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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Feb 02. 2019

결혼, 싸움이 시작되다 (2)

1월의 시드니는 온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사지 말라고?”    


  툭 하고 튀어나왔다. 반말이.     


  “뭐?”    


  그도 짧게 받아쳤다. 아, 나의 실수다. 다툼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말을 하지 말자고 한 건, 나였다. 그런데 내가 그 규칙을 먼저 깼다.

   

  “시간 없어요. 지금 빨리 사 와야겠어요.”  


  일단 남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가 툭, 내 손을 밀쳤다.    


  “그걸 지금 꼭 사야 해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벌써 화장품 판매장에 들어가 있을 터였다. 만약 그가 어제 무리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뭉그적거리지 않고 좀 더 빨리 공항에 도착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설전이었다.

    

  “립글로스 안 가져왔어요. 시드니에서 필요한데”    


  나의 화장법이라던가. 원피스에 필요한 구성이라던가. 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립글로스가 필요한 이유를 말했다. 그러자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줬다.     


  “이거 같이 써요.”    


  립밤이었다. 색과 향은 없지만, 바르고 나면 참기름 칠한 듯, 입술이 번들거리게 되는 제품이었다. 어쩌라고, 란 말이 또 나오려는 걸 참았다. 나는 립스틱 대신 색이 있는 립글로스를 쓴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립글로스만큼은 꼭 쓰는 브랜드, 색상, 제품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시드니에도 저 립글로스 팔지 않을까요?”     


  또 묻는다. 귀찮아서 안 판다고 답하면, 확신하느냐고 물을 게 뻔했다. 그리고는 시드니에 입***매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이미 10분이 지났다. 같은 자리에 서 있는데, 화장품 판매장이 시야에서 더 멀어진 것 같았다. 늦었다. 이젠 정말 비행기 탑승장으로 가야 했다. 온갖 험한 말이 떠올랐다. 입으로 그 말이 쏟아지기 전에, 면세점을 등지고 먼저 걸어갔다.


  


  

  “도착하면 호텔 근처에 있는 쇼핑몰에 갈까요? 아니면 저녁 먹는 곳 근처에 있는 쇼핑몰에 갈까요? 립글로스 사야죠.”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할 때쯤, 그가 말했다. 입을 꾹 닫고 있는 내게 눈치가 보여서 한 말이 아니었다. 이건 제안이었다. 그는 작은 결정을 할 때조차 확인하고 또 확인했고.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그리고 선택이 어려워질 때는 제안을 한다. 첫 데이트를 할 때도 그랬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인데 가고 싶은 곳이 없다고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제안하는 것 중에서 선택해 주세요. 1번 백운호수 파스타, 2번 이천 한정식, 3번 두물머리 오리고기, 4번 신사동 퓨전요리.”


  “음, 3번이요.”    


  두물머리 오리고기? 처음 듣는 조합이 흥미로웠다. 그는 친구들에게 추천받은 장소와 식당 리스트라고 했다. 그날의 오리고기는 성공적이었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겠지. 한산했던 음식점에는 손님보다 파리가 많았고. 고춧가루가 가득 들어간 오리주물럭은 냄새가 났고. 치아 사이로 끼어드는 고춧가루로 인해 우린 둘 다 가게를 나와 화장실에 갈 때까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때도 우린 함께 웃었다. 최악의 음식마저 우리를 즐겁게 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믿었다.  

 

  그는 늘 사소한 일에도 몇 가지 제안을 하곤 했다. 선택 장애가 있는 내게 그 제안은 편리하고 고마운 것이었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후회가 없었고. 무엇이건 추억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비행기 타기 전에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전날 술을 조금만 덜 마셨더라면, 이런 제안을 할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난 아무런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기내식으로 나온 비빔밥을 허겁지겁 먹은 게 문제였다.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 소화되지 못한 비빔밥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옆자리에는 숙취로 힘들어하는 남편이 잠들어 있었다.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거칠게 쌕쌕거리기만 할 뿐. 눈을 뜨지 않는다. 숨소리까지 얄밉다. 결국, 입을 틀어막고 혼자 일어섰다. 내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복도로 나가려면 남편의 무릎을 지나쳐야 한다. 익스큐즈밋! 꾸욱. 의도적으로 남편의 발을 밟고 지나갔다. 악, 소리가 났다. 그제야 눈을 떴다. 어디 가느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살포시 무릎을 돌려서, 길을 내어준다. 다시 눈을 감는다. 아직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에는 나가면서 팔꿈치로 남편의 머리를 가격했다. 물론 의도적이었다. 다시 악, 소리가 났다. 그는 눈을 뜨고 무릎을 더 틀고, 몸은 의자 안쪽으로 밀착시켰다. 끝내 ‘좁은 길’이 문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세 번쯤 화장실 변기를 잡고 속을 비워냈다. 그러나 아직 역류하는 것이 있었다. 남편에 대한 짜증이었다. 그러나 힘이 없었다. 잠을 자야 했다.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때였다. 남편이 나의 이마에 손을 올린다. 숙취가 사라진 듯했다.  

    

  “어디 아파요?”    


  힘이 남아있었다면, 다시 한번 그의 발을 밟았을 것이다. 꾸욱.

    



  분명, 1월의 시드니는 맑고 온화한 날이 대부분이라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시드니의 하늘은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온통 회색빛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뭔가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근데 하루 씨가 예약한 부티크 호텔, 위치가 좀 애매하네요.”    


  구글 지도를 들여다보던 남편이 말했다. 순간,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운전할 때마다 친절한 내비게이션의 안내에도, 늘 다른 길로 핸들을 꺾던 그였다. 1시간이면 도착할 곳을, 차량정체 없이도 1시간 30분 이상이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나설 수도 없었다. 나도 꽤 알아주는 ‘길치’였으니까. 우린 각자 커다란 배낭과 캐리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예상대로 우린 길을 헤매었고. 나의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가 나의 캐리어를 빼앗아 갔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둘 다 말이 없어졌고. 끝내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졌다. 건물로 잠시 몸을 피하자던 그가, 두 개의 캐리어를 끌며 이렇게 말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신혼여행은 휴양지로 가는 것 같아요.”    


  시드니로 오자고 했던 건 나였다. 휴양지로 의견을 냈던 그도 알았다고 했다. 위치 좋은 호텔로 6박을 다 잡자고 했던 그에게, 첫날은 예쁜 부티크 호텔을 가자고 했던 것도 나였다. 그는 분명 대꾸 없이 알았다고 했었다. 저 말투에 원망이 묻어있던 건 아니었다.  

   

  “싫으면 싫다고 처음부터 말하지, 왜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 순간 누군가를 원망하게 된 건 나였다. 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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