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애드 아스트라' 영화 리뷰
공간적 발산함과 심리적 파고듬의 역설에서 유영하는 심연이라는 우주
아마도 십여 년 전인가 스스로 혼자가 되기를 자처했던 적이 있다. 매일같이 만나고 모임을 갖고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과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칩거했던 때가 있었다. 다툼의 원인은
나에게 있었고 그들로부터 나를 격리시키는 방식으로 갈등의 싹을 없애야겠다는 어리석은 생각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해 겨울을 쓸쓸하게 보내야 했고, 매미가 바삐 울 때쯤
좀 더 성숙한 친구들의 회유로 다시금 무리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외로움과 좀 더
친해져야 했다. 아니, 어쩌면 늘 외면하기만 했던 외로움을 직면하기로 했다.
외로움은 받아들일수록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 간다.
외로움은 그 자체를 거부할수록 더 날카롭고 짙게 파고든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극장에서 애드 아스트라를 보게 되었다. 주인공 로이의 모습에서
그 시절 외로움에 지쳐버렸던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애드 아스트라>는 같은 해에 수많은 화제를 낳고 영광을 주었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큰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다. 만약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과학적 고증과 관련하여 '그게 말이 되나?'라는
불만이 생긴다면, 이 영화는 애초에 그것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뿅뿅거리면서
외계 생물체와 전투를 벌이는 이야기도 아니고,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제안을 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없다.
도입부에서 성층권 가까이 있는 우주 정거장에서 일하던 로이(브래드 피트)가 우주 쓰레기의 피해로 인해
지구로 강하하는 장면은, 마치 자궁 속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되기 위해 난자로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듯하다. 이 거대한 공간을 인류의 지정학적 상징으로 해석하여,
우주는 아버지, 지구는 어머니라는 메타포로 볼 수 있다.
제목인 '애드 아스트라'는 라틴어로 번역해 보자면, '별을 향하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구를 중심축으로 두었을 때 주인공의 동선이 외부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야기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에게 향하는 아들의 이야기, 혹은 다시 태어나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러닝타임이 진행될수록 은하계에서 점점 외부로 향하게 된다. 극 중 해왕성
근처에 있는 아버지를 조우하기 위해, 로이는 지구에서 달로, 달에서 화성으로, 그리고
화성에서 태양계의 가장 외곽으로 점점 뻗어나간다. 자신의 보금자리인 집에서 가장 멀어져 가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치적 확장과는 반대로, 로이는 점점 본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진심에 가까이
다가간다.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오히려 자신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존재에게 다가감
으로써 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는 거대한 우주가 미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선사하는 모험보다는 인물 개인의 심리적 탐구에
세밀하게 반응한다. 우리는 외로움 혹은 불안으로부터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백년가약을 맺을 사람을 만나면 가능할까? 나를 똑 닮은 아이를 안았을 때 벗어날 수 있을까? 타인을 통해서 외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주 잠시뿐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인 외로움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있으며, 거기서 벗어나려 할수록 더 깊이 갇힐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외로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주인공인 로이(브래드 피트)는 자신의 심리 상태를 고르게 유지하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는 시스템에
속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심리를 늘 감추고 덮어버리기를 반복한다. 유년기에 이미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자랐고, 현재는 아내와도 결별한 로이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외면한다. 그러다가 이야기의 진행과 함께 자신의 진심과 직면하게 된 이후부터는 그 감정과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떠오르는 대목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불안은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조건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로이는 스스로 마음의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늘 제한적인 루틴을 유지한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며, 실존적 자아를 직면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스스로 불안과 혼돈 속으로
몸을 던지게 된다. 아니 뛰어 든다는 표현이 좀더 맞을듯 하다. 누구나 불안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것이 기본적인 욕망이지만, 자아를 직면하고자 하는 결정은 좀 더 고차원적인 욕망에 다다르는 결정이다. 아마도 나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는 시발점일것이다.
우리는 우주여행과 함께 자신의 심리를 탐구하는 로이를 보며,‘외로움을 직면하는 태도’를 목도하게 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쓸쓸함의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다. 우주 여객기를 탑승하는 모습이 그렇고,
20년만에 조우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다. 운명의 끝자락에서 신앞에 홀로 남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쓸쓸함 혹은 외로움의 감정이 오롯이 온몸으로 전달된 것도 아마도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막스 리히터가 그려주는 신디사이저의 장엄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끌려가는 쓸쓸한
표정의 로이의 모습을 가까이 혹은 멀리서 그려주는 듯 하다.
아쉽게도 흥행적인 부분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아마도 흔히 대중이 원하는 모험과 액션이 가득 찬
SF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제임스 그레이가 구축한 영화 세계관에서 중요한
지점에 머물러 있다. 이전의 작품들은 좀 더 현실에 발을 디딘 채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이 작품으로 공상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세계를 이끌어 내기를 바라보며,
영화 보는 내내 떠올랐던 키에르케고르의 핵심 메시지로 맺음 해보려 한다.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를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