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후 아저씨(1)

부산스러운 생존의 기술

by 김여진


일과 후 아저씨(1)


AI 기술이 이토록 생활 깊이 들어오기 한참 이전부터 우리는 수많은, 더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기계장치들에 일상을 적절히 외주 주며 살았다. 아득히 낡았지만 시간을 거슬러내리다 보면 언제가 꼭 한 번씩은 ‘최첨단’이었을 모터의 나지막한 툴툴 소리는 믿음직하다. 기계는 군말이 없다. 연료만 있다면 수명이 다 할 때까지 그저 기능하는 것 같다. 그것만이 유일한 소명이라는 듯.


산업혁명 이후부터 밀레니엄까지 든든히 받쳐 온 수많은 기계에게도 무덤이 있다면 아마 묘소 대부분은 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들의 마음속에 세워졌겠다. 더는 젊지 않지만 늙었다기엔 서운한 연령대의 아저씨만큼 엔진과 증기와 기름때의 낭만을 깊이 이해하는 부류는 드물다. 가끔 하는 청소만으로도 기름진 낡은 모터를 너끈히 돌린다는 면에서 기계와 아저씨는 너무 많이 닮았다. 그들 자신도 안다. 은연중 기계장치에 자신을 투영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아저씨들의 얼굴에는 미니카를 조립하던 아이, 오토바이를 튜닝하던 청년, 자가용에 꼭 여자 이름을 붙이고 애인만큼 애지중지하는 중년에 이르도록 나이를 넘어 생애를 관통하는 소년의 표정이 있다. 여성들의 향기롭고 복잡다단한 웅성임과 단번에 대조된다. 꼭 왜 남자들은 그러는지 모르겠다.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에 왜 그렇게들 흥분하느냔 말이다.


프랜차이즈 업장, 개인 점포. 무대시설 설치 보조, 행사 인솔. 그 외에도 다양한 장단기 알바를 위해 드나들던 온갖 숙박업소, 술집, 밥집, 바, 호프집…. 수많은 장소에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을 거쳐 생활비를 벌어먹고 지내던 날 유독 힘들고 가장 재미있게 만들었던 일터를 기억한다. 서울 중구, 구도심 대로변에 슬쩍 자리 잡은 레스토랑 겸 바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쭈그리고 앉아 줄담배 피우는 아저씨처럼 능글거리는 존재감이 있었다. 채용공고 아니었으면 그 앞을 몇 번 지나든 영영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장사가 썩 잘 되지도 안 되지도 않는 가게였다. 살짝 침침한 입구를 지나 안쪽의 조명이 일렁거렸다. 향, 미제 담배, 테킬라 냄새가 동시에 났고, 겁나 큰 미국식 수제버거, 파스타, 그리고 음식 가짓수의 세 배는 될 법한 양주, 칵테일, 와인 리스트가 단 한 장의 메뉴판에 모두 적혀 있었다. “재주껏 해석 가능한 놈만 알아서 주문하라”는 식의 메뉴판…. 사장님, 그럼 결국 제가 번거로워진다고요…. 게다가 취한 사람에겐 더더욱 어려우니 차라리 암호문이 나을 지경이었다.


매일 저녁마다 근방의 제약회사나 금융회사에서 케케묵은 전통적 회식 n 차를 달리러 들이닥친 넥타이부대 아저씨들이 ‘호프 한 잔’을 외치면, 근육 많고 문신 많은 사장님이 눈빛에 윽박을 담아 값비싼 칼스버그 생맥주를 강권했다. 저희 가게에 생맥은 오로지 그것뿐이라면서. 그런데 정말 그랬다. 바틀 당 최소 10만 원이 넘어가는 양주 가격을 확인한 다음엔 잔 당 1만 원도 안 하는 수입 생맥주 가격이 그렇게 착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바로 옆 치킨집에선 카스 생맥주가 4000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