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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잔 Aug 23. 2020

매일 시험 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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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조교로 일할 때였다. 기말고사 기간이 끝난 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행정실로 놀러 왔다. 후배는 아직 학생이었고, 시험을 막 치르고 온 모양이었다. 몸속의 내용물을 다 쏟은 듯한 몰골을 하고서도 말할 힘은 남았는지, 푸념을 위한 운을 띄워서 내 주위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선배는 시험이 없어서 좋으시죠?”


후배는 내가 시험을 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문제풀이 방식의 시험이 내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험을 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하루의 업무가 내게는 과제면서도 시험이다. 그래서 후배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매일 시험 치는 것 같은데.”


후배는 내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들였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기가 빠졌는지 실없이 웃고는 대답을 잇지 않았다. 후배의 눈에는 직장생활을 하는 내가, 시험을 다 치러낸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지금쯤 직장인이 됐을 후배는 이제야 내 말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시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을.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해방의 꿈이 도리어 짐짝처럼 느껴질 것이다. 취업을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내달렸는데, 매일의 업무가 시험으로 느껴진다면… 나는, 우리는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내가 하는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무게는 학생일 때 느꼈던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일꾼은 찬밥신세다. 그런 분위기 탓에 어떻게든 좋은 성과를 내려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한 두 해가 지나가는 것을 용납하다가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내 삶을 기술할 수 있는 모든 문장에서 ‘일했다’는 단어를 뺀다면 어떤 문장이 남을까?


목적지를 찾는 우리는 언제나 길을 잃고 만다. ⓒ타잔


물질적인 궁핍함을 벗어나기 위한 노동은 도리어 마음을 궁핍하게 만든다. 직장인이 된 지금의 나에게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도, 자유로운 생각도, 방학도 없다. 출근과 퇴근, 휴일이 반복될 뿐이다. 또 고삐가 풀린듯한 창의적인 생각은 생각보다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기회. 시험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기나긴 방학. 학생으로 누리던 모든 것들이 그립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들.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영혼들. 뜨거운 침묵으로 가득 메워진 도서관 열람실. 학기마다 치르던 시험을 날마다 치르게 되니 더 욕망하게 된다. 그 시절의 시험기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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