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결됨으로써 완결된
사랑의 문장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리뷰 | 서래편

by 파인
산과 바다, 꼿꼿함과 유연함 그리고 사랑과 의심 사이의 안갯 속에서
해결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완벽해지는 이야기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두 사람은 분명 같은 감정의 언저리에 닿아 있다.

그러나 끝내 같은 시간 안에서는 그 감정에 다다르지 못한다. 한 사람에게는 너무 이르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너무 늦다. 사랑은 있었지만, 그 사랑이 서로를 동시에 붙들어주는 순간은

끝내 오지 않는다.


해준이 사랑 때문에 스스로 삶의 질서를 무너뜨렸을 때, 서래는 비로소 사랑을 알아본다. 그리고 서래가

그 사랑을 자기 존재의 마지막 진실처럼 붙잡게 되었을 때, 해준은 이미 그녀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한 뒤다. 이 사랑이 비극적인 것은 서로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에 너무 정확하게

사랑해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은 분명 있었지만, 그 마음은 같은 시절에 서로를 붙들지 못한다. 사랑보다 먼저 조건이 둘을

갈라놓고, 그 조건보다 더 잔인하게 시간마저 둘을 어긋나게 만든다. 그러니 서래의 마지막 선택은 영원을

위한 연출이 아니라, 끝내 한 번도 포개지지 못한 사랑의 시간에 바치는 가장 깊은 응답처럼 보인다.

그녀는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었을 때 이미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알아버렸기 때문에 사라진다.

송서래

서래의 삶은 파도에 가깝다.


잠시도 제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자꾸만 흔들리고, 부딪히고, 끝내 어딘가에서 부서지는 쪽의 삶.

그녀가 지나온 시간에는 안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폭력이 있었고, 두려움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들며 오물을 뒤집어 쓴채 살아남기 위해 늘 한발 먼저 상황을 읽어야 하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니 서래는 애초부터 사랑을 평온한 일상의 언어로 배운 사람이 아니라, 불안과 긴장의 문법 속에서

익힌 사람처럼 보인다. 사랑은 그녀에게 쉼이기보다 늘 생존과 더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온 여자에게 해준은 특별하다. 그는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자기 직업에 대한

윤리와 자부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으며, 적어도 누군가를 함부로 상처 입히지 않는 사람. 서래가 해준에게 끌린 것은 단지 한 남자를 향한 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해준이라는 사람 안에서,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세계의

질서와 온기를 처음 본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파도 같은 삶을 견뎌온 사람이 처음으로 산 같은 사람을

알아보았을 때, 그 감정은 호감이라는 가벼운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게로, 아주 늦게

그러나 깊게 마음을 적셨을 것이다.


“해준씨처럼 바람직한 남자는 나랑 결혼해주지 않으니까.”


이 읊조림 안에는 자조가 있고, 체념이 있고, 너무 늦게 도착한 소망이 있다.

해준은 서래에게 단순히 사랑의 대상인 한 남자가 아니다. 그가 상징하는 것은 안정이고, 질서이고,

타인을 함부로 무너뜨리지 않는 삶의 태도다.


헤어질결심_19.jpg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진실


산이 진실을 드러내는 공간이라면, 바다는 진심을 회수할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바다 쪽의 사람이다. 선명하게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번지고 스미고 가라앉는 방식

으로만 자기 마음을 남기는 사람. 바다는 단지 무언가를 숨기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감춰진 것을

더 이상 누구의 것도 아니게 만드는 장소다. 핸드폰이 바다에 던져질 때, 그것은 단순한 증거의 폐기만이

아니라 기억의 침몰이기도 하다. 한 번 가라앉은 것은 다시 건져 올릴 수 없고, 건져 올린다 해도

이미 처음의 얼굴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에 서래 자신이 그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사랑이 감당될 수 있는 마지막 형식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처음부터 사라짐을 원한 여자가 아니다. 그러나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뒤에는,

곁에 남는 방식으로는 이 사랑을 더 이어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해준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바로 그 때문에 해준을 끝까지 무너뜨리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곁에 머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라진다. 하지만 그 사라짐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의 끝에서, 해준의 마음속에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사건으로 남기 위해 택한 마지막 방식이다.

곁에 남는 대신, 해준 안에서 오래도록 미결된 사건으로 남는 것. 그것이 서래가 마지막에 선택한 사랑의 형식이다. 바다는 그녀를 삼킨다기보다, 끝내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가장

깊은 자리처럼 보인다.

헤어질결심_48.jpg 서래의 헤어질 결심

미결로 완성된 사랑


서래의 이름을 통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운명을 볼 수 있다.

사랑과 죽음, 매혹과 파멸을 한 몸에 품은 존재. 실제로 그녀는 해준을 흔들고, 그의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끝내 그를 이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오래된 신화의 그림자를

닮아 있다. 그러나 서래를 단지 남자를 홀려 파멸시키는 여자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는, 그녀 자신 또한

끝내 그 사랑의 대가를 자기 몸으로 감당하기 때문이다. 세이렌이 바다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듯,

서래 역시 사랑의 마지막에서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그녀는 해준을 깊이로 끌어당기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 또한 그 깊이에 함께 잠기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서래는 세이렌의 이름을 빌린

악녀라기보다, 사랑의 끝에서 자기 자신까지 바다에 묻어버리는 비극적 변주에 가깝다.


서래는 해준의 곁에 남는 대신, 해준의 마음속에 미결된 사건으로 남기를 택한다.

영원히 체포되지 않은 피의자, 끝내 설명되지 않은 진심, 매듭지어지지 않은 사랑으로. 그렇게

그녀는 해준이 자신을 잊지 못하도록, 영영 잠들지 못한 채 오래 끙끙 앓으며 자신을 떠올리도록,

그의 삶 한가운데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 하나를 남긴다. 함께한 시간보다 해결되지 못한 부재가 더 길게 사람을 붙드는 법이 있다는 것을, 서래는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사라짐은 소멸이 아니라 잔류이고, 이별이 아니라 더 깊은 각인의 형식이 된다.

끝내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끝내 잊히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서래가 해준에게 남길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답고도 잔인한 사랑의 마지막 문장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