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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로나 Jun 01. 2023

주기적으로 무지렁이 되기

(지난 회에 이어서)


- 내뱉지 못한 말: "이거 성추행이잖아, 이 새끼야"

나는 말했다. “저 초보인데요?” 그는 “아유, 괜찮아요.”라고 답하고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데, 초보라고 말했음에도 자꾸 어려운 패턴을 시도했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마다 겸연쩍게 웃었다. 스스로가 답답했고 상대에게 미안했다. 그런 나를 북돋고 싶었는지, 혹은 원래 나불대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는지(나는 후자일 거라고 이미 판단을 마치긴 했다) 자꾸 입을 놀려댔다. 비록 초보이지만 최선을 다해 집중해서 추고 싶은데 방해되니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그가 뱉은 “2개월 더 배우시면 정말 잘 추시겠는데요”라는 말이, 격려의 의도였을 수 있지만 내게는 평가처럼 들렸다.


그 뒤로도 그는 참 많은 말을 했다. “여기 자주 오세요?” “닉네임이 어떻게 되세요?” 같은 질문들. 후자의 질문을 던질 때는 내 허벅지를 눈으로 훑었다. 살사바의 옆 공간에서 진행된 수업에 참석했고, 그때 붙인 명찰이 아직 허벅지 쪽에 남아있어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직후 그가 던진 말에는 소름이 쫙 돋았다.


“000님? 혹시 탱고 추지 않으셨어요? 저 XX예요.”


맞춰지는 조각이 있었다. 그는 탱고 씬에서 블랙리스트에 등재된(줄여서 ‘블랙’이라고 그들을 일컫는다) 불쾌하기로 이름난 존재였다. 나 역시 그와 탱고바에서 마주친 적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닉네임을 듣자마자 부정적인 감정이 끓어오르는 걸 보니 좋은 경험은 아니지 싶었다. 탱고에서 새는 바가지, 살사에서도 샌다. 살사바에서도 그로 인한 불쾌를 다시 겪고 있었다.     


콸콸콸


그가 누군지 알게 된 순간 빨리 곡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드디어 노래가 끝났고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인사를 위해 살짝 숙인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주 봐요”라고 말했다. 그의 손은 목덜미까지 내려온 뒤 거둬졌다. 얼떨떨했다. 지금 무슨 일을 당한 거지?     


그 뒤로도 한 동안 멍했다.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본인이 경험의 우위가 있다고 개 목덜미 쓰다듬듯 하대하며 나를 만진 건가? 물론 굳이 해석을 보태지 않아도 촉감 자체만으로 충분히 징그러웠다. 그와 춤을 추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춤추고 얘기 나누기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고, 아직 살사씬의 ‘블랙’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지 못한 나였다.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 초보 탈출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가 누구를 거절할 주제가 되나’라는 체념마저 들었다.     


좋지 않은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구를 향해 걷는 나를 그가 또 붙잡았다. “잘 가요, 000님.”이라고 말하며 그가 웃었다.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나온 행동은 난처하게 웃으며 “네, 또 봬요”라고 답한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도 그 일이 종종 떠오른다. 그가 나를 만졌을 때 느낀 놀라움과 징그러움을 왜 제때 선명히 표현하지 못했을까? 심지어 ‘웃으며’ 인사까지 하다니, 그 자리에서 거칠게 손 쳐내고 욕 한 사발 퍼부어도 모자랄 새끼한테…. 평소의 나는 상대를 뜨끔하게 만들고 반성을 유도하는 행동을 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아무래도 나답지 못했다. 자책이 계속됐다.


