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내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
법제처의 해석에 따르면, 정당, 국회의원 등의 후원회에 대한 공무원의 기부는 금지된다고 한다(법제처 법령해석 안건번호 05-0090).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27조의 문언상 어떠한 명목으로든 금전이나 물질로 특정 정당 또는 정치단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는 금지된다는 것이다. 위 결론의 불합리성에 대해서는 이미 글을 쓴 적이 있으니 넘어가기로 하자. 이번 글에서는 정당이 아닌 재단에 대한 후원을 검토해 볼 것이다.
지금도 전직 대통령 등의 기념 재단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예시로 '이명박대통령기념재단',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후원회',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후원회',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재단법인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등의 단체가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있고, 모두 후원금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기재부에서 공익법인(구 지정기부금단체)으로 지정해서 후원자는 연말정산 시 세액공제도 받을 수 있다. 좀 더 넓혀보면, 14대 대선 후보로 출마했던 정주영 후보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창립한 아산나눔재단도 있고, 3선 국회의원 노회찬을 기념하는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도 있다.
그렇다면 공무원이 저런 단체들에 후원하는 것은 허용될까? 문언상으로는 애매하다. 가령 공무원인 내가 재단법인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에 후원금을 기부하려고 한다고 하자(순전한 가정이다). 그 후원행위는 어떠한 명목으로든 금전이나 물질로 특정 정당 또는 정치단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에 해당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가 사전에 명확하게 예측가능하지 않다면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에 중대한 침해와 위축효과를 유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노태우센터에 기부하는 사람은 통계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속했던 정당을 계승한 정당(그런 정당이 있다면)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광범위한 단체에 대한 활동을 금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미국으로 치면 2025년에 링컨 대통령을 기념해서 후원하는 공무원이 현재의 미국공화당과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거라고 말할 것인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대체 어디까지 정치의 영역이고 어디부터 비정치의 영역인가.
게다가 공익법인 지정을 위해서는 "지정을 받으려는 과세기간 또는 그 직전 과세기간에 공익단체 또는 그 대표자의 명의로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에 대한 「공직선거법」 제58조제1항에 따른 선거운동을 한 사실이 없을 것"이 요구된다(소득세법시행령 제80조 제1항 제5호 사목). 그렇다면 위 대통령 기념재단들이 공익법인으로 지정된 이상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상 후원이 금지되는 정치단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위 재단들 간에 누구는 허용하고 누구는 불허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을 것이고, 전직 대통령들이 현실적으로 정치를 수행하지 않고 있으니, 상식적으로 이를 금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특정인이나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라는 복무규정의 문언이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규정은 좋게 봐주더라도 합헌적 축소해석이 되어야 하고 법제처와 인사혁신처는 보다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냉정하게 보면 곧바로 위헌 결정이 선고되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위 단체들에 후원금을 기부하는 공무원이 지금까지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같다. 찾아보니 노무현재단 홈페이지의 FAQ에는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노무현재단>은 ‘민법 제 32조’와 ‘행정안전부 및 그 소속청 소관 비영리 법인의 설립 및 감독에 관한 규칙 제 4조’의 규정에 의해 행정안전부로부터 법인설립 허가를 받아 법원등기를 마친 비영리 공익재단입니다. 노무현재단에 후원회원으로 가입해 후원하는 것은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후원하는 것과는 다른, 일반적인 비영리재단에 후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합법적 후원으로 아무런 제약이나 불이익이 없습니다. 교사, 군인, 공무원 등 공직에 계신 분은 누구나 후원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습니다."
노회찬 재단 홈페이지에도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Q. 공무원이나 교직원도 후원이 가능한가요?
A. 노회찬재단은 비영리 재단법인으로서, 정당 혹은 정치 단체와는 다릅니다. 합법적으로 후원이 가능하며, 이에 제약이나 불이익은 없습니다.
Q. 노회찬재단은 정치단체인가요?
A.노회찬재단은 특정 정당의 부속기관이 아니며,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독립된 비영리 재단법인 입니다. 추모 및 아카이브 사업, 노회찬 정치학교 등 재단의 모든 사업 역시 100% 후원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별 공무원이 저 안내문만을 믿고 행동하기에는 리스크가 있다. 실제로 과거 민주노동당의 후원당원 제도를 믿고 후원했던 교사들이 다수 기소되고, 처벌받고,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재심 무죄판결을 받기도 하는 등 엄청나게 많은 사례가 있다. 공무원도 후원할 수 있다고 설명한 재단 홈페이지의 설명이 타당한 것인지 여부, 소관 부처에서 이를 인지하고 그러한 내용의 게시를 허용한 것인지 여부도 충분히 소명되어야 한다.
다른 재단의 경우 명시적인 설명을 찾지는 못했으나, 어디에도 공무원이 후원할 수 없다는 내용은 없었다.
