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예술로 번역되는 순간

클로이 자오 감독의 '햄넷' 리뷰

by 파인
우리는 왜 비극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왜 슬픔을 무대 위에 올리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는가


상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상실은 마치 먼지처럼 공기 속을 부유하다가 어느샌가 옷깃에 묻어 우리를 주저앉게 한다.

거역할 수 없는 상실의 무게로 주저앉은 이들은 각각의 지옥을 걷게 된다.


'햄넷'은 바로 그 상실의 지옥을 걸었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누구나 알고있는 극작가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건져 올린다. 그의 슬픔이

어떻게 햄릿이라는 위대한 작품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인간으로써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아름다운 형태로 세상에 내어놓았던

내밀한 이야기로 들어가게 된다.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 하는 전령 혹은

상실의 지옥을 다녀온 여행자


'햄넷'은 상실로 인한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이 만들어내는 지옥 같은 현실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망한다. 감독은 처음부터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복선을 꾸준히 던진다. 윌이 아녜스에게

이름을 묻는 장면에서, 아녜스는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 고 한다. 그리고 윌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꺼낸다. 아내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저승까지 쫓아갔지만 끝내 데려오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 '구해낸 줄 알았던 것을 다시 잃는 운명'

윌과 아녜스의 첫만남

아녜스가 조련하던 매가 죽어서 땅에 묻히는 장면, 햄넷의 시선에 끝에 있는 검은 홀,

조련하던 매의 죽음, 햄넷의 눈앞을 스치는 숲 속 검은 구덩이,

그리고 쌍둥이의 탄생에서 주디스를 아녜스의 지혜로 살려내는 순간까지.

한 번 죽음을 속였던 생은, 결국 다시 죽음과 마주한다. 그리고 주디스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햄넷이

그녀 대신 죽음의 자리를 채울 때, 영화는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16세기 한 가족의 운명으로

완전히 겹쳐놓는다. 햄넷은, 죽음의 운명에서 구해낸 에우리디케를 다시 잃어버리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다. 다만 극을 통해 저승에 내려가는 대신 살아남은 자들이 지상에서

저승 같은 시간을 통과한다.


감독은 예정된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천천히, 집요하게 쌓아올린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죽었는가'가 아니라, '남은자들은 그 죽음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잉태하는 공간이자

죽음으로 돌아가는 공간


영화는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의 세상을 그대로 스크린 위에 영사한다.

물과 풀과 빛이 뒤섞인 그 그림의 색감, 아름다움과 죽음이 공존하는 미학의 언어를 화면 위로 옮겨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자연은 이 영화의 세계관 그 자체다.

아녜스의 어머니는 어느 날 숲에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아녜스는 숲을 사랑하고, 숲의 논리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녀가 첫 아이를 낳는 장면 -바람이 요동치는 숲속, 나무뿌리의 밑둥 사이에 누워 생명을 밀어내는 그 구도- 에서 아녜스 자신은 마치 대지의 자궁 속에 안긴 태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Sir_John_Everett_Millais_003.jpg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인간은 자연이 잉태한 자식이며, 죽음은 귀환이다. 클로이 자오는 '테렌스 맬릭'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그 명제를 계승하여, 이 영화의 뼈대 안에 고요히 녹아 있다.

햄넷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영화는 그에게 무대를 선물한다.

햄릿이라는 인물로 다시 태어난 햄넷은,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숲처럼 꾸며진 무대 장치 안으로

사라진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사와 조명과 목재 무대가 뒤섞인 그 공간은, 윌이 아들을 위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추도비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거야.


햄넷의 죽음 이후, 영화는 같은 상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감내하는 두 사람을 나란히 놓는다.

아녜스는 즉각적이고 격렬하다. 그녀의 슬픔은 파도처럼 밀어닥쳐 모든 것을 휩쓴다.

감정의 칼날이 자신을 향하다가, 어느 순간 윌에게 들이댄다. 그것은 너무 크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갈 곳을 잃고 솟구치는 방식이다. 윌은 다르다. 그는 천천히, 깊은 곳에서부터 물이 든다.

그는 무력해지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애도한다.

윌은 햄넷을 ‘햄릿’의 극본 안에 인물로 세워, 무대에서 칼을 휘두르며 복수하는 존재로

영원히 살아남게 한다. 그리고 아녜스에게, 그 연극은 또 다른 떠나보냄의 의식이 된다.

극 안에서 햄넷 혹은 햄릿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결국 숲처럼 보이는 무대장치 안으로 사라진다.

햄넷의 사후가 어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녜스는 공연장에서 무대 위의 햄릿을 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다시 만난다.

그 순간, 두 개의 슬픔은 비로소 하나의 언어를 찾는다.

img1.daumcdn.png 햄넷, 수재나, 주디스


비극은 상처를 낫게 하지 않는다.

대신 상처를 가진 채 숨 쉬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왜 비극을 사랑할까.

'햄넷'의 대답은 단순하고 깊다. 비극은 우리가 혼자서 감당하던 상실의 슬픔을, 어둠 속에서 함께 꺼내어 공명하는 의식이다. 무대 위의 햄릿이 죽을 때, 우리는 우리 각자의 '햄넷'을 함께 애도한다.

이름은 다르지만, 슬픔의 모양은 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녜스의 눈빛이 무언가를 놓아주는 순간, 관객도 함께 무언가를 놓아준다.

그것이 무엇인지 각자는 다르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해방의 감각은 동일하다. 비극은 이렇게

기능한다. 아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채기가 난 그 상태로 함께 숨 쉬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아들을 잃고 햄릿을 썼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그 이야기를 읽고 보고 울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제각각의 상실을 거기서 만났다. 예술의 가장 오래된 기적은 바로 이것이다.

개인의 슬픔이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의 언어가 되는 것.

img1.daumcdn-1.png 무대 위의 햄릿의 손을 잡아주는 관객들

"우리는 왜 비극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왜 슬픔을 무대 위에 올리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함께 바라보는가"


비극은 상실이라는 지옥에 빠진 이들을 구원해낸다. 오르페우스는 끝끝내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지옥에서 구해내오지 못했으나, 비극은 상실의 지옥에 빠진 이들을 다시금 현실의 땅위로 돌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