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되었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의심하기
스도쿠를 풀 때 확정된 칸이 많을수록 풀기가 쉬워진다. 더 이상 다른 숫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확정된 칸의 숫자를 전제로 남은 칸의 경우의 수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스도쿠를 풀 때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판단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뇌가 한 번에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효율 차원에서 많은 요소가 이미 확정되었다고 믿으며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편하다. 현실은 확정할 수 있는 요소보다 불확실한 요소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예측 모델을 바탕으로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의심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의심한다. 스스로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줄 아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으며, 의심의 방향을 고정한다. 의심은 곧 믿음의 또 다른 형태로 작용한다.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반증 가능성’이다. 어떤 가설 또는 이론이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절대적 진리처럼 여겨졌던 내용이 시대가 흐르면서 반박되기도 하고, 이를 반영하여 교과서의 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18세기 산업혁명기의 교과서와 현대 교과서의 내용을 비교한다면 그대로 유지된 내용도 있지만, 수정되거나 폐기된 내용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을 고정값이라고 여기며, 더 이상 지식을 업데이트하지 않은 채 그때 배운 내용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다. 특히 교과서는 어떤 사실을 주요하게 다룰지, 어떤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 집필진의 의도, 더 나아가 정부의 의도가 반영되기 때문에 동시대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자체가 완벽하게 가치중립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기초 지식으로서 배운 내용을 의심하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자신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은 아집이 되어 오히려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기회를 차단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속한 집단 전체를 일반화하여 함께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와 같이 일반화를 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왜 어떤 집단의 특성만을 문제의 원인이라고 확신하며, 일반화의 범위를 인간 종 전체로까지 확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까? 그 지역 사람이라서, 그 나라 사람이라서, 그 집단에 속한 사람이라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왜 그 범위를 더욱 넓혀 인간이라서, 생물이라서 문제라고까지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실제로 어떤 특성이 특정 집단과만 매우 큰 상관관계로 매칭되는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명확하게 몇 가지만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매우 복합적이며, 원인이 되는 주요한 특성 몇 가지는 반드시 특정 집단이 아니더라도 다른 집단과도 비슷하게 공유되는 특성일 수 있다.
그럼에도 특정 집단에 한정하여 일반화를 하는 것은, 그렇게 문제의 원인을 확정지음으로써 그 집단만 피하면 안전해질 수 있다고 여기며 쉽게 불안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자신은 그 집단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고, 그 집단을 비난하면서 자신이 더욱 도덕적인 사람임을 내세울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주장이 맞는지, 틀린지를 판단할 때에도 일반화와 관련된 문제가 두드러진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의 말은 일단 무조건 맞는 말, 내가 혐오하고 반대하는 사람의 말은 일단 무조건 틀린 말로 느끼기 쉽다. 의식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서 무의식이 일차적으로 만들어낸 평가를 조정하려고 하지만,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평가를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쉽게 채택하고, 자신의 믿음을 반박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그것이 왜 틀렸는지 어렵게 이유를 찾아가며 잘 채택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존 신념에 대한 확신만을 강화할 뿐이다.
또한 ‘내 편’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반대편’의 사람들이 ‘내 편’을 더욱 비난하고, ‘내 편’의 맞는 주장까지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점점 중도적인 관점은 사라지고 극단만이 남게 된다.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그럴듯한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각자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근거는 이야기에 그럴듯한 맛을 더하는 조미료의 역할만을 하는 경우가 많다.
1960년대 미국의 뇌과학자 로저 스페리와 마이클 가자니가는 간질 치료를 위해 왼쪽 뇌와 오른쪽 뇌를 이어주는 뇌량을 제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였다. 화면의 오른쪽 시야(좌뇌만 인식) 또는 왼쪽 시야(우뇌만 인식)에 그림을 아주 짧게 보여주고, 그 그림과 어울리는 그림 카드를 같은 쪽 손으로 고르게 하는 실험이었다.
한 참여자에게 오른쪽 시야(좌뇌만 인식)에는 ‘닭발’ 그림을 보여주고 왼쪽 시야(우뇌)에는 ‘눈 덮인 마당’ 그림을 보여주었을 때, 참여자는 오른쪽 손(좌뇌 담당)으로는 ‘닭발’과 관련된 ‘닭’ 그림 카드를 집었고 왼쪽 손(우뇌 담당)으로는 ‘눈 덮인 마당’과 관련된 ‘삽’ 그림 카드를 집었다.
그런데 참여자에게 왜 그 카드들을 골랐는지 물었을 때, 재미있는 답변이 나왔다. 논리를 만들어내어 말을 하는 것은 주로 좌뇌에서 처리되는데, 참여자의 좌뇌는 오른쪽 시야에 있던 ‘닭발’은 인식했지만 왼쪽 시야에 있던 ‘눈 덮인 마당’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참여자는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기 때문에 삽 그림 카드를 골랐다”고 대답했다. 사실 우뇌는 ‘눈 덮인 마당’ 때문에 ‘삽’을 고른 것인데, 좌뇌는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즉석에서 ‘닭장’과 ‘삽’을 연결하여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나중에 그럴듯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이라고 믿는 것일 뿐, 실제로는 객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자신이 객관적이라는 확신은 오만이 될 수 있다.
기존에 내린 판단을 확신하면서 그것을 모든 주장의 기본 전제로 삼는 것은 편하고 효율적이다. 확정된 판단을 의심하면서 굳이 다시 들여다보고 따져보는 일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일을 의식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 확정된 판단에 기대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판단의 정확성과 세밀함을 잃게 되어 더 큰 비효율과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인정하기 두렵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바뀔 수 있고 불확실하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인정해야 한다. 과도한 의심은 과장된 불안과 잘못된 음모론을 낳기도 하지만, 적절한 의심은 관성적인 신념의 고리를 끊어내고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물론 그 과도함과 적절함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과도하게 낙관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자세를 갖는다면, 그 적절한 지점을 찾아낼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