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사소한 이별
그와 만나고 헤어지기를 서너 번 정도 되풀이하고 다시 만나 새롭게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우연히 처음 시작한 직장생활을 비슷한 시기에 그만두게 되었고 이때다 싶어 우리는 여행을 계획했다. 백수의 넉넉하지 못한 사정으로 목적지는 가까운 도쿄로 정해 곧장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거대한 도시의 연말은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화려한 불빛이 넘쳤고 모든 것이 낯선 여행자를 한껏 들뜨게 했다. 그러다가도 두꺼운 외투를 뚫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매서운 겨울바람은 백수라는 암울한 신세를 떠올리게 해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했다.
처음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도쿄타워, 시부야, 고쿄, 아사쿠사, 롯폰기 등의 상투적인 코스를 빠짐없이 둘러보고 나니 일정은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다. 우리에겐 그저 그런 명소에서 찍은 훈장 같은 기념사진들만이 남았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지막 날 아침, 숙소 창문으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할 틈도 없이 서둘러 눅눅한 옷가지를 챙겨 짐 가방에 구겨 넣고 떠날 채비를 했다. 전날 그가 애지중지 챙겨 온 값비싼 샴페인을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받아 마신 것이 탈이 났다.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아침까지도 속이 울렁거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선지, 곧 닥칠 우울한 현실 때문인지, 나리타 공항행 열차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어제보다 훨씬 매섭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출국장은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사람들과 배웅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몹시 붐볐다. 수속카운터 대기 줄은 지그재그로 끝도 없이 늘어져 있고 응집한 사람들과 히터가 내뿜은 열기 속에서 정신은 점점 혼미해졌다. 항공사 마일리지로 티켓을 마련하다 보니 돌아가는 서울행 비행기는 각자 달랐다. 나의 출발 시간은 두 시간 남짓 남았고, 그는 다섯 시간 후여서 먼저 수속 준비를 했다. 정신을 다잡고 사람들 속을 헤쳐 겨우 카운터 앞까지 도착해 무인 기계로 재빨리 절차를 마치고 짐을 부쳤다.
두툼한 외투를 벗고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제야 그도 상기된 얼굴을 가라앉히며 무거운 짐을 끌어 의자 끝에 세우곤 옆에 다가와 앉아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괜찮아?"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많이 좋아졌어."
견딜 만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하면 꼭 연락해."
"응, 문자할게."
한동안 말없이 티켓만 내려다보던 그는 다시 내 쪽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안 좋으면 승무원한테 꼭 말하고. 알았지?"
"알았어. 걱정하지 마."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언제 졸았는지 모르게 한참이 지나 눈을 떠 보니 중앙 시계는 벌써 출발 한 시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야겠다."
가방과 외투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행기 뜨기 전에 꼭 메시지 보내."
"알겠어."
"도착해서도 꼭 연락해. 알겠지?"
그는 내가 괜찮은지 계속 신경이 쓰이는 듯 몇 번이나 당부했다.
"응, 알겠어. 이제 간다."
짧은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잘 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망치듯 저만치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 금세 짠해지며 콧등이 시큰거렸다. 돌아가서 분명 만날 것임에도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영 헤어지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남들이 보면 참 우스꽝스러운 광경인데 둘은 사뭇 진지했다. 그렇게 석연찮은 마음을 뒤로하고 비행기에 올라 서울에 도착했다.
그 후로 오륙 년이 흘렀다. 그사이 고민거리를 털어놓던 든든한 친구는 해외로 봉사활동을 떠났고, 종종 소소한 일상을 나누던 선배는 먼 타국으로 시집을 갔다. 근래에는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동료가 직장을 떠나기도 했다.
가깝게 지낸 사람들과 헤어지는 순간이 많아질 때면 문득 그때의 나리타 공항이 떠오른다. 인생을 살다보면 무수히 많은 만남과 이별을 맞닥뜨리게 된다. 어쩌다 헤어지는 순간이 오면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리라 희망하고 그 바람은 종종 이뤄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그 순간만큼은 다신 못 볼 것 같은 깊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뒤로 사계절이 지나고 그와 또다시 헤어졌다. 만남과 이별을 언제까지 반복하나 했더니 이후로는 영 그러지 않게 됐다. 그날 둘의 미래를 예측이나 한 듯 그가 울먹였던 것을 떠올리면 가끔 기분이 묘하고 서늘해진다. 헤어지고 다신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어 가벼운 이별 앞에도 한없이 약해지고 가슴이 아린 것인 줄 모르겠다.
by. Tam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