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 상상할수록 불리한 구조. 리트, 변호사시험, 수능 비판하기
법학적성시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 미셸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카멀라 해리스(현직 부통령 및 대선후보), 캐서린 설리반(헌법학자, 전 스탠포드 로스쿨 학장)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변호사시험에 한번 낙방한 이력이 있다는 것이다.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도 재수생 출신이다. 이순신 장군도 무과 시험에서 낙방한 적이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 좌절하지 말라? 실력이 없었던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역전할 수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더 도발적인 주장을 하려고 한다. 이 정도면 시험 문제가 이상한 거 아닌가? 어떤 시험은 도전적이고 유능한 사람을 낙방시키고 실력이 없으면서 문제만 잘 푸는 사람을 뽑는 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도대체 그 놈의 실력이란 무엇인가?
흔히 수험생은 시험을 탓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수험생이 아니면 시험 제도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수험생이야말로 제대로 된 시험이 뭔지, 왜 문제가 이상한지 이야기할 수 있다. 수험생이 시험문제를 지적하면 패자의 변명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시험 문제의 퀄리티는 반증불가능한 게 되어 버린다. 맞힌 사람은 맞혔으니 만족하고, 틀린 사람의 지적은 들을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수험생을 갓 벗어난 사람으로서 각종 시험제도에 대한 불평불만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써보려고 한다. 한편 시험의 한계를 알면 이를 역이용해서 요령을 쌓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시험을 훑어보면서, 어떤 독자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가성비를 챙기는 팁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시험은 법학적성시험(LEET), 변호사시험, 그리고 수능이다. 법학적성시험이 가장 생소할 테니 먼저 얘기해보자. 과목은 언어이해, 추리논증, 논술 과목으로 구성된다. 일종의 언어 기반의 IQ 테스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보통 귀납적인 문제와 연역적인 문제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삼단논법으로 이루어지는 논리 퀴즈들을 연역이라고 하고, 그 외에 확률적이거나 맥락적인 요소가 들어간 문제를 귀납 문제라고 한다. 연역 문제의 장점은 논리적 시비의 여지가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현실 세계의 소재들을 담아내기 어렵고 변호사에게 필요한 언어 능력을 폭넓게 평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초기 적성시험에는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논리, 수리 퍼즐형 문제들이 점점 비중이 줄어드는 경향이라고 한다.
결국 귀납적인 논증 문제가 핵심인데, 강화-약화나 추론 문제가 대표적이다. 변호사로서 다루는 법적 논증의 대부분이 귀납적인 요소를 포함하므로 시험에 출제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든 문제가 선택형, 객관식으로 O, X 판단을 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트 문제를 풀다 보면 여러가지 애매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어느쪽이 상식과 맥락, 의도에 부합하는 것인지, 얼마나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봐야하는 것인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나는 대부분의 리트 기출문제 풀이는 진리가 있다기 보다는 출제자의 의도를 맞히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도와 맥락은 당연하게도 사람마다 환경마다 다를 것이다. 선택형 문제로는 그 다양성을 반영하기가 어려우며 때로는 출제자의 편향과 취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스터디를 하다보면, 납득되지 않는 문제가 있더라도 수험생이니까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듣는다. 하지만 나는 상당수의 문제들이 출제 오류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로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렇게 일방적으로 판단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법조인 선발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가령 이런 주장을 생각해 보자. '전쟁 중 병역 기피 목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손상'한 민수라는 사람이 있다. A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인간은 자기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A의 입장에서는 민수를 처벌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해야 할까? 논증의 핵심은, 민수의 행위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지 여부이다. 그런데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는 단순한 언어추론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 개념이다. 아마도 존 스튜어트 밀의 '위해 원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원칙은 본래 소수자의 자유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온 개념이다.
