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피와 살을 파먹는
기생사회를 사는 우리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리뷰

by 파인
우리 모두 가슴에 수석을 끌어안자. 그리고 그것이 죽은 돌뿐임을 잊지말자


나는 '기생충'을 향한 그 세계적 열광이, 결국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찬사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대 전체를 향한 씁쓸한 자기인식처럼 느껴졌다. 너무 정확해서 허탈한 웃음이 난다. 그리고 너무 정확해서,

웃음이 잦아든 자리마다 곧바로 입안에 쓴맛이 번진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 작품 속에서 한국사회의 낯선

특수성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미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낯익고도 기형적인 균열을

알아본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순간, '기생충'은 한 편의 걸작을 넘어 지금 이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우아하고도 잔혹한 우화가 되었다.


이 영화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의 열기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약간 얼떨떨한 마음이 먼저 든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너무도 한국적인 공간과 공기, 그리고 계층의 감각을 품은 영화가 전 세계에서 이토록 뜨겁게 환호받는 장면은 분명 벅찬 일이었다. 그런데 그 벅참과는 별개로, 오래도록 서늘한 놀라움

또한 남았다.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한 것이 따뜻한 희망의 서사나 감동적인 극복담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곪아 있었으되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누구도 새삼 놀라지 않게 된 사회구조의 결함, 그리고

그 균열 위에서 어느새 거기에 적응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민혁에게 선물받은 수석

서로의 삶에 기대어 선 사람들


흔히 '기생충'은 가난한 가족이 부잣집에 침투해 그들의 삶에 기생하는 이야기로 요약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기택의 가족은 위조된 이력과 재빠른 눈치, 기막힌 팀플레이를 무기 삼아 박사장네

집 안으로 한 자리씩 스며든다. 과외 선생이 되고, 미술치료사가 되고,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의

자리까지 차례로 꿰찬다. 반지하에서 남의 와이파이를 빌려 쓰던 가족이 어느 날 갑자기 고급 주택의

동선과 냉장고, 식탁을 제집처럼 드나들게 되는 이 서사는 우습다. 통쾌하기까지 하다.


시선을 조금만 넓히면, 여기서 기생하는 것은 기택네 가족만이 아니다. 박사장네 또한 빈자의 노동과

돌봄, 감정노동과 보이지 않는 희생 위에서만 매끈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존중하는 척하고,

배려하는 척한다. 하지만 끝내 선을 긋고, 냄새를 구분하고, 자신들의 편안함이 누구의 불편과 소모 위에 세워져 있는지는 외면한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가면, 존재조차 몰랐던 지하의 인간 근세가 있다.


기택네는 영리하지만 비열하다. 박사장네는 순진하지만 잔인하다. 근세는 비참하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럽다. 누구도 완전히 무고하지 않다. 누구도 완전히 악마적이지도 않다. 대신 모두가 제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를 밀어내고, 누군가를 끝내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기생충'이 폭로하는 것은 특정 계층의 타락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기생사회 위에 세워져 있다는, 너무 정확해서 차라리 우화처럼 보이는 진실이다.

201905291011507161968_20190529101704_01.jpg 박사장네 과외선생으로 취업한 기우

냄새는 가난이 몸에 남긴 마지막 낙인이다


박사장네 가족이 기택네에게서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말도, 어설픈 연기도, 낮은 학력도 아니다. 그들이 끝내 참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너무 물질적이고, 너무 본능적이며, 그래서 더없이 모욕적인

어떤 냄새다. 지하철에서 문득 스쳐 오는 냄새. 반지하의 젖은 공기. 마르지 않은 빨래와 눅눅한 벽지에

오래 밴 냄새. 그것은 한 개인의 청결 상태가 아니라, 가난이라는 환경이 몸에까지 새겨놓은 계급의

낙인이다.


이 냄새가 잔인한 이유는, 그것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가난은 단지 돈이 없는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는 공간의 습도와 공기, 입는 옷의 결, 피부에 밴 체취, 몸을 둘러싼 감각 전체로 번져간다. 박사장이 “지하철 냄새”라고 말하는 순간, 그 모욕은 영화 속 기택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는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스크린 밖의 관객들을 향해 번져간다. 이 냄새는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의 결과인데, 구조의 책임은 지워지고 냄새를 지닌 몸만이 혐오의 대상으로 남는다. 바로 그때,

계급은 경제적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을 침범하는 감각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 모든 것이 폭우로 무너진 재난은 빈자들의 삶을 물에 잠기게 하고, 그 젖은 흔적은

다시 몸의 냄새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사장이 근세의 몸 아래 깔린 차 키를 집으려다

본능적으로 코를 막는 장면에서 그 냄새는 마침내 '살인의 도화선'이 된다. 기택을 폭발시키는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감각의 층위에서 짓밟혔다는 자각에 가깝다.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직접적이고 더 잔인하게 사람을 모욕한다. 봉준호는

그 보이지 않는 감각 하나로, 가난이 인간의 몸에 어떻게 낙인처럼 새겨지는지를 끔찍할 만큼

정확하게 보여준다.

image.jpg 연교에게 귓속말을 하는 박사장

같은 비 아래서도 두가족은 다른 결말에 놓인다.


