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오빠 후기
앞으로 몇 개를 더 쓰게 될지, 무엇에 대하여 쓰게 될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시리즈, 교회 오빠 감상문을 시작한다. 내가 굳이 이것을 올리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기에, 자만과 게으름에 빠져있던 한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에게 진심으로 권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글은, 나의 다른 모든 간증들과 동일하게, 나의 기록이다. 이것을 보고 느낀 것들을 소중히 간직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나의 신앙을 붙잡아 줄 수 있는 굳건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노래는 사명을 가야금과 해금으로 커버한 것을 첨부 하였다. 사명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까지나 잘 보여주는 것이 없는 것 같아서. 사명이란 인생 그 자체를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사명이다.
교회오빠를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의 사명에 대한 것이다. 교회오빠의 아내분은 남편에게 "끝까지 남는 것, 그것이 오빠의 사명"이라고 그가 힘들 때, 좌절할 때, 포기하고 싶을 때 이야기 해주었다. 사명, 그 사명이 무엇이길래, 얼마나 소중한 것이길래 그 교회오빠는 그것을 위해 살아갔을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고통과 절망이 반복되어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궁극적으로는 나의 부족한 점은 무엇일까, 하는 묵상을 하게 도와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사명이라는 것을 먼 훗날 언젠가 내가 하게 될 무언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이 길을, 심리학도와 상담사로의 길을 걸어가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될 그 무언가. 내가 지금은 깨닫지 못하나 나중에는 온전히 이해하게 될 그 무언가. 그러나 이관희 집사님의 삶은 삶 자체의 사명, 그리고 한가지가 아닌 사명을 설명해 준다.
기독교인에게는 내가 예수라는 사람을 나의 주로,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 구원자로 마음과 입술로 고백할 때에 구원과 함께 주어지는 기본적인 사명이 존재한다. 바로 마태복음 28장 18절과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다. 그렇다. 기독교인의 기본 사명은 간단히 이야기 해서 전도,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것이 고난과 역경이던, 행복이던 간에, 항상 나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듣는 것이 아닌 보고 증거하는 것을 겪을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렇게 기본적인 사명이 있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이행되어지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달란트는 무엇이고 그것을 어찌 사용하는가 에서 두번째, 삶을 사용하는 사명이 시작된다.
집사님은 공대생은 항상 수익은 계산하게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따르면서 얻은 고난, 잃은 것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 받게 된 그 모든 것을 저울에 놓았을 때, 그 고난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그는 어쩌면 공대생으로써 누군가를 섬기고 싶어했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의 "공대생적 마인드", 그 자체를 자신을 증명하는 것에 쓰시기로 하셨고, 그 공대생적 마인드 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신 그는 담담히, 주를 따르는 것이 더 이득이기에 당연하게, 또 묵묵하게 하나님을 따른다.
사람은 하나님을 나의 틀에 넣기를 좋아한다. 나는 이런걸 잘하니까 하나님을 이것으로, 이렇게 섬길거야, 라고. 그러나 그 재능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니 이 재능을, 이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지, 해야 하는지 역시 하나님 밖에는 모르시지 않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나는, 내 쉬운 것만 하고 싶어한다. 쉬운 것은 "나" 에게도 영광이 되기에, 또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어 자만 할 수 있기에, 그리고 덜 힘들기에. 만일 하나님이, 나의 주 께서, 나는 그거 별론데, 그거 그렇게 하는거 아닌데 라고 하신다면, 나는 과연 나의 고집을 꺾고 순종 할 수 있을까? 아니, 아직은 못한다. 이미 몇 번 실패했었다. 내 입은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나도 사랑하오,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라고 찬양을 부르지만, 연약하디 연약한 나의 몸뚱아리는, 약아빠진 나의 머리는, 볼품없는 신앙심은 십자가 뒤만 쳐다보오, 나도 해볼까 하오, 바다 끝은 좀 그렇소, 하고 앉아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하기는 커녕 세상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겠소, 홀로 가신 그 길 홀로 가시오, 험한 산을 내가 왜 가오, 이 큰 나는 못가오 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 내어가는 그 모든 과정이 사명이라니. 내가 사는 것, 그 자체에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니. 이 얼마나 무섭고, 섬뜩하며, 두렵고, 온전하며 냉철하게 기독교인의 삶을 표현하는 말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렇다고 해서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그 하나 만으로 만족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가, 이 내가 주인 삼은 자의 말 하나는 따르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내 스승이요 내 주인이신 분의 말씀조차 따르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내가 어찌 그분을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최소한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온전히 거짓 이여서는 안되지 않는가.
삶이 사명이라는 말은 내가 삶에서 행하는 모든 것에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달란트 하나도 버리지 않고, 한 달란트 주셨으니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 주셨으니 네 달란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언젠가 그 노력 자체가 삶이 되어 결실을 맺고 결국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 그것이 그 한 작은 달란트의 목적이요 사명이다. 그러니 나의 크고 작은 달란트 하나 하나마다 각각의 목적과 쓰임새가 있으니 그것이 사용되어져야 할 그날,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사용되어져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사명이 되는게다.
라고 사명을 재조명 해보았다. 삶이 사명, 삶이 사명이라는 말을 되네었다. 아, 이렇게는 살면 안된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드니 쓰고 있던 선글라스 사이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졌다. 나의 사명에는 미움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려워도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인이라면 뭐라도 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다르지 않으나 나를, 나에게 거하시는 예수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도 삶을 통해 예수를, 그의 가치를, 이 신앙을 지켜내고 갈고 닦는 것의 값어치를 지켜내어 증명해 보이련다. 그리고,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묵상하고, 생각하련다. 언젠가 더 이상 이 걸작에, 예수의 목숨을 갈아 넣은 이 명작에 더 이상 곱씹을 만한 것이 없을 그날까지.
J+
P.S. 한국에서의 재 개봉은 3월 12일 이다. 돈을 내고 볼 가치, 아니 돈을 내지 않고 보는 것이 죄 라고 느껴질 만큼의 변화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이 글을 읽게 하는 자가 하나님이라고 생각 된다면, 교회오빠, The Job Who Is Near Us를 꼭, 꼭 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