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 청년들의 마음 작동 방식 분석하기
(본 글은 인문학 전문학술 논문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지옥 같다'는 의미의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한때 우리 사회 청년 세대의 깊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낮은 출산율과 행복지수, 높은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 치솟는 청년 실업률 등 암울한 통계 지표들은 '헬조선 50관왕'이라는 자조 섞인 게시물로 회자되기도 했죠. 부모의 재산에 따라 '금수저', '흙수저' 계급이 나뉘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 격차를 넘기 어렵다는 인식은 많은 청년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러한 격차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 헬조선 담론의 핵심 주장 중 하나였습니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청년들의 분노가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청년들은 여전히 일자리, 주거, 양극화 등 수많은 문제의 당사자이면서도, 정치·사회적으로 침묵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혹독한 경쟁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그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고, 불평등에 분노하면서도 대학 서열과 같은 기존 질서는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모순적인 모습마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왜 사회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그 사회를 바꾸는 노력 대신, 그에 순응함으로써 그 사회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행동에 노력을 기울일까?" 이 질문이 본 연구의 출발점입니다. 이 글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듯 보이는 한국 청년들의 복잡한 심리를 <체제정당화>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한 학술 논문을 쉽게 풀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청년들이 경험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의미 불일치])는 무엇이며, 그 속에서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사회심리학의 여러 이론은 인간이 <불일치> 상태에서 심리적 불편함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다를 때 ([인지 부조화 이론], Festinger, 1954), 이상적인 자기 모습과 현실의 내가 다를 때 ([자기 불일치 이론], Higgins, 1989), 기대했던 세상과 실제 세상이 다를 때 ([의미 유지 모델], Heine et al., 2006)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고, 이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동기를 갖게 됩니다. "불일치의 지각은 심리적 불편감을 야기하고, 이는 불일치를 줄여 긴장을 해소하고자 하는 목표 지향적 행동이나 사고를 작동시키는 동기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들 이론의 핵심입니다. 기존 이론들은 주로 개인의 신념, 목표 등 '자기(self)'와 관련된 불일치에 주목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 즉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인식과 개인의 행동이 불일치할 때는 어떨까요? 여기에 답을 제시하는 이론 중 하나가 바로 [체제정당화 이론(System Justification Theory)]입니다. Jost와 Banaji(1994) 등이 발전시킨 이 이론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 시스템(가족, 제도, 조직, 이데올로기, 사회 규범 등)에 명백한 단점이나 불공정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스템을 방어하고 지지하며 정당화하려는 동기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사회 시스템은 우리의 삶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통제감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현 상태에 심리적 애착을 형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스템의 문제점에 직면하면 실존적, 인식론적 위협을 느끼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 체제정당화 이론은 주로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연구되었고,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처럼 해당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아, 한국 청년들이 사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순응하는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본 논문은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한국 청년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의미 불일치>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심리적 과정을 질적 연구 방법(심층 인터뷰)을 통해 깊이 있게 탐색했습니다.
연구 참여자(성인 초기 한국인 20명)들의 심층 인터뷰를 분석한 결과, 청년들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는 <의미 불일치 경험>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개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미 체계가 위협받거나 현실과 충돌하는 상황들입니다.
