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부장판사는 2013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사재판 관련 실무과목 강사로 수업을 하던 중 학생들에게 "여자 변호사는 부모가 권력자이거나, 남자보다 일을 두 배로 잘하거나,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취지의 성희롱성 발언을 해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KBS 뉴스, <“오OO 판사, n번방 재판 제외”…37만 명 동의받은 까닭은?>, 최유경 기자, 2020.3.29.
나는 보통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옹호하는 편이다. 오죽하면 학부생 때, 일베라는 사이트에 관한 토론에서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일방적인 사이트 폐쇄는 부당하다고 주장해서 신문에 실린 적도 있다. 다만 표현의 자유는, 어떤 표현을 하든지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부당한 표현에 대해 충분한 공격과 논쟁이 이루어져서 검증되어야 한다. 비판받지 않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는 차별과 혐오, 편견의 자유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 논란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권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법조계는 권위에 가장 취약한 영역인 것 같다. '법 도그마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법조인은 권위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권위와 권위의식은 구별되어야 한다. 입법자나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해야 하는 건 맞지만, 서울대나 선배기수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시험에서 수석을 했고 어떤 법원에서 판사로 몇년 있었는지는 논쟁에서 고려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특히나 권위 있는 사람이 인권침해적인 발언을 할 때 침묵하면 이는 법조계를 대표하는 관념이 될 위험이 있다.
내가 우리 로스쿨의 인권법학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학회 내 인권 약속문 제정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여러 술자리에서 여러 거슬리는 발언들을 들었다. '이런 얘기는 사회대에서는 못하는 얘기야'라고 희화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편하지만 그냥 넘어갔다. 로스쿨에 가면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학회 내부에서라도 약속문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당시 참고할 만한 몇가지 단체의 사례들이 있었다.
세미나 담당이었던 나는, 이런 저런 사례들을 리서치하고 법조계의 인권 실태를 확인하면서 참담한 심정에 빠졌다. 흔히 판사, 검사, 변호사를 법조삼륜이라고 하는데 각 영역에서 누가 더 못났는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반인권적 사례들이 만연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강원대 로스쿨에서 수업을 맡은 현직판사가 여자 변호사가 로펌에 가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더라, 라고 말했다가 교체된 사건이었다. 많은 신문과 뉴스에 보도되었지만 내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는 당사자도 억울한 점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개인을 고발하고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뉴스에 나온대로 발언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발언은 명백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 법조계가 성찰할 부분이 많다. 오 판사는 모 언론에서, 조카가 로펌에 취업하고 거기서 들은 얘기를 옮긴 것이었다고 해명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냥 이상한 판사 하나가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 실제로 로펌에서 그런 성차별이 만연하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위 사례뿐만 아니라 판사, 검사, 변호사의 인권침해적 발언은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어떤 판사는 법정에서 "여자가 왜 그렇게 말이 많냐"라고 했고, "늙으면 죽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법무부의 성범죄대책위에 따르면 상급 남성검사가 "넌 남자검사의 0.5(점오)야" "여자니까 너는 성폭력 사건이나 담당해" 등 성차별 인식을 담은 언어폭력이 있었다고 한다. "사기당한 놈이 미친 놈 아니냐", "강간당하는 게 싫었으면 얼굴에 욕이라도 해주지(A검사)", "나는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 건 싫어한다(B 판사)", "배때기에 살이 많이 쪘으니 빵에 가서 살을 빼야겠다(C검사) 등등.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률전문가들이 이런 성차별, 외모차별, 나이차별의 막말을 한다는 게 참 황당하다. 변호사들이 한 막말도 여기 적지는 않겠지만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나는 판사가 그렇게 말하는 걸 싫어한다고 B판사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최근에는, 어떤 검사 후보생이 공무집행방해와 폭행을 저질러서 기소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의 머리채를 잡고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너는 누구 라인이냐"라고 말했다는데, 하마터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정식으로 검사로 일했을 것이니 섬뜩한 느낌도 든다. 나는 그런 인권침해적인, 혹은 권위적인 발언들에 '개소리(bullshit)'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그리고 판사든 검사든 교수든,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과의 해리 프랭크퍼트 교수는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라는 희한한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한 적이 있다.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이가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개소리를 하고 다니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개소리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현혹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다고 꽤 자만하고 있다. … 그 결과 우리는 개소리란 도대체 무엇인지, 왜 그토록 개소리가 많은지, 또는 개소리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등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중략)
