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 = 타이밍 x 기술 o, 선택의 메커니즘 2/3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주식 관련 커뮤니티에서 밈(Meme)으로 유행했던 문구입니다. 갑자기 주식 시장 전체가 호재로 급등하면 등장하는 밈이 하나 더 있습니다. - "지금이니!??"
한때, 하루의 무료함을 달래보고자, '오늘 느낌이 좋다'는 허무맹랑한 직감 하나로 사치스러운 놀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용돈으로 즐기는(?) 주식 단기 투자였지요. 오전에 사서 점심에 팔아 수익을 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주말에 접했던 경제 뉴스 키워드, 유튜브 시사 채널, 친구들과의 단톡방 대화들을 머릿속에서 버무리며 매수 버튼을 눌렀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은 수익도 나고 매우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뻔했습니다. 가끔 급락하는 차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손해를 막고자 다급히 팔아버린(손절매)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까요. 나중에야 워런 버핏의 가치 투자를 알게 되어 "일희일비하지 않고 거시적으로 바라봐야 수익이 난다"는 걸 배웠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건 인내하지 못한 자, 혹은 판단이 결여된 투자 아닌 투기의 전형적인 실패였습니다. 네, 저는 전혀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신중하다'는 말의 의미는 '진지하게 바라보고 조심히 다룬다'일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조심히 다룸'을 ‘판단과 선택 사이의 기다림’이라고 보고, 이것을 유예(Suspension)라고 부르려 합니다.
사실, '신중함'을 물리적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판단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이고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보니, 결국 판단을 유보한다기 보다는 먼저 판단해두고 나서 잠시 기다리는 것, 숙성의 시간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오늘은 "선택"하는 시점을 잘게 쪼개어, 왜 우리는 자꾸 너무 이른 선택을 해버리는지, 그리고 그 사이에 ‘유예’가 들어가면 무엇이 달라지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결정을 미루는 것을 우유부단함이나 회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중함을 위한 유예는 조금 다릅니다. 영어 단어 'Suspension'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 차이가 명확해집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Suspendere'에서 왔는데, 그 뜻은 '매달다(Hang)'입니다. 바닥에 내려놓는 포기도 아니고, 쫓기듯 던져버리는 충동도 아닙니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과녁이 가장 또렷해질 때까지 공중에 '매달아 놓는' 상태입니다. 물론 실생활에서는 자동차의 바퀴 축이 차량에 매달려 충격을 흡수해 주는 중요한 구조물로 더 친숙하겠지만요.
즉, 유예는 가장 에너지가 응축된 능동적인 멈춤입니다. 주식 창을 보고 매도 버튼에 손을 올린 그 순간, "지금 팔까?"라는 충동을 잠시 공중에 매달아 두는 힘. 그것이 바로 기술로서의 유예입니다.
머리로는 "조금만 더 지켜보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은 이미 매도 버튼을 누르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 짧은 유예를 견디지 못할까요? 뇌과학과 심리학은 이것을 '에너지 효율'과 '불안'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멈추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가 듭니다.
뇌과학은 이것을 '반응 억제(Response Inhibition)'의 실패로 설명합니다. 우리 뇌에는 행동을 촉발하는 'Go 회로'와 행동을 멈추는 'No-Go 회로'가 있습니다. 우리 뇌가 행동을 저지르는 건 내리막길을 구르는 돌처럼 쉽습니다. 반면, 하던 행동을 멈추는 건 전두엽의 '우측 하전두회'라는 브레이크 시스템이 막대한 에너지를 태우며 개입해야 하는 고된 작업입니다. 우리가 급하게 선택하는 건, 뇌가 스스로 편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뇌가 에너지 태운다?' - 뇌세포인 뉴런이 서로 전기적 신호를 주고받을 때 혈액 속의 포도당과 산소를 소모하여 ATP라는 연료를 생성하며 소모합니다. 결국 생각을 많이 하거나, 충동을 억제할 때 우리 몸에 에너지 소모량이 증가합니다. 그래서 달콤한 무언가(포도당 보충)에 자꾸 손이 가고, 하품도 나오고 하는 것이겠지요. 하품은 산소 보충을 예상했지만, 최신 연구에 따르면 뇌 자체를 찬공기로 냉각시키려는 경향이라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기획자이다 보니, 가끔 마감 시한이 다가오면 부스터가 필요합니다. 입에 물고 녹이면서 당분을 채워주는 작은 크기의 초콜릿이나, 새콤한 과일맛이 나는 사탕이 말로만 응원해주는 동료보다 소중합니다. 몇 년째 같이 일하는 팀원은 제가 바쁠 때면 어김없이 책상 위에 올려주더군요.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개인차는 조금씩 있겠지만요.