(i) 자기가치감 상실: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흔들리는 경험
개인적 선택 존중 부재: 남들과 다른 길(예: 취업 연기, 비주류 직업 선택)을 선택했을 때 주변의 시선이나 참견으로 인해 자신의 선택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낌. ("취업을 미루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나에게 ‘너 자유롭게 산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 나를 대책 없는 애로 여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참여자 11)
개인적 경험 존중 부재: 취업 시장에서 요구하는 '스펙' 외에, 과거에 자신에게 중요했던 경험이나 강점이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될 때 깊은 좌절을 느낌. ("내가 쌓아온 스펙과 사회가 원하는 스펙이 다르다. 나는 나름 의미있는 경험을 했지만, 그 경험들은 쓸모가 없다." - 참여자 7) 심지어 전공, 나이, 성별 등 바꿀 수 없는 조건 때문에 기회가 제한될 때도 자기가치감은 손상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회사가 매력적으로 여길 만한 것이 아니구나..전공, 나이, 성별 등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문제가 되었다." - 참여자 12)
불공정한 대우: 학점, 취업, 보수 등 평가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자신의 노력이나 성과에 비해 정당한 평가나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나는 다른 친구들 보다 더 많이 일을 하는데 돈을 더 적게 받는다. 안정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만 혜택을 받는다." - 참여자 10)
(ii) 삶의 목표에 대한 좌절: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절망감
의무가 된 선택들: 스스로 원하지 않았지만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 속에서 특정 목표(예: 대기업 취업)를 가져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낌. ("회사원을 한 번도 꿈으로 가져 본 적이 없지만, 대학교 3학년이 되니 그것을 목표로 가져야 하는구나, 남들처럼 나도 해야 하는구나 하는 부담감이 찾아왔다." - 참여자 12)
끝나지 않는 준비 기간: 원하는 '평범한 삶'을 이루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취업 준비 등으로 인해 성취 없이 준비만 계속되는 시간을 '0의 시간'으로 느끼며 좌절함. ("대학 입시와 취준 기간은 성취가 없는 준비의 시간, 0의 시간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남들과 같은 삶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의 수준이 점점 커진다." - 참여자 6)
자기실현이 불가능한 직장/직무: 어렵게 취업해도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거나 성장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깨달음. 개인의 발전보다는 조직의 부속품처럼 느껴질 때 목표 달성의 의미가 퇴색됩니다. ("일에서 나를 실현하는 기분은 아니다. 그것은 높은 자리에 가면 할 수 있을 것이다." - 참여자 8) 심지어 원하던 직무를 맡아도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현실과의 타협: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시선, 성공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대안을 선택하게 되는 상황.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과 타협해야 할 때 좌절감을 느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그럴 듯한 직업에 도전해 일단 성공했다는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 참여자 17 /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한 기자는 되기 싫었다... 그러한 고민 끝에 타협안으로 지금의 직업(노무사)를 선택했다." - 참여자 20)
(iii) 현실 사회에 대한 실망: 이상적인 기대와 다른 실제 세상의 모습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 상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기대했던 진정성이나 상호 존중이 깨지는 경험. 예를 들어, 자신의 필요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을 보며 실망함. ("사장들은 내게 요구할 때는 인간적이기를 원하면서, 내가 요구해야 할 때는 계약을 들이민다." - 참여자 17 / "바람직한 인간관계에 대한 신념대로 행동하면 (나를 개방하거나 착하게 행동하는 것) 사회에서 오히려 나쁜 결과로 돌아왔다." - 참여자 19)
이상적 사회에 대한 기대 상실: 책이나 교육을 통해 배운 이상적인 사회(평등, 공정, 합리성 등)의 모습과 실제 경험하는 세상 사이의 괴리를 느낌.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갖게 되기도 함. ("책으로 보면 사회는 굉장히 잘 정리되어 있는데,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느꼈다." - 참여자 18 / "평등이라는 것은 이데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추구하기는 하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것. 평등은 상대적인 것이다." - 참여자 17)
사회의 불공정성/비도덕성 경험: 미디어를 통해 접하거나 직접 경험하는 사회의 부조리, 불공정, 비도덕적인 사건들(예: 인맥 중심의 성공, 권력 남용, 차별적 언행 등)을 보며 실망감을 느낌. ("일에서는 공정한 사람이 술자리에서 성차별적, 지역 차별적 언행을 하는 걸 보며 실망했다." - 참여자 16 /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실력보다는 인맥이 중요하구나. 그런 것들이 불공정하다고 느꼈다." - 참여자 7)
이러한 의미 불일치 경험들은 일회성 사건이라기보다는, 학업, 취업, 직장 생활 등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청년들의 인식과 정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청년들이 경험하는 의미 불일치 속에는 그들이 인식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인터뷰 분석 결과, 한국 사회에 대한 표상은 크게 세 가지 특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청년들의 불일치 경험을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i) '정답 사회': 다양성이 부재하고 획일성을 강요하는 모습
평범한 삶의 강요: 한국 사회는 마치 '정답'이 정해져 있는 사회 같다는 인식입니다("한국은 정답이 존재하는 사회 같다. 잣대가 분명한 사회. 정답이 아닌 것을 특이하고 지양할 것으로 본다." - 참여자 20). 정해진 나이에 맞춰 학업, 취업, 결혼 등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이 강하며, 이 '정답'에서 벗어나는 삶은 존중받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나이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 그래서 나이가 되면, 연애하라, 결혼하라 강요와 강박이 심하다." - 참여자 19)
획일화된 가치: 사회적으로 경제적 성공이나 안정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개인의 다양한 재능, 꿈, 가치 등은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기 쉽습니다. ("경제적 논리 외에 재능이나 하고 싶은 일들은 무시당하거나 평가절하 당하고, 아이들조차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참여자 7) 이는 개인의 다면적인 성장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모난 돌 배제: 집단의 주류 의견과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튀는 행동을 하면 부정적인 시선을 받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한국 사회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한다." - 참여자 1 /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되긴 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자기 의견을 이야기 하는 것을 안 좋아 하는 것 같다." - 참여자 18) 이는 청년들이 불합리함을 느껴도 쉽게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흑백논리와 낙인찍기: 사람이나 사안을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판단하고 쉽게 낙인찍으며 편 가르기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몰아가기를 너무 잘하고 속단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가지고, 내 색깔이 아닌데, 사람들이 색을 덧 씌울까봐 두렵다." - 참여자 6) 이러한 분위기는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위축시킵니다.
