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란함이 어떻게
관계의 감옥을 열었을까

하정우 감독의 '윗집 사람들' 리뷰

by 파인
낯설지 않을때, 불안해지는 부부관계의 아이러니

결혼에 대해 말하는 일은 늘 조금 망설여진다. 나는 아직 결혼을 해보지 않았고,

그래서 결혼생활을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바깥에서 창문만 들여다본 사람이 실내의 온도를 짐작하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어느새 또래의 친구들 대부분이 결혼을 했고, 그중 몇몇은

심란한 이혼과정을 겪어내어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 시간을 가까이서 보거나 멀찍이서 건너다보며

자주 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한다는 것, 그 사람의 행복과 불안, 피로와 절망까지 함께 껴안고

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더 많은 역할과 책임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윗집 사람들'은 내게 단순한 섹스 코미디로 남지 않았다. 이 영화는 오히려 결혼이라는 특수한 계약이 무엇인지, 배우자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오래 함께 산다는 것이 왜 종종 사랑보다 먼저 욕망을 말라붙게 만드는지를 묻는,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민망하고, 그래서 더 솔직한 질문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인간의 색욕과 애욕은 애초에 그렇게 단정하고 안정적인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욕망은 원래 변덕스럽고, 비합리적이며, 때로는 윤리보다 먼저 몸과 상상 속에서 자라난다. 반면 결혼은 그 불안정한 욕망 위에 지속과 책임, 역할과 의무를 덧씌우는 제도다. 그런 점에서 결혼은 욕망의 종착지라기보다, 욕망과 사회가 서로를 길들이기 위해 맺은 불안정한 협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윗집 사람들'은 바로 그 충돌을 건드린다. 사랑과 생활, 친밀함과 권태, 제도와 판타지, 책임과 섹스가 한 지붕 아래서 얼마나 자주 어긋나는지를.

윗집 부부 수경과 김선생


한 지붕 아래 살아도,

마음은 서로 다른 방에 머문다


영화의 중심에는 두 부부가 있다. 아랫집의 현수와 정아, 그리고 윗집의 김선생과 수경. 표면적으로는 이 둘의 대비가 꽤 단순해 보인다. 한쪽은 매일 밤 뜨거운 섹스로 층간소음을 유발하는 부부이고, 다른 한쪽은 그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부부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대비는 단지 성생활의 차이가 아니라 결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로 읽힌다.


김선생과 수경은 누가 보아도 금슬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관계가 단순히 “섹스를 많이 해서” 살아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중요한 건 그들이 서로를 아직도 다 파악된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히 놀랄 수 있고, 여전히 탐색할 수 있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을 남겨둔 채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에게 부부는 의무의 형태이기 전에, 아직도 약간은 흥미롭고 불안정한 놀이의 형식처럼 보인다. 반면 현수와 정아는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꽤 멀리 있다. 대화를 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중요한 말을 서로 피해 가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공간을 오가면서도 정작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호기심보다 체념이 많다. 특히 현수는 입봉조차 하지 못한 감독이라는 자의식과 생업의 좌절 속에 점점 위축되어 있다.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은 종종 관계 안에서 이상한 모양의 방어기제로 굳어진다. 자기 삶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돌볼 힘부터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니 이 부부는 연인이나 부부라기보다, 정서적으로는 이미 한참 전에 하우스 메이트 정도로 퇴행해버린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img.jpg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

결혼은 사랑보다 먼저

낯섦을 잃으며 무너진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빌이 무너지는 것은 아내의 외도 때문이 아니다. 앨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 하나의 고백, 자신도 모르는 욕망의 장면 하나가 그의 세계를 산산이 흔든다. 내가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상상과 충동을 품은 존재라는 사실. 사랑하는 배우자가 동시에 끝내 다 알 수 없는 타인이라는 사실. 그 발견이야말로 빌을 가장 깊이 불안하게 만든다.

'윗집 사람들'이 건드리는 것도 결국 비슷한 지점이다. 결혼은 배우자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친밀함 때문에 배우자를 더 이상 흥미로운 타인으로 보지 않게 만든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의 욕망과 결핍을 더는 궁금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관계는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무감각해진다.

