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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Feb 12. 2019

결혼, 싸움이 시작되다 (5)

목소리 큰 사람이 진다

 

“몰라서 물어? 라면 먹는 거 처음 보냐!!!”    


  그가 일찍 돌아왔다. 혼자 저녁을 먹으러 간 게 아니었다. 이 두 가지가 문제였다. 남편의 빠른 등장은 나를 ‘몰래 혼자 라면 먹다가 걸린 여자’로 만들었다. 물론, 그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무안했다. 그런데 창피했다. 게다가 씩씩거리며 소리까지 질렀다.    


  “...”    


  그는 말이 없었다. 차라리 똑같이 소리를 지르거나. 다시 문을 열고 나간다면, 이 상황이 덜 어색해질 것 같았다. 나는 화장대에 앉아 있었다. 왼손에는 컵라면과 오른손에는 나무젓가락이 들려 있었다. 일단 다음 상황을 대비해 이것들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동선이었다. 남은 국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하필이면 화장실이 현관문 옆에 있었다. 이 말은 남편 옆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방법도 있었다. 남은 국물을 다 마셔버리고. 화장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다. 동선은 완벽하다. 하지만 모양새가 빠진다.

  

  “그거 그만 먹고. 저녁 먹으러 가자.”    


  작은 라면으로 배고픔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됐어. 나 배불러.”    


  배고픔 대신 자존심을 지키기로 했다. 화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테이크에 항복하는 건 옳지 않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놀림을 당할 에피소드가 될 확률이 높다. 이럴수록 강하게 나가야 한다.     


  “혼자 먹고 와.”    


  아주 짧지도 길지도 않다. 좀 신경질적이었지만, 적당한 길이의 말로 그를 거절했다. 표정이 좋지 않다. 하긴, 세상 모든 종류의 거절에는 크고 작은 고통이 있기 마련이니까. 볼륨이 한껏 올라간 나와 달리. 그는 톤을 최대한 낮춰서 말했다.     


  “내가 세봤어.”

  “....? 무슨 새?”

  “네가 사 온 물건을 세보니까. 부족할 것 같더라.”

  “?”

  “가족, 친척, 친구, 회사 동료한테 선물 주려면, 10개 정도 더 사야 할 것 같더라고.”    


  보이지 않았다. 남편에게 ‘퍽’ 소리 나게 던졌던 쇼핑백이 안 보인다. 분명 아까 바닥에 물건까지 흩어졌었는데, 없다. 두리번거리다 발밑에서 시선이 멈췄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 화장대 옆에 쇼핑백이 있었다. 언제 내팽개쳤냐는 듯. 가지런히 놓여있다. 모서리 각까지 잘 포개져 있는 걸 보니. 남편의 손이 닿은 게 분명했다. 그는 뭐든 깔끔하게 정리한다.    


  “허, 나, 원, 참, 어. 이. 없. 어. 언제는 대책 없다며?”

  “일단 알았으니까. 저녁 먹으러 나가자.”

  “안 먹는다니까.”

  “너 스테이크 집 가고 싶어 했잖아.”

  “됐다고!!!”    


  벌떡 일어났다. 응? 내가 왜 일어났지? 나는 화가 난 걸까. 스테이크란 말에 반응한 걸까. 후자는 아닐 거다. 내가 상황에 맞지 않게 식탐을 부릴 리가 없다. 나 그런 사람 아니다. 


  “나가자.”    


  남편이 다가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당시 나는 열심히 헬스장을 다닌 덕분에 몸이 꽤 탄탄한 편이었는데도, 바람 인형처럼 맥없이 끌려갔다. 안가. 안가. 입은 계속 버텼다. 하지만 몸은 끌려가면서 신발을 갈아신었고. 외투, 지갑, 휴대전화, 새로 산 립글로스까지 챙겼다. 완벽한 외출 준비였다.         




  “이제 좀 알겠어?”    