(ii) '불신 사회': 공정성과 신뢰가 무너진 모습
제도 공정성 불신: 부와 특권이 대물림되는 '수저 계급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균형 심화 등 사회 시스템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며, 공정한 경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기득권이 아닌 개인의 영향력은 작다." - 참여자 4)
공고한 불평등 구조: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학연, 지연, 혈연 등 '인맥'이 성공에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불신감을 느낍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제안서를 잘 쓰는 것 보다, 인맥으로 사업이 더 잘 만들어 지는 것 보면서, 인맥을 갖추지 않으면 도태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참여자 7)
정부 역량 및 공적 기능 불신: 국가나 공공기관이 사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가 낮습니다. 특히 많은 참여자가 2014년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본적인 믿음이 흔들렸다고 토로했습니다("세월호 이후 정부를 더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 참여자 20). 또한 지진과 같은 재난 대응 과정에서도 사회 안전망에 대한 불신을 경험했습니다("지진 등에 대한 대처에서 사회 안전망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 참여자 15).
타인 불신: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 의식이나 사회적 책임감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 그래서 건전한 토론과 이슈에 관심이 없고, 결국 자기 이익을 이야기 한다." - 참여자 6)
(iii) '스트레스 사회': 끊임없는 경쟁과 불안 속 긴장의 모습
긴장의 지속: 학업, 취업, 직장 생활, 노후 대비 등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현재의 삶을 즐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입시 끝나면 학점, 그걸 지나면 취업, 끊임없이 스트레스 상태에 놓여 있다." - 참여자 8)
심적, 물질적 여유 부재: 치열한 경쟁과 불안정한 미래 전망 속에서 심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여유를 갖기 어렵습니다.
지속적인 사회 비교와 평가: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는 문화 속에서 높은 스트레스를 경험합니다. ("한국인의 특성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것" - 참여자 7)
문제의 개인화: 사회 구조적인 문제나 시스템의 부조리함에서 비롯된 불만이나 어려움조차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능력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불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꼭 내가 노력하지 않아놓고 투정부리는 느낌이 들어 꺼려진다." - 참여자 13) 이러한 분위기는 개인이 문제를 내면화하고 참고 버티게 만들어, 결국 고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합니다.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어려운 경쟁 과정을 잘 버텨낸 사람들이라고 인식되기도 합니다("사회에 적응을 잘 하는 사람들은 사회화가 잘 된 사람들이다. 어려운 경쟁 과정을 잘 버티는 사람들." - 참여자 18).
이러한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은 청년들의 의미 불일치 경험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정서와 행동 방식에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반복되는 의미 불일치 경험과 부정적인 사회 인식 속에서 청년들의 마음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연구 결과, 몇 가지 두드러진 인지-정서적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불일치로 인한 심리적 불편함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마음의 방어기제로 볼 수 있습니다.
