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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Feb 07. 2019

결혼, 싸움이 시작되다 (3)

한밤에 얼굴을 가격 당하다

  

  퍽. 

  한밤에 얼굴을 가격 당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눈이 떠졌다. 나는 여전히 신혼여행 중이었고. 호텔 방이었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불을 켜보니. 이 방에는 단 두 사람. 남편과 나뿐이었다. 고로, 나를 공격한 건. 옆에서 잠들어 있는 그였다. 몇 가지 정황들이 보였다. 일단 그의 머리는 내 베개에, 튼튼한 두 다리가 내 자리에 있었다. 남편은 잠결에 내 자리를 침범했고. 불편하여 몸을 아래로 옮긴 내 얼굴을 무릎으로 가격한 것이다.


  얼굴이 욱신거렸다. 화장실에 가서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코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코피가 안 터진 게 다행이었다. 이런 아픔, 나만 느낄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달려갔다. 잠들어 있는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윽, 소리와 함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왜, 왜, 무슨 일인데요?”

  “아, 진짜, 잠버릇이 왜 그렇게 더러워요? 오빠 지금 니킥으로 내 얼굴 날린 거 알아요?”    


  그가 ‘으하하’ 웃었다. 니킥이란 단어를 장난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더니 나를 침대에 눕히고 불을 껐다.     


  “미안해요. 미안해. 내일 사막에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하니까. 일단 자요.”  


  잠이 오지 않았다. 얼굴 중앙에는 아직 통증이 남아있었다. 불이 꺼지자. 남편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괘씸했다. 나도 그의 얼굴을 무릎으로 찍으려고 자세를 잡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신혼여행은 시작부터 이런 일들 투성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처음부터 말하지, 왜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시드니에 도착해서 호텔로 오기까지. 한차례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 일단 점심부터 먹을까요?”    


  그는 내게 싸움 대신 점심이 어떠냐고 제안해 왔다. 어차피 당장 호텔에 도착한다고 해도 체크인까지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싸운다면 여행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결론이 아니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밥도 싸움도 땅기는 게 없었다. 남편은 나를 끌고 근처 레스토랑으로 갔다. 태국 음식점이었다. 시드니에서 태국 음식? 의아할 수 있지만, 미리 선별해 둔 맛집 중 한 곳이었다.


  팟타이는 냄새도 맛도 훌륭했다. 몇 시간 전까지 변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을 먹었고. 우울했던 기분마저 꾸역꾸역 소화되는 듯했다. 남편과도 부드럽게 대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길바닥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점이 서운했는지. 차분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쯤 비 내리는 시드니 거리를 보며 대화를 했고. 비가 멈춘 후에 다시 호텔로 향했다. 이번에는 헤매지 않았다.    




  “헐!!! 이거 뭐야?”


  호텔은 위치는 좋지 않았지만, 예뻤다. 작은 건물을 개조한 건물에는 고전미와 현대미가 뒤섞여 있었는데, 특히 나무와 돌벽 사이를 가로지르는 투명 승강기의 조화가 독특했다. 우리의 방이 3층이었는지. 4층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문이 열렸을 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필이면, 우리 방 창가는 건물 뒤에 있는 고가다리의 내리막 지점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창을 뚫어지라 바라본다면, 지나가는 차량의 운전자도 볼 수 있다는 거리였다. 밖은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린 서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다시 우울해졌다

  그날 밤 커튼을 친 그 방에서, 나는 남편에게 니킥으로 얼굴을 가격 당했다. 그리고 18시간 후. 이번에는 내가 남편을 가격했다. 쇼핑백으로.     




  다음날 사막을 다녀온 후. 달링하버 주변을 걷다가. 쇼핑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산 건. 립글로스였다. 물론 원하는 브랜드는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평소에 사용하는 색상과 비슷한 제품을 골랐다. 그리고 양태 반 크림과 마누카꿀을 각각 15개씩 바구니에 넣었다. 결혼식에 와준 가까운 지인과 친척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그때였다.     


  “이거 다 누구 주려고 사는 건데요?”

  “회사 사람도 주고, 친척들도 주고, 남는 건 나도 쓰고, 하려고요. 근데 왜요?”

  “그냥 막 주워 담는 느낌이라서요. 누구누구한테 선물할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쇼핑에 환장한 여자. 외국 왔다고 막무가내로 사는 여자. 생각 없이 일단 지르고 보는 여자. 그의 말이 이렇게 해석된 건. 공항에서의 립글로스 사건에 대한 앙금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넉넉하게 사서, 결혼식에 와준 사람들 나눠주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누구누구 줄 건지. 꼭 여기서 사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차분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거죠.”

  “아니, 대체, 피곤하게, 뭘 그렇게 자꾸만 따지고 고려하고 확인하라는 건데요? 여기, 마트라서 싼 편이고. 일단 오늘 사두고. 나머지 날들에는 노는데 집중하고 싶다고요!”


  이게 왜 피곤한 일이지? 당연히 소비할 때는 꼼꼼하게 따져가면서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그의 말이 짧아졌다. 먼저 반말을 했다. 나도 질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엑셀로 받을 사람 선물 품목 가격 등등. 리스트라도 만들어? 모르겠고. 일단 난 살래.”    


  나는 기어코 물건을 들고 계산대로 갔고. 그는 호텔로 돌아갔다. 그렇게 물건을 사서 호텔로 돌아가자. 그가 당황스럽다는 듯


  “미치겠네. 진짜. 그걸 진짜 샀어? 내가 이래서 너한테 돈 관리 안 맡기려고 한 거야.”    


  돈 관리를 누가 할 것인지 결정된 바가 없었다. 남편은 엑셀로 꼼꼼하게 정리했으면 좋겠는데, 못할 것 같으면 자신이 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해왔다. 월급 전체를 그에게 맡기고 용돈을 받아 쓰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매달 엑셀을 정리하는 것도 싫었다. 솔직히 각자 관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린 듯했다. 이어서 결정타를 날렸다.    


  “하여간 대책 없다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는 게 하나도 없어.”    


  퍽.

  남편에게 쇼핑백을 던졌다    


  “그러는 너는?그렇게 꼼꼼하고 철두철미한데 왜 대책 없는 나랑 결혼했냐?”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고. 이판사판이었다. 나는 휴대전화만 챙겨서 방을 나와버렸다. 얼굴이 뜨겁게 욱신거렸다. 한밤에 얼굴을 가격 당했을 때보다,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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