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오빠 후기
언제 또 올릴지, 무엇에 대해서 올릴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시리즈, 교회오빠 감상문이다. 이 글은 자만과 게으름에 빠져있던 한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에게 진심으로 권하는 글이며, 또한 나의 신앙의 기록이기도 하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 완벽함은 세상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는 것을 묵상하다 알게되어 이리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이번 곡도 역시 사명이다. 하지만 해금으로 한 것을 첨부 한 이유는 해금의 소리가 나의 기도소리 같기 때문이다. 애절하고 처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은 모양새. 시편 61장 2절,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같은 마음으로, 살려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잘못 했어요, 하는 마음으로, 감사해요, 라는.
교회 오빠를 보며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 바로 완벽함에 대한 것이다. 나의 낮음, 부족함, 나태함 그 자체에 대한 생각.
한동안 생각하며 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며 고찰을 해보니, 완벽함의 추구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달란트를 갈고 닦았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음까지 하나님을 묵상하며 완벽함을 추구했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배로 불려가는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의 결과는 그가 전에 심은 기도와 신앙의 거둠이였다.
아, 나는 너무나도 게으른 사람이다. 심지도 아니하고 거둘 것을 바란다. 아, 나는 너무나도 자만하는 사람이다. 연습을 하지 않아도, 공부를 안해도 중간 이상은, 아니 상위권에 항상 있었으니까, 그 상황에 안주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쉬라고 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에, 괜찮다는 그들의 웃음에 현혹이 되어 나를 채찍질 하는 것을 그만 두었고, 되려 조금씩 그가 주신 달란트를 써 버렸다. 차라리 땅에 뭍어두는 것이 나았을걸, 이라는 생각도 무심하게 이제 나에게는 반달란트 조차 남지 않았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만큼의 달란트를 언제 다시 한달란트로 만들어 재기할까 라는 고민에 달란트를 뭍고 쓰기만 하니 작은 달란트는 더욱 더 작아질 뿐. 그만큼의 노력을, 더 노력을 해야하는데.
노력을 하지 않는 자의 말로는 다 비슷하다. 그 달란트가 빼앗겨 버리는 것. 그나마 남았다고 생각한 그 적은 것 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 지금의 내가 딱 그 꼴이다.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버렸다. 아주 성공적으로 완벽하게 게워내었다. 한때 당당하여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눈을 떠도 불안하고 열심히 해도 불안하고 최선을 다해도 실패하고 실수해 버린다.
그 누구도 목사의 기준과 신도의 기준이 같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목사는 목사이기에 더 높은 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이는 마치 전공자의 기준이 비 전공자의 기준보다 높은 것 과도 같은 이치이다. 한번 높은 곳에 올라갔던 사람은 그것이 기준이 되어버리니. 그래서 사람의 기준은 매일 매일 조금씩 높아져 간다. 인성에 대한 기준, 전문성에 대한 기준, 신앙에 대한 기준. 매일같이 기준이 갱신되지 않으면 기 믿음은 정체된 것이 되어버린다. 집사님의 믿음은 매일 매일 더해지는 고통과 적어지는 체력을 통해 매 순간 갱신되어 나아갔다. 이 정도 고통에도, 이 정도 외로움에도, 이 정도 두려움에도. 그렇게 높아지는 기준안에서 그의 믿음은 가치를 얻어갔고, 그의 고통 이상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는 그의 믿음을 증명해 내었다. 그런데, 그런데 생각해보면 말이다, 우리의 타이틀은, 그러니까 진짜 우리들, 기독교인들의 타이틀은, 제사장이다.
제사장에 대한 것들을 읽을 때 마다 참 대단하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그때의 시대적 배경으로는 제사장은 돈을 벌 필요가 없었고, 그렇기에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지만, 일하는 제사장이다. 그러니 목사라는 직책에게 바라는 그 기준이 사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하는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기준이 낮아져 버리면 어느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안주하게 된다. 물론 하나님이 안주하지 말라고 하신 건 아니지만 안주해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훨씬 적다.