나는 개소리가 허세를 부릴 때는, 허세 부리기가 개소리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소리의 동기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보고 싶다. 어떤 사람이 허세 부리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은 그의 발언을 개소리의 사례로 만드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은 분명히, 종종 그 사람이 그런 발언을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개소리의 동기가 항상, 그리고 반드시 허세 부리기라고 전제해서는 안 된다.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그가 정의한 개소리는 내가 생각하는 개소리와는 상당히 다른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그의 독특한 방법론과 접근법은 유사하게 차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법조인들은 왜 개소리를 당연하게 여기는가? 술자리에서 동료들끼리 속삭이는 정도가 아니라, 수십명의 수강생들 앞에서 녹음되는 걸 알면서도 당당히 개소리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건가? 왜 우리들은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도 깊은 의미가 있을거라며 이를 정당화하고 현혹되는 것일까? 개소리라고 그냥 외면하지 말고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고 분석해야 제대로 비판할 수 있다는 점을 프랭크퍼트 교수에게 배울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법조인들이 그런 교육과 문화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세상에 그렇게 공부를 잘하고 세상의 모든 지식과 교육에 통달할 것 같은 엘리트 합격자들이 교육받지 못한 과목이 있다고? 그렇다. 말하기 전에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시험 과목을 새로 추가하면 되지 않나? 이런 인격 훈련은 객관식 법조윤리 시험 한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인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문제적인 표현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감옥에 넣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법조계의 지나친 획일성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다. 로스쿨 체제로 바뀐 뒤에도 다양성이 충분히 달성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일단 우리 학생들이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조사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단체에서 공동체 약속문을 만든 사례들이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희움에서는 <평등·존중·환대의 공동체를 위한 약속문>이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내부 규범을 정했는데, 독특하고 신기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성애 중심적인 연애, 가족, 결혼에 대한 발언에 유의합니다."
"상대방의 겉모습을 평가하는 발언에 유의합니다."
"식사준비와 설거지, 다과준비와 뒷정리는 꼭 여성이?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봅니다."
"누군가는 배제될 수밖에 없는 술자리나 담배타임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합니다."
앰네스티 유스 모임 약속문에는 "육식중심주의를 경계하고 개인의 가치관을 존중하기", "외적인 모습에 관한 평가와 발언 피하기"라는 조항이 있었다. 청년유니온의 약속문에서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어쩌면 규범의 조항들 자체보다도, 아래와 같이 열린 의사소통과 상호작용, 성찰과 개선하는 분위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불편한 것을 말하는 것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발언과 행동에 대한 싫다는 표현은 그 상대를 전면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방관자의 시선으로 ‘양 당사자’에만 해결을 맡길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누구나 경험을 통해 배웁니다. 문제제기를 받은 경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진정 있는 사과를 합니다. 우리는 문제제기를 받은 조합원의 고민 과정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해결을 돕습니다.
흔히 대화의 규범을 만들어 갈 때, 표현의 자유가 억압될 수 있다는 반론이 나온다.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품위 있는 대화와 표현의 자유는 때로 상충될 수 있더라도, 완전히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표현하되, 서로의 발언에 대해 자유롭게 지적하고 인정하고 수정하면서 개선될 수 있다. 특정 단어를 사용하면 즉시 강퇴하고 배제되는 식으로 강경한 대응만이 해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개소리를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특히 법조계 사람들은, 특히 높은 권위를 누려온 사람들은 그러한 대화를 연습할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모든 기성 법조인을 파렴치한으로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소리를 듣느라 고생했으니까 이제 명변론을 읽고 되새겨보자. 우리 법조계 역사에는 조영래라는 걸출한 인물과 글이 있었다. 그를 계승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는 후배 법조인들의 부족함과 잘못도 있다. 우리 후배 법조인들은 이런 선배들의 텍스트를 뽑아 읽고 배우며 인권감수성을 더 키워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그의 변론요지서를 읽어본다.