위 사례는 2019년도 추리논증 2번 문제에 유사하게 출제되었는데, 출제자는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전쟁 중이라면 국가의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일정한 부담이 생기고, 국민들은 이를 분담해서 수행할 의무가 있으며, 자기 신체를 손상해서 열외가 되면 군대의 전투력이 약화되고 다른 병사의 부담분이 늘어나게 되므로, 이는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A의 입장에서도 민수는 처벌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처벌하는 정책의 타당성이 인정된다면 A의 입장은 약화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알고보니 민수가 병역을 기피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국의 독재자 히틀러가 외국을 지배하려고 일으킨 전쟁이었고 이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모든 전쟁은 각국의 입장에서 정의롭다고 전제하고, 그 국민들은 전쟁의 부담을 나눠가져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일까? 우리 헌법은 국방의 의무를 인정하지만(제39조 제1항) 동시에 헌법 제5조 제1항은, 명시적으로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고 있다. 설령 전쟁이 정당하다고 전제하더라도, 병역 기피하는 것이 반드시 동료 병사에게 불리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애초에 민수에게는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어서 전쟁에 나가면 자국의 전투력에 유해한 요소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병역법에는 정신질환자에 군면제를 주지 않아서 민수는 애국심으로 자기 신체를 손상하는 결정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도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가 되므로 A의 주장과는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
민수는 알고보니 훌륭한 예술가라서, 군대에 가는 것보다 음악과 미술로 군 장병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전투력에 더 기여하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군대 밖에서 생산한 돈을 기부해서 전투력을 상승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평화나 종교적인 신념으로 인해서 병역 기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병역 기피가 반드시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A의 주장이 반드시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병역법을 위반하면 그건 타인에게 피해를 주든 말든 규칙 위반이기 때문에 당연히 처벌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모든 처벌이 A의 기준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다른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타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타인이란 자국의 동료 군인들을 말하는 걸까? 군인 말고 다수의 민간인들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전쟁 상대국의 군인들, 민간인들도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병역을 수행해서 군대의 전투력이 올라가서 상대국의 민간인을 더 많이 죽일 수 있었다면, 이건 타인의 피해를 준 거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전쟁으로 인한 물가상승으로 고통받는 제3국의 인간들도 있다. 더 나아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더라도 태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잠재적인 후대 시민들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 중에서 어느 하나만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결정은 아무리 출제자라고 해도 손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은 문제가 되려면 그러한 가능성들이 가급적 상식적인 수준에서, 분산되지 않도록 충분한 배경지식과 맥락을 제공해줘야 한다. 하지만 상식이란 사람마다 다른 것이고, 객관식 선택형으로 정립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디까지가 상식인가? 누군가는 중학교, 고등학교 수준, 혹은 대학 졸업생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상식은 단순한 지식들의 목록이 아니고 특정한 관점과 윤리, 세계관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귀납적인 논증 문제를 어떻게든 객관식 선택형 형식으로 끼워맞추려는 구조라고 생각한다. 밀의 '위해 원칙'과 병역 기피 문제를 둘러싼 사고력을 묻고 싶으면, 그러한 관점에서 서술형 문제를 내거나 면접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법이 있다.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관심 있는 윤리적, 논쟁적 주제가 뭔지 묻고, 이를 탐구하기 위해 어떤 주도적인 학습을 했는지 실적을 평가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출제자의 관점이 일관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때에는 매우 논리적이고 냉철한 관점에서 극단적인 반례도 허용하지 않는 관점에 서고, 어떤 때에는 현실적, 확률적인 관점에서 설득력이 강화 또는 약화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가령 "시험 점수가 오르면 등수가 오른다" 라는 판단은 타당한 것일까?(22학년도 추리논증 18번) 당연히 1등 학생은 점수가 올라도 등수가 그대로니까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다. 격차가 많이 나는 꼴찌라면 점수가 올라도 등수가 그대로일 수 있다. 하지만 충분히 많은 지원자가 연속적으로 분포하는 일반적인 시험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점수가 오르면 등수가 오르는 게 상식적일 것이다. 여기서 출제자는 상식적인 판단이 아니라 논리적인 판단을 정답으로 처리했다. 전쟁중 병역기피 문제와 비교해보면 기준의 일관성 측면에서 의심스럽다.
조직폭력단의 일원으로 알려진 갑이 소년 K를 차에 태우고 갔는데 이후 K는 실종되었다. 갑이 K를 납치한 사실을 인정했다면, K는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하고 임박한 위해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납치와 실종이 반드시 위해의 위험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납치라는 말 자체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겠지만, 그 납치가 오히려 생명과 신체를 구하기 위한 가능성은 없는 걸까? 가령 K가 살인청부업자의 타깃으로 선정되어 살해당하기 직전에 갑이 이를 알아채고 K를 납치해서 가장 안전한 벙커에 보호하면서 극진한 대접을 해주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는가? 시험장에서 이런 상상력을 발휘하면 큰일난다. 출제자는 납치된 것은 곧 생명과 신체의 위해 위험이 생긴 것이므로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가 부존재한다는 논리로 출제했는데, 귀납적 논증에는 항상 이러한 흠이 존재할 수 있다.