- 주기적으로 초심자가 되어보는 일

언론사 입사준비 시절 기자 선배와 있었던 일과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 때 중견 다큐 감독과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20대의 나는 회사에 들어간 뒤의 삶을 경험해 본 적 없어 막연했고, 입사를 할 수 있을지조차 몰라 불안했다. 가고 싶은 길을 앞서가는 사람은 영웅처럼 보였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설령 함부로 평가하거나 섣불리 가능성을 재단하는 말이더라도. 그렇게 술자리에서 눈을 빛내며 그의 모든 얘기를 귀담은 나를 집으로 바래다준 남자 기자는 성추행을 저질렀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던 시절 겪은 일은 범죄까지는 아니다. 한 친구를 매개로 낯선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의 일이다. 자리에는 중년의 남성 다큐멘터리 감독도 있었는데, 친구는 그와 내가 공통분모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내 정보를 흘렸다. 그는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성찰하는 작품을 준비하며 사회적 사건과 친구의 사례를 촬영하며 랩도 배우고 있다고(래퍼인 건물주 아들이 세입자를 조롱하는 것을 보고 열 받아서 랩으로 갚아주고 싶었다) 설명하자 그는 대뜸 “별로인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대화에 열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별로인지, 만약 정말 별로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면접관이라도 된 양 질문만을 이어갔고, 내 답변에 대한 반응으로는 깎아내림만이 있었다.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오는 길,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단단히 털린 것만 같은, 더러운 기분. 살사바의 ‘블랙’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며 돌아오는 길의 기분 역시 그와 같았다. 


이제 와서 발견한 두 일의 공통점은, 경험의 우위를 가진 사람이 경험 부족한 상대를 휘두르며 마음의 허기를 채웠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 말을 귀담아듣는 ‘미숙한’ 존재를 눈앞에 두며 알량한 권력을 확인하고, 평가하는 위치를 점하며 우월감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그것을 ‘연애’ 또는 성적 착취로까지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젊은 날 그런 이들에게 너무 많이 당하고 살았다.     



30대 중반 이후 삶이 비약적으로 쾌적해진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덜 휘둘린 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주도 프로젝트를 벌이고 그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경험의 누적은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나의 것’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 덕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함을 갖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충분히 경험을 쌓은 영역에서만 통하는 것이었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배우며 겪은 부당한 일들은 권력형 범죄나 위계 폭력을 겪은 피해자를 탓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만들었다. 능숙하게 일을 해낼 수 있는 분야에서는 말빨 먹히고 존중 받는 존재일 수 있지만, 새로 뛰어들어 배우는 곳에서는 누구나 뜻대로 안 풀려 쭈그러지고 구박받는 무지렁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평소와 같은 사람이 아니게 만들며 제때 제대로 대처하는 일을 어렵게 한다는 것. 이것을 감각하고 잊지 않는다면 피해자 앞에서 “왜 그때 제대로 저항하지 않았어?” “너가 똑바로 행동했어야지”와 같은 2차 피해를 일으키는 말은 삼키게 되지 않을까?


주기적으로 초심자를 경험해보는 일이 이를 도울 것이다. 사람들에게 ‘상사-부하직원 역할 놀이’를 하게 하고 관찰한 심리학 연구를 접했다. 연구 결과는 상사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부하 역할을 맡은 사람들보다 상대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경향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즉 권력을 쥐게 되면 자기보다 약한 이의 생각은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기 쉽다는 것. 연구 결과의 시사점은 반면교사가 된 블랙의 가르침과도 닿아있다. 내가 선 위치, 내가 쌓은 경험, 내가 가진 권력을 의식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자칫 누군가에게 불쾌감과 모멸감을 주는 폭력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권력에 길들여진 느슨함에 긴장감을 주는 일? 주기적으로 무지렁이가 돼보는 경험이라 생각한다.  


내 경우 주기적으로 폭넓은 영역에서 초심자를 경험하다 보니 ‘무지렁이 되기’에도 조금씩 능숙해지는 것 같다. 블랙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차리고 잽싸게 대응하지는 못했지만, 초심자인 스스로만 탓하고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며 도움 받기로 한 것이다. 경험이 더 쌓여 ‘프로 초심자’가 되면 어수룩하고 서툴러 헛발질 하면서도 위축되지 않는 여유로움을 가지는 날도 올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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