(i) 정서적 둔감 (Emotional Numbing):
반복되는 실망과 불만족 속에서 해당 경험에 대한 감정이 점차 무뎌지는 현상입니다. 처음에는 분노하거나 슬퍼했을지 몰라도,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더 이상 큰 충격이나 감정적 동요를 느끼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 만성적인 사회 인식에 가까워집니다. ("정의롭지 않은 것이 계속 있어 와서 당연하게 느껴진다. 괴리도, 화도 느껴지지 않는다." - 참여자 19 / "우리 사회가 점진적으로 나빠졌다. 항상 이런 모습이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거나 충격 받지 않았다." - 참여자 8)
(ii) 기대 철회 (Withdrawal of Expectations):
미래에 겪을지 모를 실망이나 상처를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사회나 타인, 혹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낮추거나 아예 버리는 전략입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군대가 부조리 한줄 알고 갔다. 그래서 덜 괴리를 느꼈다." - 참여자 16) 역설적으로, 기대 수준을 매우 낮추었기 때문에 아주 작은 긍정적인 경험에도 크게 감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생활에 너무 실망을 많이 하다 보니 상식적인 사례를 보면 감동을 하게 된다.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 참여자 19)
(iii) 변화 무기력 (Helplessness about Change):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나서서 무언가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깊은 무력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정치적 효능감 부재: 자신의 참여나 노력이 사회·정치적 변화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개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 참여자 14 / "내가 정치가로 나가지 않는 이상, 정치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 참여자 4)
변화 가능성 기대 부재: 현재의 문제 상황이나 자신이 속한 조직,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 ("세상이 바뀔 것 같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다. 우리 세대에서는...." - 참여자 10)
변화의 어려움 인식: 사회 구조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성공 가능성도 낮아 마치 '도박'과 같다고 인식함. ("판을 뒤엎고자 하는 것은 도박이며 불확실성이 높다. 도박을 하고 싶지 않다." - 참여자 6)
실패 경험의 학습 / 패배감 내면화: 과거에 용기를 내어 문제 제기를 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던 경험("여러 번 문제 제기를 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 참여자 1)이나, 자신이 지지했던 정치 세력의 실패 등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어차피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패배감이 내면화됨. ("싸우는 과정에서 익숙해져 있는 패배감. 이렇게 해도 안 바뀐다는 생각이 의견 표출을 막는다." - 참여자 10)
(iv) 변화 불안과 회피 (Anxiety and Avoidance of Change):
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이나 손실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변화를 위한 행동을 주저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입니다.
새로운 도전의 기회비용: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안정적인 경로를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거나 남들과 다른 삶을 선택했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예: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크다고 느낌. ("다른 삶을 선택하면 도태 될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 화가 나지만,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되기 때문에 할 수 없다." - 참여자 8)
사회 변화 시도가 야기하는 불이익: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거나 변화를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이 실제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희생되는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하면서, 적극적인 참여를 망설이게 됨. ("의인들은 결국 희생이 된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많은데, 결국 바꾸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결국 죽는다." - 참여자 20 /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위해 걸어야 할 것은 많은데,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 참여자 15)
이러한 정서적 반응들은 청년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거나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중요한 심리적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 불일치 경험과 복잡한 인지-정서적 반응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까요? 연구 결과, 청년들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상반된 듯 보이는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두 방향 모두 결과적으로는 현 시스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i) 개인적 차원: 통제감 추구 (Seeking Personal Control)
사회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것은 어렵고 불확실하다는 인식 하에, 자신이 직접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개인적인 영역>에 집중하며 현실에 적응하려는 모습입니다.
현실 순응 및 개인적 의미 추구: 사회나 직장에 대한 불만족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거나(예: 자기계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며 일 외적인 활동(취미, 인간관계 등)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거대한 시스템을 바꾸기보다 '개인적인 변화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고 여기는 경향도 있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이 못마땅하지만, 못마땅한 현실 속에서 혼자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 참여자 8 / "일을 통해 즐거움을 찾는 것은 포기했다. 노동의 즐거움 보다는 노동을 끝내고 나서 즐거움을 찾겠다." - 참여자 15 / "혼자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 적응 하는 것이 현명하다." - 참여자 1)
소극적 사회 참여: 사회 문제에 완전히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운동 참여보다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예: 기부, 환경 보호 활동, 공정무역 제품 소비 등). ("세상은 변하기 힘드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의미 있는 행동. 지구에 피해주는 삶을 살지 말자." - 참여자 19)
(ii) 사회적 차원: 변화 회피와 정당화 (Avoiding Change and Justification)
앞서 살펴본 변화에 대한 무력감과 불안감으로 인해, 사회 구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예: 시위 참여, 정치 활동, 조직 내 문제 제기)을 회피하고, 그러한 자신의 <비행동(inaction)을 합리화>하는 모습입니다.
