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장막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붉은 서약

에메럴드 펜넬 감독의 '폭풍의 언덕' 영화 리뷰

by 파인
욕망은 결코 순수한다. 그것은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순수성을 증명해낸다.


어떤 사랑은 그것이 끝나버린 이후에도 그 감정의 잔열이 감촉의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폭풍의 언덕>은 원작 소설이 남긴 문학적 감정선을 마음의 빈자리가 아닌 생체적 감각으로

대물림 하는듯 하다. 고전이 지닌 깊이감 문학적인 대사와 뿌리 깊은 감정선 이 영화적 전환을 이루어내며,이미지로의 치환이 아닌 공감각적 경험으로 업그레이드 된 감각을 선명하게 남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서사의 골격보다도, 그 골격을 휘감는 '욕망의 결'을 면밀하게 더듬는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낭만의 영역을 넘어서,

넘치는 욕망으로 증오의 씨앗이 되고,

끝끝내 사람을 파괴하고 다시 태우는 힘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내달린다.


사랑은 언어로써 포착되고

욕망으로 증명되며,

상징으로써 죽음을 닮아간다.


이 작품이 집중하는 핵심은 '모든 일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원작을 해석하는 하나의 단서를,

그 근원을 파헤치는 것으로 되살리는 데 있다. 고전이 품은 대사들은 사랑의 정서를 언어로 조각해

보여주고, 영화는 그 사랑을 시각적 언어로 때로는 육체적 사랑의 기호로 번역한다.

성적인 은유가 노골적일 만큼 자주 등장하지만, 그 노골함이 싸구려 자극으로 떨어지기보다는,

욕망이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할 때가 많다.


성인이 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아래층 헛간에서 새어나오는 욕망의 빛을 훔쳐보며

서로의 몸을 포갠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더 이상 ‘감정’만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다.

밀가루 반죽을 빗는 손의 모양 같은 일상의 동작이 은유로 번쩍이고,

캐서린의 방과 집을 꾸미는 방식 벽면의 자재는 주근깨를 떠올리게 하고, 바닥의 붉은 도장이

감각의 흔적처럼 박히는 순간들 은 욕망이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장식의 요소로써 정착된다.


욕망은 결코 순수하다.

그것은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순수성을 증명해낸다.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가 복수를 위해 제안하는 가학적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이사벨라라는 인물이 얼마나 투명한 존재임을 드러내게 된다.


이곳에서 욕망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모든 사건의 동력으로 작동된다.

style.jpg


영화 속 붉은색은 사랑의 증거이자,

사랑이 치르는 대가의 색이다.


시작과 함께 암전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와 목조 프레임의 삐걱대는 소리는

자연스럽게 남녀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연상케한다.

낯부끄러울수 있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그것이 죽어가는 사형수의 찰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느끼는 배덕감은 오묘한 경험일수 있다.


캐서린을 둘러싼 붉은 빛깔은 상징들의 연결성에서 완성된다.

캐서린의 사랑과 색욕은 붉은색으로 은유되고, 빨간 드레스라는 장식의 형태에서 끝끝내 유산과 폐혈증

으로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으로 엄청난 양의 출혈로써 맺음한다.

영화 내에서 피는 붉은색으로 성적인 의미를 품는 동시에, 죽음의 표식이기도 하다.


"캐서린 - 사랑 - 색욕 - 붉은색 - 피 - 죽음"


영화는 상식적으로 무리한 이음새로 보일 수 있는 키워드들을 연쇄적으로 엮어낸다.


후반부, 이들을 둘러싼 금기를 어기고 욕망에 충실해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죽음의 운명을 향해 질주해간다.

사랑이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하고, 비극을 불러온 셈이다.

결국 사랑이 완성되며 죽음이 실행되었다.


학대를 당한 어린 히스클리프의 상처에서 나온 붉은 피가 흰 옷에 번지는 장면처럼,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처럼 영원한 존재로 남는다.

대비가 선명한 이미지가 욕망의 '영원성'을 각인한다는 점이다. 그 순간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추억’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는다.