'기생충'에서 비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리지만, 절대적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박사장네 가족에게

그날의 폭우는 그저 캠핑 일정을 접고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정도의 변수일 뿐이다. 비 때문에 계획이 조금 수정되고, 날씨가 개이면 다음 날 정원의 잔디는 오히려 더 선명한 초록으로 빛난다. 그러나

같은 비는 기택네 가족에게 삶의 바닥을 송두리째 뒤집어놓는 재난이 된다. 집은 물에 잠기고, 변기에서는 오물이 역류한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몰래 점유하던 부잣집의 거실과 식탁은 순식간에 꿈처럼 멀어진다.

같은 비가 내려도 누구는 계획을 수정하고, 누구는 삶을 수습해야 한다. 부자에게 세계는

변수가 생겨도 결국 회복 가능한 공간으로 남아 있지만, 빈자에게 세계는 작은 충격 하나에도 곧장 붕괴의

형상을 띤다. 해고도 그렇고, 질병도 그렇고, 날씨도 그렇다.


모든 일은 민혁이 기우에게 건네준 그 일자리와 함께 시작되고, 그 일자리에는 마치 부적처럼 '수석' 하나가 따라붙는다. 기우는 그 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자기 삶 역시 얼마든지 설계될 수 있다는 환상, 다시 말해 계획이라는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석이란 본래 인간의 계획으로 빚어진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무계획적인 시간과 기후, 물과 바람이

오랜 세월 깎아 만든 자연의 부산물이다. 그런 돌을 떼어다 눅눅한 반지하 방 안에 올려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삶의 도면이 되지는 않는다. 박사장네처럼 널찍한 거실 한가운데 놓일 법한 상징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그 상징이 곧 계층 상승의 약속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 돌은 그의 망상을 깨부수는 물건으로 되돌아온다. 잔인하다. 계획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애초부터 계획이 아니었고,

희망의 상징이라 여겼던 것이 끝내 폭력의 도구로 돌아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parasite-movie-003-03.jpg 계단을 오르는 연교, 뒤에는 연교를 따라 올라오는 기택이 있다.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우화


결국 '기생충'이 드러내는 것은 한 가족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생태처럼 굳어버린 사회의 구조다. 기택네 가족은 박사장네에 침투해 그들의 삶에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박사장네 역시

기택네 같은 이들의 노동과 희생, 그리고 끝내 이름 붙지 않는 감정노동 위에서만 매끈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존재조차 인식되지 못한 채 누군가를 숭배하며 살아가는 근세가 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끝내 우리 앞에 내놓는 질문은 “누가 기생충인가”가 아니다. 모두가 누군가의 삶 위에 기대어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두려워하고 경멸하며, 끝내 한 인간으로 마주 보지 못하는

세계가 이미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부자는 순진하면서도 잔인하고, 빈자는 처절하면서도 비열하다. 가장 아래에 있는 자는 비참하면서도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누구도 완전히 무고하지 않고, 누구도 완전히 악마적이지 않다. 대신 모두가

제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를 끝내 보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기생충'은 특정 계층을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라, 계급이라는 구조가 인간의 얼굴과 몸과 감각을

어떻게 서서히 뒤틀어놓는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된다. 집은 계급의 높낮이가 되고, 비는 불평등한

재난이 되며, 냄새는 존엄을 모욕하는 낙인이 된다.

parasite-movie-004-03.jpg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선배는 김진모 그는 니 사촌

한국사회를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반지하를 살아보지 않았더라도, 같은 비가 누구에게는 낭만이고

누군가에게는 파국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사람들은 박사장네 저택의 빛을 실제로 누려본 적이 없어도,

어떤 세계는 늘 밝고 건조하며 어떤 세계는 늘 눅눅하고 냄새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이해한다.

'기생충'은 계급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어떻게 집이 되고, 비가 되고, 냄새가 되어 사람의 몸과

삶에까지 새겨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국사회의 특수한 풍경을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세계 전체를 비추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서늘한 우화가 된다.


너무 정확해서 웃음이 난다. 그리고 너무 정확해서 웃고 난 뒤에는 곧바로 입안에 쓴맛이 돈다. '기생충'은 끝내 우리에게 누가 기생충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이미 서로의

삶에 기대어 살아가면서도, 끝내 서로를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세계에서,

과연 누가 누구를 숙주라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