  다시 내가 그에게 목소리를 높인 건. 한 시간쯤 후였다. 1인 1 스테이크를 해치운 후, 우린 맥주를 마시며 ‘오늘 일’에 대해 얘기했다. 둘 다 ‘미안하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왜 기분이 상했고. 어떤 오해를 했는지 털어놨다.


  들어보니 그도 나에게 ‘앙금’이 있었다. 일단 립글로스 사건부터 시작됐다. 국내 백화점에서도 구할 수 있는 제품을 굳이 조금 싸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사려고 했던 점. 그 후 제품을 사지 못했다고 비행기에서 자신의 무릎을 의도적으로 공격했던 점. 시드니에 도착해서도 표정이 좋지 않았던 점. 한밤에 자신을 공격했던 점. 상의 없이 선물을 사려고 했던 점. 결정적으로 물건을 던지고 나가버렸던 점이, 화가 났다고 했다.

  나도 차분하게 설명했다. 주로 민낯을 하고 다니는 내게 립글로스가 어떤 의미인지. 왜 그 제품이어야 하는지. 단돈 몇천 원이라도 싸게 사는 게 왜 기분이 좋은지. 비행기에서 얼마나 아팠는지. 왜 시드니를 오고 싶었는지. 한밤에 당신의 니킥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선물은 왜 넉넉하게 사고 싶었는지. 왜 내가 쇼핑백을 던지고 나가버렸는지. 그리고 나가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해 말했다. 끝에는 서러움이 밀려와 목소리가 좀 커졌다.


  남편은 내 말의 전부를 이해하진 못했다. 그는 우린 서로 많이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다른지 몰랐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앞으로 많이 싸울 수도 있단 거지”

  “서로 이해하면 되는 거지. 왜 싸울 생각부터 해?”

  “난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참는 관계가 아니었으면 해. 말할 건 말하고. 싸울 건 싸워야 한다고 봐. 중요한 건. 잘 싸워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싸우자는 거잖아!”

  “아니, 내 말은 싸움이 서로를 미워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아, 머리 아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자.”

  “그런데, 우리 계속 이렇게 대화해?”

  “?”

  “이제부터 계속 반말하는 거야?”

  “그래!!! 오빠가 먼저 했잖아!”

  “아닌데, 네가 공항에서 먼저 했는데”

  “...”

  “아, 그리고 먼저 목소리 높인 것도 너야.”

  “... 그러네. 좀 미안하네.”    


  기선 제압했다. 그가 나를 제압했다. 아주 조용하게 말이다. 다들 목소리 큰 사람이 무조건 이긴다고 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목소리 큰 사람이 졌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남편이 피맥을 제안했다. 나도 오늘은 한 잔 더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와 같은 피자집에 갔다. 맛도 괜찮았고, 가격도 좋았고, 무엇보다 주인장이 친절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매일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커플인가요?”    


  주인장이 물었다. 그는 지난밤에 왔던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제와 똑같은 질문을 이어갔다. “신혼여행이냐?” “호텔은 어디냐?” 등. 그리고 어제와 똑같이 친절했다. 매우.    


  시드니의 깊어가는 밤. 우린 피자와 맥주를 마시며 다음날을 계획했다. 사진 찍기 좋은 명소에 갔다가. 선상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나는 내일 오전에 가는 곳은 가까우니까, 택시를 타자고 했고. 남편은 가까우니까, 버스를 타자고 했다. 나는 첫날에 길을 헤맸던 일이 떠올라 불안했고. 남편은 한번 헤매 봤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 있다고 했다.

  일단 그의 뜻에 따라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결혼, 싸움이 시작되다(5) 예고   


  다음 날, 남편은 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고속도로 갓길에서 철조망을 넘게 된다. 쫙. 멋지게 철조망 반대편에 착지한 그가 내게 말했다.


  “잡아줄 테니까. 넘어와!”


 등 뒤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다시 돌아가자니 겁이 났다. 그에게 내 기분을 설명했다.

    

  “야!!!!! 내가 그냥 택시 타고 오자고 했지!!!!!”  


  나는 또 남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다. 악을 썼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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