범죄수사의 주체이며 인권옹호 직무의 담당자인 검찰은 무엇을 하였는가-이것을 생각할 때에는 우리들 변호인들은 분노보다도 먼저 슬픔이 앞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런데 "폭언, 폭행은 있었으나 성모욕은 없었다"는 검찰 수사결과 발표는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울고등법원 재정신청 사건 재판부는 다른 독자적인 증거조사는 일절 시행하지 않은 채 오로지 검찰수사기록에만 의거하여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문귀동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중략)
문귀동의 범행사실 중에서도 가장 극악하고 추잡한 대목―특히 “손으로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어 음부에 비비는” 추행을 한 대목에 한해서는 이를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이 결정문은 설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지극히 세부적인 하나하나의 정황사실에 이르기까지 다 권양의 주장대로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이 마지막 대목만 은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인가―요컨대 이 대목만은 문귀동이 끝까지 부인을 하고 있고 당시의 주변상황으로 보아 문귀동이 “그토록 저열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추행을 한다는 것은 일반경험칙상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자가당착적인 궤변입니다. 우리는 묻노니, 그렇다면 명색이 형사라는 자가 조사받는 처녀를 불 꺼진 방에 가두어놓고 뒷수갑을 채우고 무릎을 꿇려놓고 웃옷을 다 벗겨 알몸으로 만들고 바지지퍼까지 내리고 젖가슴을 주무르고 ‘허리부분과 상체'를 어루만지는 것은 그다지 ‘저열한 일'이 아니고 그다지 ‘비정상적인 방법의 추행'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그런 정도의 추행은 '정상적인' 추행으로서 ‘일반경험칙 상' 수긍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처럼 정상적인 윤리감정을 갖춘 인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불법무도한 비정상적 추행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인정하는 터에 어떻게 거기서 불과 반발짝 더 나아간 것밖에 안 되는 추행만은 주변상황으로 보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인지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영래 등, 부천 성고문 사건의 변론요지서
나는 우리 인권법학회(이름이 학회지 사실 로스쿨에서의 동아리 정도 규모이다) 세미나에서, '병신'이라는 말을 '등신'으로 순화하자고 제안했다. 병에 걸린 몸이라는 한자어에서 유래한 이 욕설은, 인권위에서도 장애인 비하 표현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제는 장애인과 무관한 상황에서도 '병맛', '병먹금', '병크' 등으로 파생되어 쓰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보편적인 비속어로 정착된 이상 장애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하지만, 다른 욕설도 있는데 굳이 이 말을 써야 할까? 한편 '등신'이라는 말은 나무, 돌, 흙, 쇠 등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나는 장애인 비하적 의미가 없으니까 '등맛', '등먹금', '등크'라고 바꾸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어떤 학회원은, 결국 등신이라는 말도 인간을 정상의 범주와 비정상의 범주로 나누어서 무능한 사람을 비난하는 메시지를 가진 것으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모 언론의 인권보도준칙에 따르면, '등신' 역시 지적 장애인을 비하하는 단어로 규정되어있다고 한다. 역시 언어 규범을 정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비속어 사용을 일률적으로 제한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순화의 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의 논의가 완전한 결론과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같이 고민해보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이 글을 읽은 어떤 작가님이든지 '병맛'이라고 쓰려다가, '등맛'으로 고쳐쓰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무척 기쁠 것 같다.
Devolved Parliament(위임된 의회), 2009 oil-on-canvas painting by Banksy
거리의 예술가 '뱅크시'는 이 작품에서 영국 의회의 한 장면을 침팬지로 표현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우리 의회는, 법조계는, 사법부는 얼마나 사람들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을까? 우리 현실에서도 권위에 목마른 똑같은 침팬지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아귀다툼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학교와 회사, 동아리에서까지 각자의 권위와 지위에만 몰두하며, 소수자를 침입자로 인식해 밀어내고 순혈 집단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에 형성된 언어와 고정관념을 의심하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발언과 편견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집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뉴욕 주립대학교 중에는 이휘소 박사가 근무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명문대 스토니 브룩이 있다. 스토니 브룩의 학생들은 아래와 같은 서약문을 만들어 자발적인 선서를 장려하는 시스템이 있다. 이 문구의 내용은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개정되어 왔으며, 제도적인 구속력을 가진 것이 아닌데도 많은 학생들에게 좋은 호응을 받고 있다고 한다. 현재 공식 홈페이지에 서술된 Community Pledge (공동체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스토니 브룩의 학생들이 "Take The Pledge" 캠페인을 하고 있다.
우리는 Seawolf(스토니브룩의 마스코트)입니다. Seawolves로서 . . .
. . . 우리는 Stony Brook University 커뮤니티의 모든 구성원의 존엄성과 존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 . . 우리는 인종, 문화, 출신 국가, 종교, 연령, 능력, 성별, 성적 취향, 병역 지위 및 우리 각자를 독특하게 만드는 인간 다양성의 모든 차원의 모든 정체성과 교차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승인하고 유지합니다.
. . . 우리는 인종 차별에 반대하고 조직적 인종 차별을 조장, 허용 또는 기여하는 모든 언어, 행동 또는 정책을 위해 노력합니다. 반인종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비판적 사고, 능동적인 경청, 존중, 연민을 활용해서 상호작용하며, 변화에 개방적일 것입니다.
