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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in Sep 11. 2024

시대의 감기

우울증과 세대의 반항

글을 쓰기에 앞서,


 몇 달 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기보다, 글을 쓰기가 힘들었다. 소재가 떨어졌다기보다, 어떻게 글로 옮길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면서 코로나에 다시 한번 걸리면서, 여전히 기침을 하고 있다.


 한참 코로나가 유행했던 시기에, 우울증을 앓는 이가 늘어나면서, 그것을 코로나 블루라고 했었다. 파란색은 우울함이나 냉정함을 상징하는 색깔이기도 하기에 코로나 동안 우울증이 유행한 것을 코로나 블루라고 표현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노인 심리학자이자, 임상 심리학자인 휘프 바위선이 쓴 “소중한 사람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거기에선 우울증이 찾아온 사람의 주변인들에 대한 조언과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관찰자의 시점에서 쓰여 있다. 나는 주변인들에 대한 조언 중에 가장 많이 공감하는 것은 ‘함부로 충고하지 마라’이다.


 충고라는 것은 참으로 위선적이기도 하다, 겉은 남을 위하는 말이라고 포장하는 듯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본인의 과시욕이나 선민의식,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 충고를 가장 잘 걸러낼 수 있는 존재가 모순적이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들이다. 나 또한 학창 시절부터 우울증과 강박증이 조금 심하게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나 자신이 불우한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치가 없는 사람이고, 아무도 나의 죽음과 소멸에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몇 년을 지내왔다.


 상담도 받아봤고, 기쁜 일에 대한 일기도 써보고, 시도 써보고, 내 나름대로 회복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나아지기란 힘든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상대방의 조언이나 진심 어린 걱정을 모두 외면하고 있었다. 충고를 떠나서 나를 위한 말조차도 외면하고 있었으니 충고를 걸러낼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옛날부터 어른들이나 기성세대는 우울증이나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의지가 박약하거나, 혹은 실패한 패배자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며 정신병원에 다니는 것을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자식을 점점 더 고립시키면서 자극을 주기 위해서 모진 말을 하거나 체벌을 하기도 했다.


  정작 그랬던 기성세대들은 나이가 먹어서, 갱년기나 노년이 되어 우울증이 나타나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기도 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째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냐면 사람들이 가지는 선민의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유명한 일례로, 전 농구선수이자 기업인 최희암 감독은 팬서비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공놀이를 하는 데에도 대접받는 것은 팬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최희암 감독의 말은 팬서비스가 안 좋은 선수나 구단이 생기면, 항상 수면 위로 떠올라 머리에 상기되곤 한다.


 사람은 명성이나 재물이 어느 정도 풍족해지거나 남들에 비해 우월해졌다고 생각하거나, 외모나 몸매가 출중하거나, 혹은 정서적으로 학구적으로 남들에 비해 내가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곤 한다. 이는 잘못되었다!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문제화되는 것은 젊은 시기에 자리 잡은 인식이 나이가 들어서도 그대로 유지가 되거나 고착화되어버리거나 더 나아가서 사회전반적인 분위기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유리한 쪽으로 내용을 해석하고 남들에게 설명하곤 한다.


 그렇기에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에 그러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외모 또한 자산이다, 혹은 남들에 대한 질투심과 열등감으로 주장을 내세우지 말라는 주장을 해온다, 나이가 더 많이 든 이후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는 시간이 흘러보면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는 상대방에 대해 가치를 결정짓게 되는 요인이 되어서 훗날 자신의 배우자나 직장을 고르는 데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과 더 뛰어난 가치를 지녔다고 내세움에 따라서 내가 이전에 썼던 글에서처럼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연령층이 점점 낮아짐에 따라서 사춘기 아이들이나 20대의 청년들에게서 벗어나 이제는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어린 학생들마저도 외모와 재물,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의 인맥에 대해서 더 높은 가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이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과도 연을 쌓으면서 사춘기를 지내고 있는 아이들의 반권위적인 태도를 먼저 습득하게 되고,


 사회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가치들보다도 반항적인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어 하며, 이것이 심화되어 범법이나 비행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휘프 바위선의 책에서는 보통 어린 학생들의 우울증을 다루기보다는 이미 사회화가 마무리된 어른과 노인들에 대한 우울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들은 보통 젊은 세대를 억압하거나 통제하던 세대들로서 삶의 회의감을 느끼는 시기에 변화해 가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점점 더 빠르게 시대에 발맞추거나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부정적인 노선을 취하게 되고 이는 결국의 세대 갈등으로 까지 보이게 된다.


 사회 문제는 한 가지의 문제로 촉발되는 것이 아닌 위처럼 복합적인 문제가 얽히고 얽혀 나타나게 된다.


 변화하는 시대에 대해 당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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