법제처에서 위 복무규정의 합헌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해석론이나 구체적 기준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오래 전의 역사적 인물은 허용하고 최근의 정치인 기념을 금지할 것인가? 대체 몇년을 기준으로 해야할까? 기념하는 인물이 생존한 경우에는 금지하고 사망한 경우에만 허용할 것인가? 해당 인물이 대통령이면 허용하고 아니면 금지할 것인가? 해당 인물이 진보 보수에서 모두 호평하는 경우 허용하고, 평가가 갈리면 금지할 것인가? 단체의 정관과 조직과 구성원, 활동내역, 발간물 등을 고려해서 사후적으로 판정할 것인가? 그 어떤 기준도 명쾌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불명확한 기준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권력자의 취향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고 상대를 박해하는 과정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좌파 정부에서는 우파 단체가 중립성 위반이고, 우파 정부에서는 좌파 단체가 중립성 위반이 될 수 있다. 왜 우리만 괴롭히냐고 항의해도 대체로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 법 관념에서는 소위 '불법의 평등은 보호받을 수 없다'는 식의 힘의 논리가 종종 통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을 만들어놓은 이상 굳이 권력자가 입을 떼지 않아도 알아서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위험이 크다. 그런 사례도 수없이 많이 제시할 수 있다.
결국 정당 후원회든 대통령 기념재단이든, 국제앰네스티, UNHCR, 자유기업원, 뉴라이트재단, 참여연대 등등 NGO, 시민단체이든 공무원의 참여를 선별적으로, 그리고 모호하게 퉁쳐서 금지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본다. 금지할 거라면 명쾌하고 납득 가능한 일관된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맞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막스 베버(칼 마르크스가 아니다!)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불온서적으로 취급한 역사를 경험했다. 모 사립고등학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유해도서라는 이유로 폐기했다고 한다.(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가 스페인의 고등학생들이 주체적으로 토론하고 의견을 개진해서 시상하는 상을 수상했다고 언급하며 한국의 검열 문화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불온서적을 선정하는 과정도 이렇게 코미디인데, 우리 정부는 대체 무슨 기준으로 '정치단체'를 규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니 앰네스티 가입과 후원 행위를 처벌할 수도 있다는 발상이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법치주의의 핵심은 바로 예측가능성이다. 내가 어떤 단체에 후원할 시점에, 충분히 교육받은 평범한 시민이라면 이게 합법인지 불법인지 어느정도는 스스로 알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잘 모르지만 에라 모르겠다 일단 질러 보고 나중에 정권에 핍박을 받지 않기를 그저 바라도록 하면 안된다.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 조심하자는 식으로 스스로 검열하고 위축되도록 해서도 안된다. 그런데 구체적인 이슈로 들어가면 평범한 시민의 통념은커녕 헌법을 평생 전공하고 연구한 교수와 헌법재판들도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다. 정부가 그런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건 엄청나게 어렵고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도 딱히 없기 떄문에 아마 그렇게는 못하고, 안할 것같다.
p.s. 2022년에 국방부에 문의해서 받았던 답변을 찾아봤다. 197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국제앰네스티에 군인/공무원이 가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국방부에 서면으로 질의했다. 답변은 매우 정중했으나 내용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국제앰네스티 단체의 실질적인 결성 목적 및 구성원의 활동 내용 등에 따라 ‘그 밖의 정치단체’의 해당 여부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요청하신 질의에 대한 일률적인 답변은 제한됨을 알려드립니다. 귀하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며, 평안 및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다시 한번, 국방에 대한 귀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건강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 주기보다는 구체적인 답변을 원했지만 해당 공무원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기준이 모호하고 누구도 사전에 책임질 수 없으니 그랬을 것이다. 국제앰네스티가 속시원하게 허용된다고 답변하기 어려울 정도의 현실이라고 하니 회원들이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헌법재판소가 분발을 해야할 문제인가. 이정도 기준이면 코이카, 적십자, 구세군 같은 단체나 보드게임 동호회, 최강야구 팬카페에 가입하는 건 가능하다고 허용해줄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저 내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가 언제 이렇게 도둑맞은 것인지 참 씁쓸할 뿐이다.
(글 추가)
소관 부처와 법제처에 법령해석을 요청했다. 우려(예상)했던 대로, 명확한 답변을 받지는 못했다. 기념재단에 후원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나의 질의에 대해 답변은 이러했다.
귀하께서 후원하고자 하는 "기획재정부장관이 공익단체로 지정한 기념재단(전직대통령 혹은 정치인 관련 재단)"이 정치자금법에 근거한 후원회에 해당하는지 여부 및 특정 정당, 특정 정치인 또는 특정 정치인후보자를 지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단체인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실관계를 확정한 후 법령을 적용하여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바, 법령 규정의 의미에 대하여 해석하는 법제처 법령해석 제도로 답변드리기 어려우며, 개별적인 현황 및 경과 등을 고려하지 않고 법령의 문언에 따라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귀하의 질의를 법제업무 운영규정 제26조제8항제3호 및 같은 조 1항제2호에 따라 반려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담당 공무원의 곤란함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러한 답변은 역설적으로 해당 금지 조항의 불명확성과 위헌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법제처는 사실관계 확정이 필요한 문제로서 경우에 따라서 금지 및 처벌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특정 재단도 아니고, 기재부 장관이 공익단체로 지정까지 한 단체에 대해서도 구체적인(아니면 최소한 원칙적인 정도라도)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면, 이는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가이드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하고 싶은대로 하되, 나중에 기소되거나 불이익을 보게 되면 그 때 별개로 다퉈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무책임한 태도는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부디 막스 베버의 책이 금서로 지정되지 않기를 바라며, 자기 검열을 권하는 이 사회에 불평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