둘째, 미결(未決)의 상태가 주는 공포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아리에 크루글란스키는 인간에게 '인지적 종결 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불확실한 상태는 뇌에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뇌는 결과가 손해일지라도 빨리 상황을 끝내고(Closure) 편해지려는 '절박함'을 발동시킵니다. "손절매는 돈을 잃는 것보다 '모르는 상태'를 견디는 게 더 괴롭기 때문에 일어나는 심리적 도피일 수 있습니다. 뇌가 가장 싫어하는 건 '나쁜 결과'보다 '알 수 없는 불확실함' 그 자체니까요."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연구팀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50% 확률로 나중에 전기 충격 받기'와 '지금 당장 확실하게 강한 전기 충격 받기'를 제안했더니,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당장 맞고 끝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소위, '지르고 본다.', '포기하면 편해.' 이런 일들 역시 뇌의 사고 과정에서의 피로감에 의한 "합리적" 반응이거나 불안함을 덜어내기 위한 판단들의 단면일 수 있습니다. 유예하며 신중함을 최대로 유지하다가 자신들만의 적절한 어딘가에서 타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지요. 저도 오늘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은 적절한 수준으로만 내려놓고 퇴근해서 여기에 적는 중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사상을 자신의 저서에서 몇 번 언급하였습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선택과 자유가 있다."
자극은 '상황, 사건, 감정'을 의미하고, 반응은 '행동, 말, 태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 즉 우리의 '의식' 속에 선택과 자유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동물은 자극이 오면 바로 반응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위협하면 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이에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화가 난다고 바로 소리 지르지 않고, 주식이 떨어진다고 바로 팔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연습해야 할 '유예'는 바로 이 공간을 넓히는 작업입니다.
공간이 넓어질수록, 그 안에 우리의 분별과 품격이 들어설 자리가 생기니까요. 물론 경험이 쌓이고 인생의 선배님들을 뵐 때 느껴지는 느긋한 연륜의 힘처럼 자연스럽게 커지기도 하는 그것이지요. 하지만 즉각적인 판단을 부추기고, 빠름을 능력처럼 선호하는 현대 사회가 놓치고 있는 맹점이 아닐까 합니다.
이론적 기초를 정리했으니, 실천하는 지혜를 위한 훈련법도 찾아왔습니다.
선택의 내용(What)을 고민하기 전에, 선택의 속도(When)를 늦추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다음의 방법들로 급발진하는 뇌에 브레이크를 걸게 된다면 신중함이 가까워질 것입니다.
① 물리적 차단 (로그아웃)
의지력은 생각보다 약합니다. 가장 확실한 유예는 자극원으로부터 나를 물리적으로 격리하는 것입니다.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창 닫기', 분노의 카톡을 쓰다가 전송 버튼 누르기 전에 '홈 화면으로 나가기', 주식 창이 파랗게 질리면 '어플 끄고 산책 나가기'. 단 10분의 물리적 격리가 뇌의 열기를 식힙니다.
② 3-3-3 호흡법 (생물학적 브레이크)
급한 결정의 순간, 뇌는 비상사태로 인식하고 교감신경을 흥분시킵니다. 이때 의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면 뇌를 속일 수 있습니다. '3초 들이마시고, 3초 멈추고, 3초 내뱉기.'이 짧은 호흡만으로도 편도체의 경보가 꺼지고, 이성이 돌아올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③ '물음표(?)' 상태 유지하기
우리는 빨리 결론(마침표)을 내리고 싶어 합니다. 이때 의식적으로 판단을 보류해 봅니다. "지금 사야 해!"라는 생각이 들면 "오늘 안 사면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고 질문을 바꿉니다. 답을 내리지 않고 물음표 상태로 견디는 것, 그 자체가 유예의 근력입니다.
다시 그 시절의 주식 투자로 돌아가 봅니다. 만약 그때 제가 '유예'라는 기술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급락하는 차트를 보며 공포에 질려 매도 버튼을 누르는 대신, 잠시 차트 창을 끄고 산책을 나갔다면요. 아마 그 '공간' 사이로 기업의 가치나 시장의 흐름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신중함은 느린 것이 아닙니다. 판단과 선택 사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의 긴장을 견뎌내는 힘입니다. 그 찰나의 멈춤이, 반응만 하는 태도에서 선택도 하는 태도로 바꿔줄 수 있습니다.
'지금이니!?'라고 떠올리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할 때' 잠시 멈추는 여유가 삶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아요를 누르시기 전에 혹시 멈칫하셨나요? 에너지를 소모하고 계신 겁니다. 전반적으로 무해한 선택이니, 여기서는 실행으로 옮기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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