사명. 그것 참 좋은 단어다. 사명감도, 참 좋은 단어다. 근데 그 좋은 단어가 그저 단어로만 남겨지게 되니 아무런 쓸모가 없다. 쓰레기, 그 자체이다. 부족함이라는 사소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가치함 그 이하의 것을 이루어내는, 행동없는 사명. 누군가를 끌어내리기만 하는, 그리고 나도 같이 내려가버리는, 구제불능의 경지를 뛰어넘는 쓰레기, 혼이 담긴 구라, 그 자체.
그는 노력했다. 하나님을 붙잡으려, 자신이 가진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에게 믿음은 자신의 믿음의 산물이기도 했다. 믿은 만큼, 그 이상으로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그는 노력하여 믿었다. 두려움을 한숨으로 내뱉은 그 순간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근데 나는?
내가 삶을 여러 번 포기할 뻔 했다는 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찌가 되었건 아직 살아있으니까, 살아남기로 작정했다는 것만이 남아있다. 죽기로 작정하고 살 때와 살아남기로 작정할 때의 마음은 달라야하지만 나는 여전히 죽길 소원하는 자 처럼 살아가는구나.
죽으면 죽으리이다 는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아름다운 것이다. 만일 여기에 내가 라는 전제가 붙어버리면 나의 목숨의 가치는, 이미 딱히 그리 높지도 않은 그 가치는, 더욱 더 낮아져 버린다. 포기를 위한 삶을 살다니, 이 얼마나 못나고 낮은 삶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다시 살기위한 삶을 살았다. 끝까지, 이 악물고, 하나님을, 주님을 끝까지 묵상하며, 그의, 그만의 완벽함을 위해서.
나는 무엇에 완벽함을 추구하는가. 관계에서, 상담에서, 결국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그 누구도 감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매달려 있다. 나는 이런 부분들이 기독교 공동체, 그러니까 교회에 아픈 부분이라 생각했고, 여전히 그리 생각한다. 하지만 늘 왜 나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만 이런걸 해야하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나만의 완벽함. 나는 완벽히, 사명을, 해내기를 원한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 더 알고, 하는만큼 이해하니까 더 하고, 배운 만큼 행하니까 더 배울 것이다. 무지가 축복이라는 핑계 따위는 대지 않을 것이다. 무지는, 적어도 나에게는, 축복이 아니니까. 나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 그 이상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없으니까.
창피했다. 오늘 연주는 내 인생 최악의 연주였다. 차라리 내가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을 때가 더 잘 켰을것이라 생각이 들 만큼. 그렇게 열심히 운지법을 외우고 방법을 외웠지만, 나의 등신같음은 이 노력을 순식간에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 이 연주는, 그러니까 단순하게 보자면, 완벽하지 못했다.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사실 내 실력은 내가 잘 안다. 내가 몇년을 하고 몇번의 연주를 해봤는데. 나는 달달 외울 정도가 되지 않으면 실수한다. 무대체질은 나의 연습량에서 나온다. 연습한 만큼 자신감이 생기니까. 연습한 만큼 소리가 달라지니까. 그 소리만큼 내가 즐길 수 있으니까.
내가 만족할 만큼의 연주를, 내가 원하는 만큼의 연주를 할 수 있을 때 까지, 시간과 짬을 내어 연습해야 겠다. 손이 안 풀리고 아픈건 사실이지만 그러면 풀어야지. 그래서 내가 저 앞에 있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지 않고 온전히 할 때 까지.
내가 만족할 만큼의 상담을, 내가 원하는 퀄리티의 상담을 할 수 있을 때 까지, 시간과 짬을 내어 공부 해야지. 머리가 돌머리고 굳었지만 굳었으면 풀어야지. 그래서 내가 나의 상황들에 얽매이지 않고 최상의, 완벽한 상담을 해줄 때 까지.
내 안에서 나만의 완벽한 예수님의 면모가 보일 때 까지. 내가 완벽하게 죽어 질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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