수험생에게 팁을 준다면, 과도한 상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점수 따는게 유일한 목표라면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가야 한다. 나는 상상력이 창의력과 지성의 원천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대다수의 한국 시험에서 상상력은 독이 된다. "전쟁 중"이라는 키워드를 준 게 중요하다. "조직폭력단"의 일원이라는 게 중요하다. 진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출제자의 취향에 아부할 수 있도록 안테나를 세워라. 이제 출제한지 15년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출제자들은 어느정도 출제의 약속과 규칙을 정립한 것 같다. 그 규칙이 어떤지는 학원에서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 문제가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선발도구라는 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저명한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사회현상'에 대하여 원인 규명 혹은 다양하고 중층적인 관계 특성들을 조망하기 위해 지향하는 역량을 말한다. 가령 자살에 대해 종교적인 인간관계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뒤르켐이 질문하는 것은 매우 좋은 예시이다. 하지만 우리 객관식 시험에서 창의력, 상상력은 별로 유용하지 않은 것 같다. 반드시 출제자의 워딩에 주목하라. 출제자가 깔아준 판에서 벗어나지 마라. 출제자의 가치관과 정치적 의도에 완벽하게 순응하라. 이런 시험이 과연 좋은 시험일지 절대 의심하지 마라. 나는 객관식 시험이 정확하지 못한 평가라는 단점도 있지만, 가장 해로운 건 평가제도가 오히려 교육제도를 변질시켜서 지나치게 순응적이고 일방적인 교육으로 학생의 개성과 잠재력을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상력이 넘치던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자기의 개성과 상상력은 더 깎여나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위에서 법학적성시험에 대해 비판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기출문제는 학원의 사설 모의고사보다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풀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편이긴 하다. 하지만 시비의 여지가 적다고 해서 꼭 좋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단순히 점수 따는 게임처럼 접근하게 되고 수험생들은 근본적인 고민을 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100% 단답형인 수능 시험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존재한다.
오찬호 작가는 '진격의 대학'에서 상대평가, 객관식, OX 시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사형제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견해가 대립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교육과 평가 과정에서 어느 입장이든 학생에게 스스로 논거를 찾고 설득하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의 견해는 평가자의 견해와 일치할 필요가 없고 일치할 수도 없다. 비판적 사고력 시험은 그런 견해들의 쌍방향 의사소통 과정이 되어야지 일방적인 퀴즈와 채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왜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상대평가에서 여러 어려움을 야기한다. 그래서 ‘다음 나라들 중 실질적으로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는?’이라는 객관식 문제만 출제될 뿐이다. 평가가 이러하니 사형제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할 필요가 없다. -오찬호, <진격의 대학> 중.
학부생 때 모 교육재단의 지원으로 중국의 북경대, 칭화대, 푸단대 등의 똑똑한 친구들과 합숙하며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대입제도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눴는데, 중국 친구들이 먼저 충격을 받았다. 한국 수능에는 주관식 서술형이 아예 없다고? 나를 포함한 한국 학생들도 충격을 받았다. 중국의 그 많은 인구가 시험을 보는데 서술형으로 시험을 볼 수가 있다고? 실제로 중국 대입에서 서술형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고 한다. 나중에 찾아보니 일본은 한국처럼 선택형 중심이고, 서술형을 본격 도입하는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다만 대학별 고사에서 보조적으로 서술형이 활용된다고는 한다. 흔히 동아시아의 한중일을 묶어서 교육열이 높다고 말하는데, 세부적인 시험 형식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과거시험'은 암기량이 적지는 않았겠지만 진정한 서술형 시험이었다. 한국 문화에선 수능식 선택형 시험이 유일한 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비슷한 문화권과 역사를 가진다고 해서 어떤 제도가 필연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 대학 입시에서는 공산당과 정부의 입김과 취향이 채점에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술형 문제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서술형 문제가 잘 작동하려면, 획일적인 채점기준을 만들기보다는 다양한 관점과 창의적인 논증 방법이 개별적으로 검토되고 우수성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제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의 센터시험도 서술형 위주로 대규모 개편을 예고했지만 결국 현실적인 문제로 객관식 중심으로 회귀했다고 한다. 우리는 수능에 대해 논의할 때, 그나마 과거 학력고사보다는 낫지 않냐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통할 때는 지나도 한참 지났다고 생각한다. 역사와 학문을 주도하는 선진국들의 사례를 참고할 때 우리같은 시스템이 얼마나 더 먹힐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다음 글에서는, 수능 시험장에서의 내 개인적인 추억과 생생한 팁을 주제로 써보려고 한다.
