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영화 리뷰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고 이별하며, 로맨스의 잔해들을 남긴다.
어떤 이별에는 물을 잔뜩 머금은 수초처럼 눈물을 쏟아낸다.
또 어떤 이별에는 강철처럼 냉담해지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그러한 감정조차 남지 않아 말라 비틀어진 상태로 이별을 고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떠한 이별이든 늘 마음에 멍을 남긴다. 상대가 남겼던 물리적, 비물리적 흔적들이 마음속에
애잔한 진동을 만들어낸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는 그 진동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영화의 제목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mind'는 알렉산더 포프의 18세기 시
'엘로이자가 아벨라드로에게'에서 빌려온 구절이다. 이 제목은 흔히 '맑은 하늘의 아름다운 햇살' 같은
힐링의 메시지로 해석되곤 하는데 그것은 오독이다. 포프의 시에서 엘로이자는 기억의 고통으로
부터 자유로운, 한 번도 깊게 사랑해서 망가져본 적 없는 그런 순진한 영혼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알고 있다. "나는 이미 그 단계는 지나와버렸다"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깨끗한 마음'은 축복이 아니라 사랑을 했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그리움, 그리고 더이상 상대를 사랑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원망, 즉 사랑을 했기 때문에 겪어내야 하는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는 조엘의 기억 속에서 펼쳐진다. 그가 기억을 지워가면서 자신의 뇌 속에서 클레멘타인이
하나둘 흐릿해지는 장면들을 따라가며, 우리는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들을 역순으로 마주하게 된다.
함께했던 기억들이 사라질수록 추억이 지워질수록 되려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만이
더욱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헤어지는 순간의 상처와 분노가, 그 뒤로는 함께 싸우던 모습들이, 그리고 마침내 가장 순수한 사랑에 빠져있던 초반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시간여행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사랑이 얼마나 취약한지, 동시에 얼마나 강인한지를 보여주는 여정이다. 기억에
기대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다.
영화의 진정한 깊이는 '기억의 삭제'라는 설정에 담겨 있다. 라쿠나 회사는 좋지 않은 기억뿐만 아니라,
함께했던 좋은 시간들까지도 모두 삭제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라는 역사의 기록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것은 사랑이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이성적 판단이나 과거의 추억 위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두 존재 사이의 화학적 끌림, 몸과 영혼 차원의 인식 같은 것이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한 편의 기묘한 실험처럼 느껴진다. '기억을 지워주는 라쿠나 회사'라는
가상의 기술이 현실처럼 펼쳐지고, 그 속에서 사랑의 근본적인 속성이 어떤것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기억의 소거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감정과 본능만으로도 두 사람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초이성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힘임을 드러낸다.
"분명 또 싸우고 또 상처 줄 거야."
클레멘타인이 미안함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조엘이 대답한다.
"그래도 해보자."
이 짧은 대화 속에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옅볼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약속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통도 함께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사람의 곁에 머물기로 하는 결단이다. 사랑하는 사이로 산다는 것, 그것은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래도 해보기로 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냥 그 사람이 곁에 있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자유분방하고 감정의 진폭이 크다. 반면 조엘은 차분하고 소심하며, 자신의 내면으로
자꾸만 물러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향만큼이나 서로가 싫어하는 지점 또한 분명하다.
싸움도 잦고, 이야기의 출발점에서 제시되는 헤어지기 직전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꽤나 날카로운 말들을 남긴다. 연애가 오래 지속되면 사랑은 때때로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감정이 아니라, 상대의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찌르는 기술로 변질되곤 한다. 영화는 그렇게 연인 사이의
가장 현실적이고도 처연한 관계의 생살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분명 '사랑하는 사이'다.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은 단지 서로를 좋아한다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서로 받아들이고, 또 공유하는 대상이라는 뜻에 가깝다.
함께한 모든 순간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사건의 바닥에는 끈끈한 정서가 깔려 있다. 이들에게 애정과 애증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관계는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서로에게 꼭 필요한 방식의 결속처럼 보인다. 그것은 각자가 지닌 결핍이 다른 결핍과
맞물릴 때 생겨나는 불가해한 접합이다. 영화는 그 울퉁불퉁하고 어딘가 못생긴 접합을 낭만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끝까지 사랑의 실제 모습으로 남겨둔다.
<이터널 선샤인>은 우리를 연애의 가장 풋풋하고 찬란한 순간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보기
싫은 장면, 서로 싸우고, 험한 말을 내뱉고, 지저분하게 헤어지던 바로 그 순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엉망이 된 관계의 마지막 지점에서 출발해, 가장 순수하게 사랑에 빠졌던 시간 속으로
천천히 되감긴다. 그래서 우리는 둘의 지긋지긋했던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며, 동시에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았던 장면들, 각자의 결핍을 어루만져 주던 기억들을 차례로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주고
받았던 날 선 대화들은 어쩌면 서로를 너무 강하게 원했기 때문에 생겨난 또 다른 형태의 몸부림
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었기에, 때로는 누구보다 거세게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엔딩 크레딧에서 반복되는 몬탁 해변의 풍경, 눈이 켜켜이 내려앉은 들판 위를 두 사람이 뛰노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 장면의 반복은 단순한 여운이 아니라, 이들의 인연이 하나의 직선이
아니라는 암시처럼 보인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은 결별과 기억 삭제, 그리고 재회 아닌 재회를 지나 다시 사랑하고, 다시 상처 입고, 다시 잊고, 다시 마주치는 식으로 되풀이된다. 결국 그들은 사귀고,
헤어지고, 지우고, 다시 만난다. 영화는 이 루프가 단지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과거에도 여러 번 반복되었을 가능성을 조용히 내비친다.
사랑이란 어쩌면 단 한 번의 운명적인 완성이 아니라, 같은 상처와 같은 끌림을 품은 채
몇 번이고 서로에게 돌아가게 되는 이상한 반복인지도 모른다.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는 ‘깨끗한 마음은 늘 맑다’ 같은 위로가 아니다.
그 문장에는 오히려 한 번도 깊이 사랑한 끝에 스스로가 망가져본 적 없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온을 향한 질투가 스며 있다. 동시에, 나는 이미 그 순진한 평온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는 자기인식 또한 배어 있다. 그리고 그 내밀한 감정을 이입해보면 사랑의 감정을 완성케 하는데에는
감정적 고통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가 이 문장을 제목으로 가져온 건 단지 멋있어서가 아니다. 실연 후 기억 삭제라는
설정 자체가, 그 문장이 던진 질문을 현대적으로 다시 실험하는 셈이다.
지워버리면 편해질까? 편해진다면, 그건 나를 덜어낸 대가가 아닐까?
이 영화는 결국 “망각의 유혹”을 찬양하지 않는다. 대신 그 유혹이 얼마나 이해 가능하고,
동시에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몬탁의 눈은 모든 흔적을 덮는다. 그런데 그 눈 위에 또 다른 발자국이 찍힌다.
지워도 남는 것들.
그게 사랑이고, 그게 우리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고 이별하며, 로맨스의 잔해들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