개인적 여유 부족: 당장 자신의 학업, 취업, 생계 문제 등을 해결하기도 벅차서 사회 문제까지 신경 쓸 심리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느낍니다. 때로는 이런 현실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회에게 미안하지만, 내 머리도 아픈데 그것 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 참여자 13 / "내가 힘들고 지치면 먹고 사는 문제를 우선하게 된다. 나는 환경운동가나 정치인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런 현실에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 참여자 19)
자격 및 역량 부족 인식: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하거나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지식, 전문성, 사회적 지위('자격') 등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현재 자신은 그런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다고 여기며, 이는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당화 기제가 됩니다. "문제를 개인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충분한 '자격' 없이 불만을 표출하면 단순히 노력 부족한 사람의 투정으로 비춰질까 염려하는 마음도 작용합니다. ("문제제기를 할 수 있으려면 일단 내가 위로 올라가야 한다. 주류에 있어야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준다." - 참여자 6 /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삶에 대해 자신이 없다... 참여를 하려면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 - 참여자 12)
결국, 많은 청년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인식하고 불만을 느끼면서도, 변화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무력감, 불안)과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시스템에 직접 저항하거나 도전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 통제감을 확보하려 하거나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개인 수준의 대응 방식들이 모여, 결과적으로는 기존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거나 변화를 더디게 만드는 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본 연구의 결과는 기존 체제정당화 이론의 예측과 유사한 측면(예: 시스템에 대한 의존성이 높거나 변화가 어렵다고 느낄 때 현 상태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보여주면서도,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기존 이론, 특히 서구 개인주의 문화권 중심의 연구들은 주로 체제에 대한 <인지적 지지> (예: '우리 사회는 그래도 공정한 편이야'라고 믿거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것)를 체제정당화의 핵심적인 방식으로 강조했습니다. 즉, 불편한 현실과 자신의 믿음 사이의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 자신의 인지(생각, 태도)를 시스템에 맞춰 바꾸는 전략입니다.
하지만 이 연구에 참여한 한국 청년들은 시스템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지지하는 인지적 전략보다는, 불일치 상황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정서를 조절>하거나 <행동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경향이 훨씬 두드러졌습니다. 이것은 체제정당화가 작동하는 또 다른 방식, 즉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지지가 아닌, 불편한 감정을 다스리고 변화의 어려움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현 상태에 순응하게 되는 메커니즘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체제정당화의 중요한 메커니즘으로서 <정서조절 모델(Emotion Regulation Model)>을 제안합니다. 심리학자 Gross(2001)는 우리가 감정을 관리하는 방식, 즉 정서조절 전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인지적 재평가(cognitive reappraisal)로, 정서를 유발하는 상황 자체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감정 반응을 미리 조절하는 것입니다. 본 연구에서 나타난 '기대 철회'는 이러한 인지적 재평가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서 억제(expressive suppression)로, 이미 발생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표현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본 연구에서 나타난 '정서적 둔감화'나 만성적인 불만 상태는 이러한 정서 억제가 장기화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서조절 연구들에 따르면 정서 억제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불편감을 줄여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심리적 안녕감이나 자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특히 집단 행동 참여 의사를 낮추는 경향이 있습니다(Gross & John, 2003 등). 이는 본 연구에서 청년들이 정서적으로 둔감해지고 변화에 무력감을 느끼며 사회 참여를 회피하는 결과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더 나아가, 본 논문은 이러한 정서조절 중심의 대응 방식이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관련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개인의 자율성과 내적 일관성을 중시하는 서구 개인주의 문화와 달리, 관계의 조화나 집단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과 같은 상호의존적 문화(Markus & Kitayama, 1991)에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갈등을 일으키기보다 정서를 조절하고 상황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더 적응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장려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지적 일관성을 추구하기 위해 신념을 바꾸기보다는, 정서를 관리하며 현실에 순응하는 방식이 한국 청년들에게 더 익숙하거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 청년들의 '분노하면서 순응하는' 복잡한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제정당화라는 보편적인 심리 기제와 더불어, '정답 사회', '불신 사회', '스트레스 사회'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맥락>, 그리고 <정서 조절이라는 심리적 메커니즘>, 나아가 <문화적 요인>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다층적인 접근이 필수적임을 본 연구는 강조합니다. 질적 연구를 통해 이러한 맥락적 요소를 심층적으로 탐색하는 것은 체제정당화 이론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현실 설명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은 '헬조선'이라는 키워드로 표출된 청년 세대의 불만과 좌절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심리적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냅니다. 왜 청년들은 사회 문제에 분노하면서도 적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에 대해, '체제정당화'와 '정서조절'이라는 심리학적 개념을 통해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공합니다. 특히, 서구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대신 한국 사회의 특수한 맥락과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진술문')를 바탕으로 이론을 재구성하고 '정서조절 모델'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점이 매우 중요하고 흥미롭습니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은 통계나 표면적인 현상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한국 청년 세대의 현실적인 어려움과 그들의 내면 풍경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가 청년들과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글은 안혜정, 안정민, 서예지, 정태연, "한국 청년세대의 체제정당화: 의미 불일치 경험과 그 심리적 결과를 중심으로"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Vol.31, No.4, pp.247-275 (2017), KCI 등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TextSear.kc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