. . . 우리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과 우리 지역 사회에 공동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우리는 편향된 행동과 불평등을 조장하는 모든 언어, 행동 또는 정책에 문제제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차별이 우리의 차이를 평가절하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며, 차이는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강점입니다.
. . . 우리는 우리 커뮤니티의 다양성에 대해 배우고, 축하하고, 존중할 것이며, 존중을 유지하고, 포용을 촉진하고, 공손함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리더를 양성하고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세계적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글로벌 커뮤니티에 기여합니다.
Stony Brook University 커뮤니티의 구성원으로서 저는 평등, 공손함, 배려, 책임, 의무 및 존중을 장려하는 데 동의합니다. 나는 우리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근사하고 멋진 말들을 선서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 판사, 검사, 변호사들도 나름대로 거창하고 멋있는 선서문들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그러한 약속을 진심으로 지키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상명하달식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각 집단에서 자발적, 자치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 법관윤리강령을 준수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도 중요하고,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이해와 신뢰를 얻어내는 믿음직한 검사, 스스로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막말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편견을 가지거나 드러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 수십년 경력의 법조인들이 바뀌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수십년간 법조계의 Bullshit을 줄이기 위해서는 로스쿨에서의 자발적 자치적 담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욕죄와 명예훼손죄를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꼭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혐오발언을 범죄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는 별개의 어려운 쟁점이니까 다음 글의 주제로 남겨놓도록 하자. 이 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꼭 범죄로 규율하지 않더라도, 인간 도덕과 인격적인 차원에서라도 우리는 스스로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학회에서도 몇개의 문장을 정립된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다양한 주제를 테이블에 올린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세미나였다고 생각한다. 스토니 브룩 대학교의 약속문 역시 완전히 자발적인 것이며 선서 후에 이를 어기거나 철회하더라도 어떤 불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이 공유되는 공동체에서 소수자들은 환대받는 경험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다양성이 더 증진되면서 편견과 차별은 붕괴되는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 법조계에 그러한 약속문 제정을 건의하고 싶다.
앞서 소개한 <평등·존중·환대의 공동체를 위한 약속문>이라는 제목에서,'환대'라는 말이 좀 생소할 수 있다. 환영(welcome)한다는 의미랑 비슷한데, 칸트 철학에서는 환대의 권리a right to hospitality라는 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칸트의 환대 개념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판한 내용이 PSAT 시험에 출제된 적도 있다. 다수자와 소수자의 관계는 원주민과 이방인의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과거 법조계의 핵심을 이뤘던 엘리트들은, 소수자들에 대해 그 영역을 침범하는 이방인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 법조계에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의 비율이 높아지는 현상이 위기로 느껴질 때 그들 간의 위기의식과 유대감은 더욱 강해진다. 데리다에 따르면 칸트의 환대는 조건적이고 제한적이라는 문제가 있고, 무조건적 환대를 인정해야 한다는데, 솔직히 그러한 태도가 도덕적으로 옳을지는 몰라도 쉬운 것은 아니다. 데리다가 강조한 무조건적인 환대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최소한 개소리에 가까운 발언들은 점점 없어졌으면 좋겠다.
따라서 어찌 보면 칸트는 이방인과 원주민 모두에게 서로를 환대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주민은 이방인을 배척해서는 안 되고 (왜냐하면 그들은 지표면을 공유하는 세계시민으로써 지구상 어디든 방문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이방인은 원주민을 침탈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권리는 일시적인 외국 방문 기간 동안 평화롭게 처신한다는 조건 하에서 환대받을 권리, 즉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에 국한되며 혹 영구적인 체류를 원할 때는 별도의 우호조약을 체결해야 하므로). 칸트는 이러한 권리와 의무를 지킴으로써 국제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즉 환대는 국제평화의 초석인 것이다. 한편 데리다는 칸트의 환대 개념을 ‘조건부 환대’로 규정하며 관용과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환대의 조건을 주권자가 결정하고 이방인을 환대할 것인지의 여부를 주권자가 일방적으로 정하도록 해 놓았다는 이유에서다. -최진우, <환대의 윤리와 평화> 중.
