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주겠다 약속했다.
스물 하나.
몸만큼 큰 캐리어 두 개에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도 감히 몰랐을 용감함을 꾸역 담아내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를, 혹은 영영 도착하지 않았을지 모를 러시아 항공의 낡은 비행기. 어린 몸을 실어 낮과 밤의 난기류를 가로질렀다. 8000km 밖의 세상에 도착했을 때엔 해도 달도 없었다. 내겐 집도 겁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호스텔에 몸을 누였다.
스물 하나. 그 아이는 여전히 그리고 어엿이 서른의 어른으로 베를린 이곳에 생존해 있다.
벽으로 보이던 사방. 팡팡 내리던 눈과 연못도 목이 마르던 여름들.
9년이란 무엇일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 모퉁이를 돌아 반드시 올 것만 같은 무언가가 누군가가 오래도록 보고싶었다.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해 밤마다 잠을 잃을 때엔 무작정 편지를 썼다.
내 죽은 날들에 대한 애도의 편지이기도 했고, 어깨를 스쳤던 이들에 대한 질문의 편지이기도 했으며,
마음을 나눴던 이들에 대한 사랑의 편지이기도 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전해지지 못한 채로 일기장 안에 갇혔다. 언젠가 꺼내주겠다 약속했다.
다행히도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발신자로 살고있으며
이제는 누구에게 가닿을지 모를 익명의 편지를 부칠 준비가 되었음을.
그 모든 편지가 어떻게든 반드시 살아남아 이제는 그 순간 그 곳 그 손에 꽉 쥐어지기를.
베를린이라는 이국의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우연처럼 함께 나눠가진 모국어로 전해지는 이 편지들이
어디로든, 운이 좋으면 꼭 읽혔어야 할 이들에게 수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