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리뷰 | 해준편
산과 바다, 꼿꼿함과 유연함 그리고 사랑과 의심 사이의 안갯 속에서
해결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완벽해지는 이야기
안개는 사물을 지워버리지 않는다.
다만 윤곽을 흐리고, 거리를 비틀고, 가까운 것을 문득 아득하게 만든다. 사랑도 꼭 그렇다.
해준은 서래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바라보지만, 끝내 누구보다 알지 못한다. 오래 들여다볼수록
오히려 더 단정할 수 없게 되는 것, 너무 가까이 다가간 탓에 도리어 가장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
사랑은 그렇게 이해를 깊게 하는 대신, 가장자리에서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한다.
서래의 말 역시 그렇다. 그것은 진술서의 문장처럼 건조하게 들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연애편지의 떨림처럼 젖어든다. 자백과 고백은 그녀의 입안에서 자꾸만 서로의 경계를 넘나 든다.
해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얼굴을 읽고, 그녀가 살아가는 시간을 오래 따라가지만, 끝내 그녀를
하나의 의미로 묶어두지 못한다. 서래는 설명되는 사람이라기보다, 자꾸만 다른 쪽으로 번져나가는
문장에 가깝다.
'헤어질 결심'에서 사랑은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의 마지막 문턱에서
자꾸만 발을 멈추게 하고, 확신 대신 유예를 남기고, 선명함 대신 흐릿한 떨림을 남기는 감정에 가깝다.
해준의 사랑은 바로 그런 안개의 형상을 하고 있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까운데, 막상 붙들려하면 조금 더 멀어지는 것. 끝내 사라지지는 않지만, 끝내 또렷해지지도 않는 것.
해준은 산을 닮아 있다.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쉽게 자기 윤곽을 무너뜨리지 않는 사람.
그의 수사는 단순히 범인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어지럽고 흐트러진 세계를 다시 질서의 자리로 돌려
놓는 일에 가깝다. 형사라는 직업은 그에게 생업이라기보다 거의 존재의 방식에 가깝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능력은 오랜 훈련을 통해 얻은 기술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떠받치고 있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는 세상을 의심함으로써 견디는 사람이고, 끝내 진실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기 삶의 중심을 세워온 사람이다.
해준은 서래를 의심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궁금해하게 된다. 그리고 궁금해한다는 것은 대개, 사랑이
마음속에 싹을 트는 방식과 닮아 있다. 그는 잠복하고, 지켜보고, 그녀가 살아가는 시간을
자신의 방 안으로 들여온다. 처음에는 수사였던 시선이,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을 마음속에 들이는
시선으로 바뀌는 것이다. 서래를 둘러싼 정황을 정리하던 손길은 점점 그녀라는 사람의 결을 더듬는 쪽
으로 향하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붙들었던 시간은 어느새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으로 변해간다.
서래에 대한 마음의 형태를 확신한 찰나, 그는 안개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한다.
그녀가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 그녀의 말이 어디서부터가 연기였던건지.
중요한 것은 그가 진실을 몰라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해준을 형사로써 완성케 하는 굳건하고 단단한 산과도 같았던
그의 신념과 정체성은 그날 무너졌다.
그는 완전히 붕괴되어버렸다.
사건을 끝내 해결해야 한다는 소명, 흐릿한 것을 또렷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부심,
진실을 끝내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 그는 바로 그 윤리의 골조 위에서 자신을 세워온
인간이다. 해준은 형사라는 자기 정체성 위에 단단히 기대어 사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서래를 사랑하게 된 순간, 그 문장은 처음으로 감정 앞에서 금이 간다. 마치 휘몰아치는 파도에 부딪혀
깨어 부서지는 돌산과도 같이.
해준은 기꺼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진실을 손에 쥐고도 그것을 끝내
진실의 돌탑 위로 올리지 못한 사람, 해결보다 미결을 택하는 사람이기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
내던 정체성을 무너뜨렸다. 그는 자기 삶을 떠받치고 있던 정체성,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고
밝혀내는 사람이라는 오래된 자기 확신으로부터 함께 이탈한다. 그러므로 그 결심은 이별의 결심인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을 감수하는 결심이기도 하다.
사랑은 그를 완성해내지 못한다. 오히려 더 이상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공백,
자기 자신에게조차 떳떳할 수 없게 된 내적 균열, 형해화된채 이름만 남은 형사라는 자부심, 그리고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고통만을 남긴다. 해준이 끝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서래를 잃었다는
상실만이 아니다. 그는 서래를 사랑함으로써, 더 이상 이전의 자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된
사람의 고요한 파멸까지 함께 떠안게 된다.
해준은 본래 진실을 향해 오르던 사람이었다. 흐릿한 것을 끝내 또렷하게 만들고,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의 결론으로 묶어내는 사람. 그러나 서래에게 사랑을 고함으로써 붕괴된 이후, 그는 진실의 봉우리
위로 올라갈 수 없게 된다. 그에게 서래는 체포해야 할 피의자라기보다, 끝내 다 알 수 없게 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예전의 해준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해준의 사랑은 누군가를 얻는 감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감정처럼 보인다. 그는 서래를 통해 사랑을 얻었다기보다, 평생 자신 안에 머물 안개 하나와, 그 안개 때문에
더는 봉합되지 않을 자기 정체성의 균열을 함께 떠안게 된다. 사랑은 그에게 충만이 아니라 결락의 형식
으로 남고, 완성이 아니라 회복 불가능한 틈으로 남는다.
사랑은 진실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끝내 그것을 덮어버리는 '안개'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해준은 그 안갯속에서 서래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잃어버린 사람으로 남는다.
진실을 가장 오래 응시하던 사람은, 결국 사랑 앞에서 가장 오래 길을 잃는다. 그것은 사건의 미결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한 인간의 존재를 천천히, 그리고 되돌릴 수 없게 허무는 일에 가깝다.
해준은 오래도록 서래가 남긴 안개 속을 헤맬 것이다. 안개는 바다가 잠시 다른 얼굴을 하고 떠오른
형상이고, 그 흐릿한 기후야말로 서래가 끝내 떠나지 못한 사랑의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