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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입시, 도저히 안 뽑을 수 없도록 멘탈로 무장하자

수험생 인생에서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경쟁만능주의와 정량평가의 함정


- 엘 우즈: 제 이름은 엘 우즈고 하버드 입학을 위한 비디오 에세이를 시작합니다. 왜 제가 엄청난 변호사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할게요. 저는 여학생 클럽 대표로서 기숙사 화장싷 휴지의 품질이나 브랜드처럼 매우 중요한 이슈를 주도할 수 있어요. 그리고 연애 드라마에 관해서라면 세부 사항을 모조리 기억할 수 있죠. 저는 일상 생활에서도 법률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편합니다. "(캣콜링에 대해) 이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제게 한 표를 주셔야 할 이유입니다.

- 심사위원들: 패션 전공이라고요? 음, 우리 학교에 한 번도 없었던 전공이군요. 우리는 항상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과외 활동 목록은 인상적이에요. 리키 마틴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고, 음악에 관심이 많아 보여요. 그리고 여학생 클럽의 자선행사를 위해 인조 모피 팬티를 디자인했다는군요. 동물들의 친구이자 박애주의자이기도 하다니. 그래요 엘 우즈, 하버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화 <금발이 너무해>의 비디오 에세이 장면


서울대 로스쿨은 서류의 평가기준으로 '수월성'과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학점이 4.5점 만점에 몇 점인지, 텝스는 몇 점인지, 법학적성시험에서 몇 문제를 맞혔는지로 구성되는 정량평가에 비하면 수월성과 다양성으로 이뤄지는 정성평가의 구체적인 의미는 사실 모호하다. 위 영화에서 교수들은 다양성 때문에 엘 우즈를 선발했다. 실제로 일부 미국 대학은 지원 절차에서 영상을 제출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한다. 핑크색 비키니를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dumb blonde'(금발은 어리석다는 미국의 편견)에 대항하는 영상은 강렬한 메시지를 준다. 세상은 그녀를 외모로 판단하고, 캣콜링(거리에서 휘파람을 부는 일종의 성희롱)을 하지만, 엘 우즈는 위축되거나 당황하지 않고 "I object"라고 응수한다. 이런 개성 있는 지원자를 뽑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요새 유행하는 KPOP 가사를 보면 인상적인 것들이 많다. "My favorite things, 그런 것들에 좀 점수를 매기지 마, 난 생겨먹은대로 사는 애야, 뭘 더 바래?"라는 아이브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최근 아이돌그룹이 강조하는 개성과 자긍심은 실존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상업성이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위험성도 있지만, 일단 넘어가자) 스테이씨는 이런 노래도 불렀다. "우린 다 이번 생은 처음이잖아, 정답은 없어 one hunnit, 그런 기대감 내려놔, 실망도 크니까" 로스쿨 입시에서도 그렇다. 나는 운이 좋아서 이 학교를 졸업했지만, 그게 인생의 정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평가자의 취향이나 가치관에 더 부합했을 뿐이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인생의 정답은 앞으로 각자가 만들어가면 된다. 그러니까 모든 인생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정해진 답이 없는 이상, 점수를 매길 수도 없다. 심사결과는 공정한 채점에 따른 점수라기보다는 (엘 우즈의 말대로) 오디션에서의 인기투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주인공 엘 우즈는 입학 후 하버드 로스쿨 내 권력자의 성범죄를 고발하고, 헤어스타일에 대한 집요한 관심 덕분에 법정에서는 핵심 증언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양성은 힘이 세다. 미국의 일류 대학에서 괜히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입시의 단순성, 공정성만을 생각하면 다양성을 배제하고 정량평가만 하거나, 수월성만 고려하는 것이 간편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험을 복잡하고 어렵게 설계하더라도 표준화된 시험장에서 정해진 시간에 OMR카드를 작성하게 하는 것으로는 엘 우즈같이 잠재력 있는 인재를 뽑기 어렵다. 선발제도는 이전의 교육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로스쿨과 대학의 선발기준이 정량평가 위주라면 학부와 고등학교 역시 그러한 기준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엘 우즈가 여학생 클럽 대표로서 팬티를 디자인해서 자선행사를 성공시키고 휴지 브랜드를 결정하려고 기숙사 총회를 성사시킬 수 있었던 건, 미국 로스쿨에서 그러한 경험을 중요한 역량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한국식 정량평가 사회였다면 엘 우즈는 독서실에 틀어박혀 객관식 문제만 풀다가 자기의 넘치는 개성과 자신감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입시업무는 편해졌다. 예전에는 서류심사를 맡은 교수들끼리 자기소개서와 성적표의 이면을 읽어내려 고심을 거듭하며 밤이 깊도록 의견을 나누곤 했지만, 이제는 정량점수로 큰 줄기가 가려지고 자기소개서에는 별 내용이 없으니 그럴 필요가 적어졌다. 거짓 자기소개서에 속을 위험도 적어졌다. 입시의 예측가능성도 높아졌고 입시 불공정에 대한 비판도 수그러졌다. 우려했던 부작용은? 장학금 신청자가 줄어드는 걸 보니 유복한 학생들이 늘어나는 것 같지만 블라인드 선발이니 잘 모른다. 특목고와 8학군 소재 고교 졸업생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이제 출신고교는 못 밝히게 하니 잘 모른다. 잘 모르니 마음도 편하다.
하지만 지난주 입시설명회에 몰려든 학생들을 보니 억누르던 의문이 다시 비집고 올라온다. 서류심사를 맡은 교수들이 자기소개서를 돌려 읽으며 밤늦도록 토론하고 고민하던 그 열정은 불공정한 것이었을까? 정량 위주로 줄 세우는 것만이 국민들이 믿어주는 공정일까? 오히려 그것이 구조화된 불공정을 고착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잘하고 있는 것일까?
-천경훈, <그 말을 국민들이 믿겠습니까?>, 법률신문 칼럼 중.