서두에 이순신 장군의 사례를 언급했다. 워낙 아이코닉한 인물이라서 그런지, 그의 낙방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가지 설이 대립하는 것 같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고, 실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가설은 이런 것이다. 당시 무과에는 신체적인 무력을 평가하는 과목과 전략적인 지능을 평가하는 과목이 있었다. 당시 평가 비중으로는 무력을 평가하는 비중이 컸고, 이순신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지능 쪽 시험에서는 높은 성적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결국 통산 성적이 낮아서 낙방했다는 것이다. 실제 역사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인간 세상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경영학자 카츠(Katz)는 "계층별 역량 이론"을 만들었는데, 그에 따르면 조직의 하위계층에서는 Technical Skill, 중위계층에서는 Human Skill, 상위계층에서는 Conceptual Skill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승진하는 기준을 보면 밑에서 잘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게되고, 결국 잠재력을 가진 유능한 사람들은 초기 단계에서 떨어지고 하위층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조직의 상층부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2008년, 법학적성시험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의 김희정 저자는 아래와 같은 야심찬 초록으로 야심찬 논문을 작성한 바 있다.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지적에 동의하지만, 과연 객관식 선택형 시험인 리트가 비판적 사고, 더 나아가 창의적 사고력을 충분히 타당하게 평가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철학이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에 가장 도움이 되는 교과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법학전문대학원 진학 여부를 결정하 는데 학부 성적, 공인 영어시험 점수, 법학적성시험(LEET) 점수, 사회봉사 점수 등을 고려하지만, 법학적성시험이 결정적이다. 이 시험을 통해 법조 인 지망생에게서 측정하려고 하는 능력은 바로 비판적 사고 능력이다. 이 사고 능력은 다른 학과의 교과목보다도 철학과의 교과목에서 가장 잘 훈련할 수 있다. 이 글의 전반부에서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자에게 필요한 소양과 능력이 다름 아니라 비판적 사고의 소양과 능력이라는 점을 필자는 밝힐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비판적 사고를 교육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소개하고 철학과의 모든 교과들은 그 교육의 일환임을 보일 것이다. 또한 철학과의 과목들이 비판적인 사고 교육의 방식들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보일 것이다.
-김희정 "법학적성시험(LEET)과 철학 교과 내의 비판적 사고 교육" 철학사상 28 pp.73-94 (2008) 중.
한편 "LEET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한양대 민찬홍 교수는 2013년 논문에서 아래와 같은 비판적인 언급을 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래 논문 역시 선택형 시험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직시하지 않았다는 점에 아쉬움이 있지만, 최소한 초기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 시험이 되었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진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글에 계속)
(3) 추리논증이 추리와 논증 양 영역에서 관련된 인지활동 능력을 측정하는 문항을 안정적으로 균형있게 배치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점은 개선되어야 한다. 내용 영역에서 특정한 학문 영역의 텍스트가 지나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거나 거꾸로 오랜 기간 배제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나, 현재까지 심각한 편중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해력과 사고력의 다양한 측면들을 골고루 묻는 일은 시험의 취지가 살아나려면 인지활동 영역의 분포는 매회 합당한 정도의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점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이다. (4) 추리논증 시험은 논리적으로 다양한 성격, 다양한 구조를 가진 텍스트를 골고루 개발하는 데에서도 성공적인 것 같지 않다. 출제의 현실적인 여건들을 고려할 때에, 이것이 쉽지 않은 일임은 인정되지만, 논리적 사고력에서 중요한 부분이 제대로 물어지도록 어떤 식으로든 방안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이 시험은 제시문과 문 항의 분포에 있어서 불균형하고 자의적인 시험이라는 지적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민찬홍 "사고력 시험으로서의 법학적성시험" 논리연구 16.2 pp.273-293 (2013)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