끝으로 내가 학교에서 직접 경험한 사례를 소개하려 한다. 150명의 학생이 듣는 초대형 강의 중 쉬는시간이었다. 옆에 동기 학생들이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00 축구팀 선수는 다들 장애인 같아. 왜 장애인들만 뽑았는지 모르겠다. 한 두명이 아니고 아예 팀 자체가 장애인같다"
그 말은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욕설, 혹은 실력 없는 선수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여러 욕설들이 있지만, 가장 나쁜 건 장애인이라는 말 자체를 욕설과 멸칭으로 쓰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은 긍정적인 장애인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장애인을 집단에서 배제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사실 장애인을 지칭하는 표현은 역사적인 변화를 겪었는데, 80년대까지는 '장애자'라고 불리다가 부정적인 인식이 축적되니 '장애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나도 어릴 때 '애자'라는 욕설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장애인이라는 말마저도 그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더 이상 바꿀 말도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바꿔야 할 건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들의 차별적인 인식이다. 장애인 아들을 키우는 아빠로서, 그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 익명 게시판에 이렇게 글을 썼다.
최근에 학교 교실에서 모 수업 중 쉬는시간에 근처 학우들 사이의 충격적인 발언을 들었습니다 특정 스포츠 팀에 대해 말하면서 00 선수 빼고는 장애가 있는 거 같이 못 한다, 왜 장애xx들만 뽑았는지 모르겠다, 팀 전체가 장애인이다 라는 말을 명확히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제제기하지 못했지만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사담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너무 목소리가 컸어요 직접 들은 사람도 다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장애인 가족을 둔 학생인데요 혐오표현이 애매한 측면도 있지만 최소한 이런 발언은 우리 학교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혐오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공식적인 상황이니 구체적인 상황을 특정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든 어디에서든 장애인을 멸칭으로 쓰지 말아주세요 그런 대화에 동참하지 않는 학교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학교 익명게시판에 업로드한 글
놀랍게도 그 친구는 (익명이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댓글을 남겨주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도 덧붙였다. 무려 130명의 학우들이 내 글과 댓글에 추천 표시를 해주었다.사실 당사자가 직접 댓글을 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누구나 개소리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 중요한 건 잘못된 언행 이후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다. 나는 그 학우의 반성과 진정성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래서 더 뿌듯하다. 앞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은 앞으로 권위 있고 높은 자리에 진출할 가능성이 큰 편이다. 조직의 지도부에 있는 사람이 부적절한 언행을 할 때, 구성원들이 이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높은 자리에 갈 사람일수록 자기 언행을 스스로 성찰하고 조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경험한 건 작은 변화이지만 우리 사회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 이러한 변화를 전파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계속)
A검사는 지난해 5월 점심시간을 넘기고 업무에 복귀해 업무 관련자에게 욕설 등 부적절한 언행을 해 지난 4월 견책을 받았다. 여자 검사에게 뽀뽀해 달라고 말하는 등 부적절한 언행을 한 B검사도 견책에 그쳤다. C검사의 경우 지난 2011년 5월 노래방에서 검사직무대리 실무 수습중인 여성들에게 블루스를 추자고 하는 등 부적절한 언행을 했지만 같은해 10월 감봉 2월의 징계를 받는데 그쳤다. D검사는 지난 2011년 8월~12월 만취상태로 폭행 범죄를 저질렀지만 지난 2012년 10월 감봉 2월의 징계를 받았다. E검사는 지난 2012년 3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여기자 등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해 징계위에 회부됐지만 같은해 4월 정직 3월의 징계를 받았다. 오 전 과장의 사례처럼 막말 등을 이유로 해임을 당한 검사는 1명이 있었다. 하지만 해당 검사의 경우 2년 가까이 부하직원들에게 폭언 등 모멸감을 주는 언행을 했고, 피해자가 숨지는 특수한 경우였다. 막말이나 성희롱성 발언이 아닌 직접적인 신체접촉을 해 강제추행죄에 이르는 행위를 하거나, 남성 부장검사가 여성 직원과 검사들에게 지속적으로 데이트신청을 하는 등 부적절한 행위를 했을 때도 해임보다는 징계 수위가 낮은 ‘면직’으로 처분됐다. F검사는 지난 2017년 6월 서울 중구의 한 노래방에서 검사 출신 여변호사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하고, 2018년 1월 영등포구에 위치한 노래방에서 후배 여검사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했지만 2018년 8월 면직됐다. G검사의 경우는 2016년 9월 한 지검 형사부장으로 근무하며 같은 청 소속 실무관에게 반복적으로 사적인 만남을 제안했고, 2017년 5월~6월 여검사에게 사적인 만남을 제안하는 문자와 전화를 했으나 2017년 7월 면직됐다. -주재한 기자, <‘막말’ 검사는 감봉·견책, 非검사는 해임···법무부 징계 형평성 논란> 중, e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