내가 천경훈 교수님을 자주 인용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이런 주제에 대해 칼럼이나 기고문으로 본인의 견해를 드러내는 교수님은 흔치 않은데, 천 교수님의 글에서는 항상 독창적이고 솔직한 메시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인품이나 수업, 강의자료도 훌륭해서 인기가 많으니까 후배들은 천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다면 꼭 잡기를 바란다. 아무튼 나는 천 교수님의 열정을 믿는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원로 가수나 작곡가들이 심사를 맡는 것은 그들의 경험과 연륜, 안목을 믿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법조계에서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어떤 모습과 개성을 가진 학생이 훌륭한 법조인이 될 잠재력을 가지는지 평가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기준을 정량평가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정량평가로 표준화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트로트 가수를 뽑는데 음량, 음정, 박자를 측정해서 임영웅 같은 스타를 발굴해낼 수 있을까? 애초에 획일적인 정량평가가 실질적으로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음에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졸업학년 때 개인적인 사유로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 내 턱걸이 생존본능이 발동했다. 변호사시험도 그렇고, 로스쿨 입시도 그렇고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저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편이다. 애초에 사람의 진가를 보여줄 수 없는 시험들에 너무 몰입하게 되면 '주화입마'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절박하게 시험 준비에 진심인 친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고, 그게 시험이나 경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로스쿨 입시를 앞두고 예년의 통계를 보면 내 학점에서는 이정도 리트 성적이 있어야 서울대 커트라인에 맞출 수 있겠구나 라는 계산이 나온다. 법학적성시험 문제를 풀어보니 어느정도 시간을 투입하면 커트라인까지 겨우 맞출수는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커트라인 점수를 받았다는건 그 학교나 집단에서 꼴찌로 들어갔다는 얘기다. 1등만 하던 학생 입장에서는 부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보면 커트라인에 맞춘 학생이 제일 지혜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적성시험을 공부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시간의 압박과 공부해야 할 내용과 배경지식으로 볼 때 도저히 끝이 없는 시험이다. 내가 수백 시간을 쏟아 부으면 분명 그에 따른 성적 향상이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한계효용이 너무나 미미하고 사소한 운으로 결정되는 비중이 너무 커서 내 인생을 소모하는 기회비용과 비교하면 결코 좋은 투자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나는 커트라인에 비슷한 점수를 받고 합격했다. "수험생 인생에서 공부가 제일이고 다른 모든 건 버려야해!" 라고 말하는 강사들도 있지만, 수험에 모든 걸 올인할 수 없는 환경이거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으며, 우리는 최소 노력으로 통과의례를 무사히 넘어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시험점수로 나오지 않는 여러 가치들을 동시에 추구하면서도 시험에 붙을 수 있다. 오히려 지속성과 동기부여 차원에서 자기의 중심과 신념, 가치를 챙기는 것은 멘탈적으로도 중요하다.


로스쿨 입시를 경험한 사람은 알겠지만, M 학원에서 표본을 수집하는 사이트가 있다. 로스쿨 지원자 대부분이 자기 성적을 입력해서, 원서 제출 전부터 자기가 정량지표로 대략 몇등인지 알 수 있다. 나도 대학 졸업반 때 성적을 입력해보고 세상에 이렇게 성적 좋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내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숫자와 등수로 표시되는 것 같아 잠깐은 슬펐다. 나는 농어촌 중고등학교 출신으로서 특별전형에 지원했는데, 일반전형 자교 기준으로는 99등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서 자교란, 많은 로스쿨들이 같은 학부 졸업생을 우대하기 때문에 자교는 타교생보다 커트라인이 좀 더 낮다는 식의 추론에 따라 로스쿨 입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개념이다.(특별전형은 11명을 뽑는데 7등 정도였던걸로 기억한다.) 결국 나는 특별전형이 없이 순수한 정량평가만 기준으로 했다면 불합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점수였다.


