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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an 16. 2019

가다가다 이제 살러 가는 이야기

우리는 어쩌다 제주도민이 되었나

"이력서 넣어볼까?


여름휴가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남편은 제주에 있는 회사에 이력서를 넣어볼까 물었다. 슬리퍼 모양대로, 반바지 모양대로 몸에 새겨온 제주산 문신이 아직도 이글이글한데 말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가장 무서운 무념 정선생은 "오 좋다 좋다! 넣어봐!"하고 세상 경쾌하게 외치고 말았다. (사랑의 총알까지 쏘았는지 모를 일...) 그렇게 일은 벌어졌다.  


3 년간의 전업 육아에서 벗어나 시간제지만 일이라는 것을 시작했을 때였다. 집에서도 업무 전화가 난무했고, 처음 해보는 일과 육아, 그 환장의 컬래버레이션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제주도 회사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친구들과 제주도 얘기를 하다가 "참, 남편이 ###에 이력서 넣었대. 깔깔!" 하고 웃어넘겼을 뿐. 


며칠 또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자니 면접 보라고 연락이 왔단다. 뜨허! "진짜 되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이 사람들아.) 남편과 나는 약간의 설렘과 상당한 황당함으로 뒤엉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카이프를 통한 면접, 증빙서류 제출, 입사날짜 확정... 정신 차려보니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할 제주 이주민이 되게 생겼다. 그랬다. 다니고 있는 직장에 사표 냈으니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일이었다. 



제주로 이사오던 날, 시원한 바람과 풍경은 싱숭생숭한 생각들을 잊기에 충분했다. 



"가다가다 이제 살러 가냐?"


제주에 가게 되었다고 어렵사리 꺼낸 말에 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가다가다 이제 살러 가냐?" 

남편과 연애하며 매년, 결혼하고도 만 세 살의 아이와 세 번의 제주도를 갔으니 엄마가 그리 말할 법도 했다. 

제주 살이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은 지난여름 묵었던 제주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과의 대화 이후로 뭉근하게 익고 있었던 것 같다. 마당에는 스노클링 장비가 널어져 있고, 걸어서 5분 거리에는 아름다운 세화 바다가 펼쳐졌다. 뜨거운 해 밑에서 우리는 내내 수영을 하고, 조개껍질을 주웠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육지에서 자동차 연구원으로 일하셨다고 했다. 모든 생활을 접고 내려와서 밭일, 막일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내다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차리게 되었다고... 젊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생각보다 일거리는 많다고 했다. 아, 용기로구나! 아름다운 청년의 용기에 대해 들으며 차를 마셨다. 가지고 있는 용기라곤 밀폐 용기밖에 없는 나와는 먼 얘기였지만 동네 초등학교 이야기는 들으며 연신 좋겠다 좋겠다를 외쳤다. 작은 학교에서 모두가 서로의 이름을 아는 것, 1인 1 악기 교육 지원을 하는 것, 학교 행사가 동네 축제가 되는 것. 적어놓으니 그게 뭐, 싶지만 사장님의 조곤조곤한 동네 이야기는 마음속 뭔가를 몽글몽글 피어오르게 했던 것 같다. 



정신 차려보니 제주행 비행기 안 



"제주 이사비 다 합치면 우리 셋 유럽 여행도 갈 수 있겠다."


많은 일이 있었다. 

입사가 결정되고 남편은 주말 당일치기로 제주에 집을 보러 다녔고, 거의 다 성사된 구두 계약이 물거품 되었다는 연락을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받기도 했다. 다행히 원하던 동네와 원하던 아파트를 원하던 전세(제주는 1년 단위로 계약하는 '연세'가 많다)로 계약하게 되었지만 이번엔 또 살고 있던 집이 나가질 않아 속을 까맣게 태웠다. 여차저차 모든 것이 정리되고, 십 년은 더 늙은 얼굴로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삿짐도 배편으로 보내 놓고 홀가분히. 김포공항 간판의 커다란 글씨들을 보며, 창 밖으로 손 흔드는 직원들을 보며 복잡한 상념에 접어들 찰나, 남편이 속삭인다. "제주 이사비 다 합치면 우리 셋 유럽여행도 갈 수 있겠다."... 아. 나는야 유럽 못 가본, 유럽 가보는 게 소원인 여자. 뜬금없이 선택과 기회비용 사이에서 아싸 호랑나비 춤을 추며 휘청이게 만든 너란 남편 아오...! 쨌든 간다, 제주로. 특수하다면 특수한 분야에서 일해온 남편이 새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나는 주말 독박 육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 아이는 자연을 더 누빌 수 있는 기회. 지나 봐야 알겠지만 오늘로서는 우리와 잘 맞는 기회와 때를 용기 내어 잡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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