사랑이란 결국,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기술이라는 듯이.

news-p.v1.20260209.0e5c24c9fc9c474a85dda88ad1d5b0a2_P1.jpg


에메럴드 펜넬의 프레임 안에서

원초적인 재료들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조형해낸다.


이 영화의 미덕은 과장된 CG나 판타지적 장면의 완벽함이 아니라,

조금은 어긋나더라도 세트 디자인·코스튬·미장센 만으로 세계관을 완성해낸다는 점에 있다.

감독은 특별한 기술보다는 빛의 방향, 색의 온도, 질감의 촘촘함 같은 영화적 기교들을 통해

인물들의 내면과 상징을 대신 말한다. 특히 빛은 단순한 분위기가 아니라 감정의 문법으로 작동한다.


절망을 어둠으로, 희망을 환함으로 ‘대충’ 나누는게 아니라, 희망 안에서 빛은 위태롭게 떨리게 만들고,

절망 속에서도 어떠한 욕망이 번들거리게 만든다. 더불어 공간은 감정의 장치가 된다.

‘폭풍의 언덕’이라 명명된 집은 안개로 빛이 막히고, 특히 히스클리프가 머무는 거처는 더욱 깊은 곳에서

빛을 차단한다. 그는 침대 아래,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시작하여 캐서린과 함께할 때만,

침대 위의 빛이 허락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랑이 그에게 ‘구원’이 아니라‘단 한 번의 채광’처럼 주어지는 셈이다.


196437_200673_2934.jpg


각색 과정에서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가 삭제되고,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가 히스클리프와 대립하는

인물로써 대체된 설정은 빛의 유무가 절망과 희망을 경계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낮에는 멀쩡한 얼굴로 히스클리프의 구원자이자 “좋은 사람”처럼 보이다가, 밤이 되면 술에 잠식되어

모든 이를 몰락시키는 그 아버지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인물 하나에 압축시킨다.


집 안의 밤이 곧 폭력의 시간대가 되는 구조는, 이 영화가 빛을 단지 아름다움이 아니라

윤리의 경계선으로도 사용한다는 증거다. 결과적으로 '고전'이라는 제약은 이 영화에서는 기회가 된다.

수많은 독자들이 각자 머릿속에서 구축해 온 고전의 무대를, 영화는 그 무대를 존중하되,

시대적 배경의 한계를 미장센의 기지로 넘어선다.


상상력을 이기는 방법은 더 화려한 상상력이 아니라,

더 정확하고 날카로운 감각의 포착이 되는 순간이다.


배우들의 얼굴 속에 감독의 의도가 각인되어 있다.


캐스팅 역시 이 작품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마고 로비와 제이콥 엘로디 같은 배우들이 풍기는

퇴폐미 직관적인 성적 긴장감을 단숨에 형성하는 얼굴 는 이 영화가 시각화하려는

성적 은유의 세계에 최적화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 ‘눈빛만으로도 분위기를 완성하는’ 배우들이고,

그 선택이 영화의 핵심 주제(욕망의 밀도)를 강화한다.


다만 초반부에는 그 선택이 역으로 몰입을 방해하는 순간도 있었다. 두 배우가 동년배 연인으로

설정되는 지점이 완전히 설득되지는 않았고, 홍차우와 마고 로비가 친구로 등장하는 관계 설정 역시

초입의 감정 이입에 작은 균열을 냈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 이후 상징과 빛의 언어로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면, 그 균열은 “캐스팅의 현실감”보다 “영화의 의도”에 의해 어느 정도 덮인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보다 욕망의 양식화를 택한 영화니까.


52a360f5-bbab-4e23-961b-e2d1921c4650.jpg


<폭풍의 언덕>의 사랑이 만든 세계는 어둡고, 습하며 볕이 잘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인물들은 사랑을 하며, 스스로 발광하여 빛은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오고,

붉은색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퍼져나온다.


배우의 눈빛과 화면의 습기가 고전의 문장 위에 새 살처럼 붙는다.

대사의 깊고 진한 응어리가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땀냄새와 살이 맞부딪치며 내는 '철썩'대는 소리를 통해 육체적 사랑을 드러내며,

그 둘을 한 덩어리의 운명으로 묶어내는 솜씨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욕망은 결코 순수하다.

그것은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순수성을 증명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