하지만 그깟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기소개서에 내 열정과 잠재력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학교, 못 가면 무슨 상관인가.(조영래, 이태영, 김선수 변호사의 후배가 되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내 주체적인 삶에서 하나의 단계로 서울대 로스쿨에 가고 싶었지만, 안 받아줘도 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학교에서 인재를 놓쳐 큰 손해를 보는 거다. 그런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서울대 로스쿨에서 매년 100명의 서울대 학부생을 뽑는 현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블라인드는 거짓말이고 서울대생에 할당을 줘서 자교 우대를 한다는 견해도 있고, 반대로 서울대생을 더 많이 뽑고 싶은데 법의 제한 때문에 못하는 거니까 타교 우대를 하는거라는 견해도 있다. 블라인드는 거짓이 아니고 그냥 정성평가를 했을 뿐인데 대체로 서울대생의 활동내역과 스펙이 좋아서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설도 있다. 정답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내 자기소개서와 활동내역에 자신이 있었고, 정성평가에서 많은 득표와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 거라고 꽤 확신하겨 있었다.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는지는 다음 글에서 더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초식동물인 소는 원래 근내 지방(마블링)이 생기지 않는다. 소의 지방은 근육 ‘사이’에 낄 뿐이다. 그런데 소가 풀이 아니라 ‘옥수수 사료’를 먹기 시작하면서 지방이 팽창하여 근육 사이를 파고든다. 과거 미국은 남아도는 옥수수 사료를 처리하기 위해 소에게 먹였고, 곡물업자들로부터 막대한 로비를 받은 미국 농무부는 ‘마블링’ 등급제를 실시했다. 등급제 전에는 ‘기름 많은 소고기'였던 것이 등급제 후에는 ‘좋은 소고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풀 먹인 소’의 고기는 낮은 등급을 받았다. 이제 시장에서는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에 대한 수요가 절대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곡물 사료를 먹이고, 덩치를 키우기 위해 최대한 좁은 공간에 가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소가 아프다. 그 소고기를 먹은 사람도 당연히 아프다. 그럼에도 그 소는 ‘등급’이 높기에 좋은 소다.
게다가 ‘미국 소에 질 수 없다’는 한국인의 괴상한 의지는 미국에서 최고급이 ‘프라임’ 판정을 받은 소고기는 감히 넘보지도 못할 1+급을 만들더니, 심지어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를 1++급까지 탄생시킨다. (참고로 미국 사람들도 잘 안 먹는다는 ‘프라임’은 한국에서는 1, 2등급 사이다.) 더 많은 옥수수 사료를 먹이고 더 많은 항생제 주사를 맞은 소지만, ‘청정한우’ ‘명품한우’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높은 가격에 팔린다. 정육점에 가서 2등급이나 3등급 소를 찾으면 ‘우리 가게엔 그런 질 낮은 고기 없습니다!’라고 한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등급’으로 포장되면 속수무책이다. 마블링의 사례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영역에까지 자본이 들어갈 경우, 얼마나 많은 기이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소도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마블링’으로 평가할 이유는 없다. 한국의 대학도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평가기준을 선정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오찬호, <진격의 대학> 중.


내가 좋아하는 오찬호 작가는 한국의 대학 현실을 비판하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소고기 축산업계와 마블링에 대한 위 설명이 정확히 사실에 부합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대학 현실에 대한 설명으로는 예리한 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학생도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평가기준이 꼭 성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을 강조하면 할수록, 학생들의 삶은 왜곡되고 오히려 리더십과 자기주도성, 창의성은 황폐화될 위험성이 크다. 자본주의 세상은 끝없이 학생들에게 마블링을 채우라고 요구한다. 어쩌면 이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 중심을 가지고 대항하는 것이 앞으로의 세상에서 진정한 역량이 아닐까 싶다. "너처럼 살면 나중에 경쟁에서 질거야, 그런 믿음과 신념 따위는 갖다버려, 성적과 연봉이 모든 걸 결정한다고, 다 너를 생각해서 해주는 조언이야" 나도 이러한 속삭임과 걱정 섞인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에 대해 '웃기고 있네, 저리 꺼져.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계속 할거야. 니가 뭐라 하건 상관 없어. 내 취향과 개성을 키워서 당당하게 경쟁해 볼거야. 이기든 지든 그게 내 삶이고 난 그 과정을 사랑하거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미국의 Z세대 사이에는 대학 낙방 파티가 유행이라고 한다. 대학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은 걸 기념하는 것이다. 내 가치를 세상에 맡기고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그런 유쾌함이 정착되면 좋겠다. 마침 아이브의 가사가 떠올랐다. "난 잘 살아. 내 걱정은 낭비야.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 뭐 어때, 쓸데없는 생각 따위 Go away. 답답한 이 세상 앞엔 멋대로 할래." 역시 음악은 때로 힘을 준다. 나처럼 고민하는 후배가 있다면 Sting의 노래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세상>도 좋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로스쿨에 들어간 나는 그 문화에 잘 적응하지는 못했다. 나는 뉴욕에 사는 영국인과 같이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물론 이방인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d27gTrPPAyk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Confront your enemies, avoid them when you can
A gentleman will walk but never run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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