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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Feb 11. 2019

결혼, 싸움이 시작되다 (4)

기선제압과 배고픔 사이에서


  호텔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저녁 시간이었다. 숙소 근처에는 식당과 쇼핑몰이 몰려있는 탓인지. 연인들, 친구들, 가족들 등. 둘 또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혼자 걷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갈 곳’ 또는 ‘만날 사람’이 있어 보였다. 어쩐지 불안한 시선으로 거리를 기웃거리고 있는 건. 나뿐인듯했다.


  오전에 사막에서 썰매를 즐긴 탓인지. 피곤했다. 잠시 쇼핑몰 광장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냈다. 호텔 방에서 나오면서 꺼버린 전원를 켰다. 통화목록과 문자함을 살폈다.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남편이 연락한 흔적이 없었다. 생판 모르는 나라에 와서 지갑도 없이 나갔는데, 걱정도 안 되는 건가. 아니면 홀로 해외여행을 다닌 경험이 있는 나를 믿는 건가. 어느 쪽이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멍하게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습관이었다. 인터넷 검색 포털을 클릭했다. 느리다. 아니, 정확히는 연결이 안 된다. 여행 내내 붙어있을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의 휴대전화만 로밍했고. 내 전화는 호텔에서 와이파이를 연결해 사용하기로 했다. 빈 몸으로 뛰쳐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를 쫓아낼걸. 후회됐다. 게다가 배도 고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면에 피자집이 있었다. 침이 고였다. 아는 맛이다. 지난밤 야식을 먹기 위해 피자를 산 곳이었다. 남편과 내게 ‘어디서 왔냐?’ ‘커플이냐?’ ‘신혼여행이냐?’ 등. 이런저런 질문을 했던 주인장이 보였다. 피자를 건네주며 결혼도 축하해줬는데, 다음날 신부는 홀로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이라니.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괜히 뜨끔하여 자리를 옮겼다.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휴대전화를 열었다. 지금 볼만한 건. 사진첩뿐이었다. 최근 사진은 전부 남편과 결혼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제일 앞에는 사막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남편과 점프를 하는 연출 컷이었다. 역광으로 찍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배경이 끝내줬다. 이건 배경 사진 감인데. 지금 당장 사진을 바꿀 수 없다는 것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즐거웠다는 사실에 더욱 우울해졌다.


 은근 일교차가 있었다. 점점 쌀쌀해졌다. 민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춥고 배고팠다. 서러웠다. 신혼여행 와서 ‘춥고 배고픔을 느끼는 신부’가 나 말고 또 있을까.     




  다시 호텔로 들어갔다. 방으로 가지 않고 로비 소파에 앉았다. 휴대전화를 꺼내서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드디어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열렸다. 하지만 실시간 검색어 따위가 궁금하지 않았다. 다시 카카오톡을 열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친구들과의 단톡 방, 그리고 남편과의 단톡 방에 빨간 표시가 보였다. 클릭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메시지가 보였다.    


 “어디야?”    


  3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마지막 말이 ‘어디야?’였던 것이다. 궁금했다. 어디냐고 묻기 전, 그는 내게 사과를 했을까. 아니면 더 따지고 들었을까. 한참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추론해 봤지만, 확신이 드는 쪽은 없었다. 남편은 굉장히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은근히 포커페이스에 강한 인물이었다. 표정만으로 감정을 가늠하기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바로 메시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1이 지워지는 순간 내가 그에게 밀리니까.

  떠올랐다. 결혼 전 기혼자 친구와 선배의 이런 조언들이.   

  

  “기제압! 초장에 잡아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기선제압을 해야 할 때.        




  “Do you need anything?” 


  혹시나 남편이 로비로 내려올 것을 대비했다. 소파에 몸을 깊게 넣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대략 40분째 말이다. 그러자 직원이 다가와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다. 짧게 "아임 오케이!"를 외쳤다. 하지만 직원의 눈빛은 ‘오케이’가 아니었다. 일단 내가 이 호텔의 손님이란 걸을 증명 해야 했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카드를 보여줄 셈이었다. 아차.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차차. 나는 지금 빈 몸이었다. 그렇다고 룸 번호를 말해줄 순 없었다. 혹시나 방으로 전화를 할 경우. 남편에게 내 위치가 발각된다. 대충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고 둘러댔다. 직원도 일단 후퇴하는 듯했으나. 반경 50미터 안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야 했다.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으로 갔다. 하지만 도저히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리에는 이제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승강기를 탔다. 방이 있는 8층을 눌렀다. 잠시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으나. 기죽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기선제압! 이건 방에 가서도 할 수 있다. 일단 들어가서 그와 대화를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버리자! 꼬르륵. 배가 고팠다.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컵라면이 떠올랐다. 흠. 방에 들어가서 말없이 라면을 먹는다면, 좀 우스워질까? 고민이 됐다. 이렇게 갈등하는 사이, 방문 앞까지 왔다. 똑똑. 카드 정도는 챙겨서 나갈걸. 후회가 또 밀려왔다. 문이 열렸다. 남편이 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계획대로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어디 갔었어?”    

  

  남편이 물었다. 나는 대꾸 없이 등을 돌렸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나를 주시하는 것 같더니. 이내 가방을 챙겨서 나가버렸다. 덜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메시지를 확인했다.    


  “우리 오늘 스테이크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요. 일단 들어와요. 밥부터 먹고 얘기해요.”

  “신혼여행 와서 이런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배고플 텐데, 빨리 들어와요.”

  “어디야?”    


  사과도 아니고, 따지는 것도 아닌, 애매한 메시지였다. 마지막 ‘어디야?’를 제외하면 저녁 식사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어이가 없다. 이 와중에 밥이라니. 내 걱정은 안 하고 제 밥걱정만 한 건가? 그가 나간 문을 노려봤다. 그러다 문득, 혹시 그가 혼자 스테이크를 먹으러 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과 여행용 가방을 살폈다. 가방도, 지갑도, 여권도 없었다. 이건 단순히 담배를 태우러 간 게 아니다. 분명 외출이다. 분명 스테이크다. 이건 배신이다.     




  홀로 남은 방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젓가락을 네 번 정도 넣었다가 뺀 것 같은데, 면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큰 컵’으로 사 올걸. 안타까운 마음으로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건조된 채소가 이렇게 맛있었나? 둥둥 떠 있는 작은 파까지 음미하며 씹고 있던 그때    


  ‘삑~’    


  방문이 열렸다. 남편이었다.     


  웁!!!! 컥컥!!!    


  열심히 씹어 넘긴 국물과 건더기가 목에서 탁하고 걸렸다. 기침하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창피함과 수치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남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   


  “너 지금 뭐 해?”    


  제압. 배고파서 라면 좀 먹은 게 어때서. 쫄 필요 없다. 당당해야 한다.    


  “몰라서 물어? 라면 먹는 거 처음 보냐!!!”    


  대답하고 보니, 당당하다기보다는 좀 씩씩거리는 듯한 뉘앙스가 되어버렸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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