단다. 하지만 막상 버스에서 내렸을 때 목적지는 꽤 먼 거리였고. 지름길을 찾겠다며 지도를 따라가다 보니, 고속도로 옆 갓길에 서 있게 됐다.    


  “어쩔까? 다시 온 길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다시 걸어갈래. 아니면 이 길로 조금 더 걸어볼래?”    


  15분 넘게 걸어왔고. 출발지점에서 다시 길을 찾아간다면, 목적지까지 1시간 넘게 걸릴 것 같았다. 안다. 애초에 이방인의 현명한 선택은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었다. ‘지름길’을 찾겠다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이건 모험이 아니다. 신혼여행이다. 이럴 필요까진 없었다.    


  “못 먹어도 고?”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신혼여행은 모험이었나 보다. 어쩌겠는가. 일단 그를 따르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고속도로 갓길을 걸었다. 두 사람이 서서 걷기에는 좁았다. 우린 한 줄로 서서 말없이 걸었다. 이 장면, 본 적이 있다. 건장한 군인도 꺼린다는 그 훈련, 행군과 참 많이 닮았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나?”    


  정말 5분 만에 목적지가 보였다. 문제는 고속도로 갓길에서 그곳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다는 것다. 갓길과 목적지 사이에는 철조망이 있었고. 이 철조망은 고속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세워져 있을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진입할만한 입구는 없었다. 그러자 남편의 입에서 ‘쥐구멍’이란 대책이 나온 것이다.    


  “힘들다. 진짜.”    


  복합적인 의미의 투정이었다. 첫째, 애초에 내가 제안한 택시를 이용하지 않은 것. 둘째, 이방인 주제에 지름길을 찾아내려 한 것. 셋째, 맹랑하게도 쥐구멍 찾기를 제안한 것. 그 외에도 많은 의미가 담겼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쥐구멍은 장난이야. 헤헤.” 


  남편이 아주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굳어버린 내 표정을 살피더니 ‘쥐구멍 찾기’를 관뒀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다. 순리대로 가는 것뿐.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그 지점에서 한참을 돌아서 목적지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남편이 갑자기 철조망을 기어 올라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착! 멋지게 반대편으로 착지한 그가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하루야. 이 방법밖에 없다. 잡아줄 테니까. 너도 넘어봐.”    


  등 뒤로는 위협적으로 달리는 차들이 있었고. 앞으로는 철조망을 사이에 둔 쥐구멍 남편이 보였고. 나는 그사이에 서 있다. 티셔츠에 땀이 흥건했다. 하늘은 맑았지만 날은 더웠다. 이제 모든 상황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 참을 만큼 참았다.    


  “야!!!!!!!! 내가 그냥 택시 타고 오자고 했지!!!!!!!”    




  언젠가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제목이 ‘폭염과 연애 상관관계는?’이었다. 기사는 설문조사에서 66.5% 미혼남녀가 ‘폭염이 연애에도 영향을 미친다’라고 답변했고. 그중 39.8%가 이유가 ‘불쾌지수가 높아져 큰 싸움이 벌어질까 봐’라고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때는 피식 웃으면서 ‘거참, 뉴스거리 진짜 없나 보네’라고 했다.


  이제는 그 기사에 동의한다. 덧붙이면 남태평양의 더위는 신혼여행에 영향을 미친다. 더운 곳에서 이러는 거 아니다. 더운 곳에서 이러면 큰 싸움이 벌어진다.     


    



  결혼, 싸움이 시작되다 (7) 예고    


  신혼여행의 클라이맥스. 선상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하지만 꼴이 말이 아니었다. 민낯, 헝클어진 머리, 구겨진 원피스, 지저분한 운동화. 내가 상상했던 장면 속 여주인공의 모습이 아니다.


  시드니 크루즈의 선셋 디너는 손꼽아 기다려온 코스였다. 곱게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고, 하버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가 멀리 보이는 바다 위에서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엉망진창인 모습이라니.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였다. 그들도 신혼부부였다. 잘 차려입은 커플은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다 남자가 저렇게 고백을 했다. 그런데 그 말에 내가 눈물이 났다. 오글거리는 말을 참 싫어하는 난데, 남의 남자 고백에 눈물을 찔끔거리다니.


  낭만을 잃은 선셋 디너가 이렇게까지 슬플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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