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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erine Dec 20. 2023

결혼 생각은 없었는데 소개팅은 열심히 했다

열심히 했다 소개팅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은커녕 기대도 별로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디즈니 공주병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ㅋㅋㅋ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한 후 나는 영화에서 보던 부부가 아이와 함께 살다가 헤어지는 일이 내 부모님의 일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울 엄마 아빠가 이혼이라니.


엄마가 아빠랑 이혼할 거라고 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럼 내 결혼식에는 누가 손 잡고 들어가?"


내게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결혼에 대한 환상은 그 이후 사라졌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많이 혼란스럽고 슬펐지만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한 가지는 확실하게 배웠다.


배우자를 어떻게 대하면 배우자와 이별을 하게 되는지를 말이다.


어떤 말투와 표정을 쓰면 배우자가 슬퍼하는지, 슬퍼하는 배우자를 공감해 주지 않으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서로 대화가 줄게 되는지 내 부모님을 보며 알 수 있었다.


막말을 하면 더 센 막말이 그다음 싸움에 등장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서로 소리를 지르고 싸우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 가끔은 '정말 저 두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싸우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부모님의 그라데이션 분노와 급 발진 분노들을 수년간 지켜보며 나는 나중에 내 배우자와 잘 지내기 위해서 나의 엄마 아빠가 서로에게 보인 행동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 연애를 하면서 나는 나의 잠재적 배우자가 될 수도 있을 애인들을 배려하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나보고 남자친구에게 너무 잘해주지 말라고 했다. 나의 언니는 적당히 밀당도 하고 튕겨야 너가 만만한 여자 친구가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연애하는 사람 따로 결혼하는 사람 따로야."


대학교 1학년 친구들하고 술을 먹다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매우 놀랐다. 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연애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다.  


학점 관리도 하고 놀러도 다니면서 연애하는 게 힘들어 죽겠는데, 밀당 같은 것에 쓸 에너지가 아까웠던 나는 주변에서 놀랍다고 말할 정도로 정말 사귀었던 남자친구들에게 잘해줬다. 말을 예쁘게 하려고 노력했고, 밀당은커녕 내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내가 사귀는 상대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참고 이해해 주면 상대방도 내 진심을 알고 서로를 배려하고 발전하는 연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인 배려와 애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한 것이 되어갔다. 애인들과의 관계를 잘 지키려고 노력하던 나는 나의 배려와 이해심을 당연하게 여기던 몇몇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남자친구들을 겪으면서 나 나름의 연애관이 생겼다. ‘내가 잘해주는 걸 당연시 안 하고 늘 고맙게 생각해 주는 사람과 만나야겠다’와 같은.


대학교 시절 사귄 애는 내가 게임을 줄이고 취업 준비를 더 하는 게 너에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자, 너가 싫다고 하면 이제 앞으로 게임을 절대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애는 나에게 잘 자라고 사랑스러운 카톡을 평소보다 더 길게 보내는 날이면 늘 새벽에 롤을 하고 아침 수업에 지각을 했었다.


롤 전적 페이지를 나에게 보여주다가 이 사실을 들킨 후 미안해하며 다시는 게임을 안 하겠다던 그는 계속 반복해서 거짓말을 들켰고 나중에는 게임을 못하게 하는 내가 너무 자신을 억압한다고 투덜댔다. 그 이후 그 애는 자기는 게임을 못하게 하는 사람이랑은 결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니? 너가 안 한다며...ㅎ


그 당시 나는 그 애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보다 나에게 몸이 안 좋아 일찍 잔다고 구라치고 게임을 해 놓고는, 며칠 뒤 자신의 롤 티어가 올랐다며 나에게 자랑하던 그 아이의 지능이 더 실망스러웠다.


난 그 애를 사귄 이후 거짓말하는 남자는 물론, 거짓말하는 멍청한 남자는 더 싫어졌다. 그 애와 헤어진 이후 나는 게임하는 남자와는 사귀지 않았다. 이후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거짓말하는 사람, 멍청한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말아야지’와 같은 나만의 사귀고 싶은 남자친구에 대한 기준들도 생겼다.


아니, 사귀고 싶지 않은 남자에 대한 기준들이 생겼다.


재밌는 사실은 결혼한 이후 나는 남편과 같이 게임을 한다. 나는 사실 게임하는 남자가 싫었던 게 아니었던 거다. 자기

조절 능력이 없는 사람이 싫었던 거다.


대학교 이후 만났던 남자친구들은 생각해 보면 그냥 다 비슷비슷하게 나랑 안 맞았었다. 나 또한 걔네들한테 그랬겠지.


취업 후, 주변에서 소개팅을 시켜줄 테니 나가보라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대학원 졸업장과 회사라는 소속이 생기니 그 두 가지 만으로 나는 지인들 사이에서 주변 회사 다니는 사람에게 소개팅을 주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데이트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싶어서 나는 열심히 소개팅을 했다. 나의 20대 중반 시기를 대학원에 갈아넣었으니 이제 남은 20대 시간을 회사에만 갈아 넣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친구 중에 인맥이 많은 애한테 소개팅을 하고 싶다고 하니, 한 단톡방을 보여줬다. 그 단톡방은 내 친구의 동기들끼리 만든 단톡방이었는데, 거의 일주일에 2,3번씩은 남자 사진과 프로필이 올라온다고 했다. 벚꽃이 피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봄, 겨울이 시즌이라고 했다.