정아가 현수의 허락도 없이 윗집 부부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잠복해 있던 관계의 결핍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층간소음이라는 민폐의 문제는 어느새 성적 개방성, 부부관계, 욕망과 판타지, 금기와 윤리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때 윗집 부부는 아랫집 부부의 삶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던 침묵과 건조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존재에 가깝다. 욕망은 여기서 위기의 시작이 아니라, 위기의 가시화다. 상대를 여전히 성적인 대상으로 볼 수 있는가. 상대의 욕망을 궁금해하는가. 혹은 그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귀찮고 불편해져버린 것은 아닌가. 사랑은 남아 있을 수 있다. 책임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욕망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종종 평온이 아니라 무기력한 휴전 상태다.


서로를 관계의 감옥에 가둬버린

부부라는 관계


'아이즈 와이드 셧'의 가면무도회 장면이 단순한 퇴폐의 박람회가 아니라, 결혼과 제도가 억눌러온 욕망이 익명성과 판타지 속에서 되살아나는 공간처럼 보였던 것처럼, '윗집 사람들' 속 스와핑과 그룹섹스의 암시 역시 단순한 자극의 소품으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형식이 끝내 다 수용하지 못한 질문, 즉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과 배우자의 욕망을 견디는 것은 같은 일인가를 슬쩍 꺼내놓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물론 어떤 부부에게 그런 개방성은 관계의 확장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부부에게는 균열을 더 빨리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결국 핵심은 행위의 형태가 아니라, 그 욕망을 두 사람이 어떤 신뢰와 어떤 윤리 속에서 다루고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현수와 정아가 내게 안타깝게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은 욕망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욕망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더 가까워 보인다. 생활의 피로, 자의식의 상처, 반복된 체념, 다시 관계를 건드렸다가 더 민망해질까 봐 차라리 모른 척하는 습관. 그런 것들이 쌓이면 부부는 서로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가 아니라, 가장 무감각한 동거인이 되기 쉽다. 욕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망을 입 밖에 꺼낼 언어가 먼저 마모되는 것이다.

high.jpg 아랫집 부부 현수와 정아


오래된 사랑은 낯섦이 남아 있을 때

다시 숨 쉰다

'윗집 사람들'을 보고 나면 영화의 아쉬운 완성도보다 영화가 건드린 질문이 더 오래 남는다. 결혼이라는 관계는 연인이자 가족, 친구이자 협력자, 생활 공동체의 운영자라는 수많은 역할을 한꺼번에 요구한다. 그러니 그 안에서 성적 긴장감이 가장 먼저 닳아 없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을 함께 보고, 너무 익숙한 리듬 속에서 오래 살다 보면, 설렘은 쉽게 생활의 먼지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 필연적으로 욕망의 무덤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오래 지속되는 관계일수록 서로를 완전히 다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 기술, 너무 익숙해진 사람을 다시 조금 낯선 사람으로 바라보는 노력, 생활의 표면 아래 묻힌 호기심과 긴장을 의식적으로 다시 건드려보는 태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랑이 관계를 시작하게 만든다면, 어쩌면 욕망에 대한 관심은 그 관계가 너무 빨리 죽지 않도록 붙들어두는 마지막 감각일 수 있다.


'윗집 사람들'은 그 불씨를 크게 태워 올리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디에서 불이 꺼져가고 있는지, 결혼이 무엇을 약속하고 또 무엇을 잃게 만드는지, 배우자를 사랑한다는 것과 배우자를 욕망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 자주 다른 문제로 갈라지는지에 대해서는 꽤 또렷하게 가리킨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제 몫을 다한 것인지 모른다. 결혼은 모든 결핍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함께 견디는 계약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계약이 너무 쉽게 무덤덤한 생활로만 굳어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사랑만이 아니라 욕망에 대해서도, 책임만이 아니라 낯섦에 대해서도, 여전히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낯설지 않을때, 불안해지는 부부관계의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