내 친구는 내가 남자친구가 생길 때까지 그 단톡방에 올라오는 남자들 프로필을 보고 소개팅을 할 건지 물어봤다. 내가 원하는 기준을 말해주면 친구는 그걸 메모장에 적어 놨다가 내 조건에 맞는 사람이 소개팅을 하고 싶다고 모집이 뜨면 나에게 전달해 줬다.


그 친구는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대단했다. 내가 결혼 전까지 했었던 소개팅의 절반 정도는 이 친구가 주선해 줬던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도 의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시간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소개팅 주선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그 친구가 톡을 보내오는 식이었다.


친구: <나이 33, 연세대 졸업, 거주지 수원, 삼성, 키 180(비율 때문에 더 작아 보일 수도 있다 함), 자가보유, 자차 없음, 현재 서울에서 부모님과 거주 중이지만 곧 자가로 독립할 예정이라 함. 키 큰 여자를 좋아함, 여행 좋아함, 맛집 좋아함>


나: <스펙 좋네. 근데 나이가 걸리네. 난 패스.>


친구: <남자 친구 만들고 싶다며, 나가봐 그냥. 조건 좋아서 이 사람 빨리 오케이 안 하면 누가 채갈 듯. 일단 이 사람 소개팅 받는다고 한다? >


나: <아 구래. 나가보지 뭐>


친구: < 연락처 보냈으니까 기다리면 남자한테 연락 올 거임>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으면 어느새 나의 주말 일정은 소개팅으로 꽉 차게 된다. 소개팅은 희한하게 한 번에 몰려 들어올 때가 많았다. 소개팅이 겹쳐서 들어오는 때는 주말에 소개팅 두 번을 하기도 한다.  내 주말은 소중하니까 둘 다 별로일 경우를 대비해 하루에 몰아서 만나는 게 좋다.


점심에 한 개, 저녁에 한 개.


점심에 만난 사람이 맘에 들면 저녁 소개팅을 끝내고 다시 점심에 만났던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한 번 보고 헤어진 사람들도 많고, 두세 번 더 데이트를 했던 사람들도 있다. 다 그냥 제 각각의 이유로 나랑은 잘 안 맞았다.


20번이 넘는 소개팅을 한 이후에도 나는 연애를 하기 위해 피곤해 죽겠지만 주말에도 화장을 하고 배에 힘을 줘야 하는 옷을 입고 소개팅을 나갔다. 진짜 피곤했다.

물론 나도 처음 소개팅을 나갈 때는 소개팅을 한다는 사실에 두근두근 했다. 오늘은 정말 나의 인연이 나올까?라는 기대로.


놉. 나의 인연은 없었다.


29살이 되니, 나는 친척들 사이에서 '다 괜찮아 보이는데 왜 연애를 하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은 애'가 되었다. 결혼도 슬슬 해야지~ 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이때부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별로 딱히 결혼 생각은 없었는데, 소개팅에 나가면 결혼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이랑 사귀고 결혼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대화를 하다 보면 현타가 와서 피곤했다.


50번째 소개팅을 하고 나니 이제는 나의 주말은 토요일 일요일 모두 매우 소중 하기 때문에 소개팅은 그냥 점심에 회사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애프터가 들어오면 퇴근하고 다시 만나서 소개팅 남과 저녁을 먹었다. 소개팅을 많이 하던 당시 정말 서울에 있는 맛집이란 맛집은 다 다녀서 그런지 결혼 이후 요즘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맛집들에 가지 않아도 전혀 아쉽지가 않다.  


아무튼 이렇게 소개팅을 하면서 나는 나 나름대로 남자친구는 물론 배우자에 대한 기준이 생겨 갔다. 친구는 나보고 그 정도면 너가 기준이 너무 높은 거라고 했다.

아니,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보내는 시간이 재미가 없는 걸 어떡하나. 소개팅도 재미가 없는데 사귀면 뭐 더 볼 것도 없는 거 아닌가?


친구들은 나에게 소개팅 남이 그냥 적당히 맘에 들면 사귀어 보고 그래야지 다 따지면 남자친구를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적당히 맘에 드는 사람을 사귀었는데, 진짜 너무 힘들었다. 진짜 재미없는 연애를 몇 번 하고 나니 더더욱 신중하게 연애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웃긴 건 소개팅을 하면 할수록 나중에는 오히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 편하다고 느꼈다.


매번 잘 되지 않는 소개팅을 반복하던 어느 여름, 나는 그냥 당분간은 혼자 지내는 게 제일 맘 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좋은 회사에서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남자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는 잠시 접어 두고 이직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직 성공.


새로운 지역으로 매일 왕복 3시간을 운전해서 출퇴근을 하다 보니 소개팅을 할 체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마스크를 쓰고 다시 열심히 소개팅을 했다. 내가 친구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친구가 나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물론 다 몇 번 만나서 데이트하다가 흐지부지 끝나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코로나 때문에 쓴 마스크를 후다닥 벗고 습기로 무너진 화장을 다시 고치고 식당에 들어가는 것도 이젠 피곤했다.


지쳤다.


ott의 등장과 혼술 유행으로 인해 집에서 혼자 놀아도 할게 많았고, 심심할 땐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재밌었다. 남자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소개팅이 들어와도 별 기대 없이 맛집 탐방하는 느낌으로 마실 다녀오듯 소개팅에 나갔다.


회사에 적응해 갈 때쯤, 어떤 남자가 자꾸 생각나기 시작했다.


나보다 연차가 많은 팀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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