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복원, 뒤늦은 재인식의 예술
요즘은 「장송의 프리렌」 이라는 만화 원작 기반의 판타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습니다.
2024년에 이미 한 번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지만, 그때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2기가 시작되면서, 뒤늦게 이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이 대체로 그렇듯, 이 작품도 서사와 설정의 개성이 아주 뛰어납니다.
보통 판타지 모험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용사와 동료들이 함께 여정을 떠나고, 수많은 역경을 넘으며 성장한 끝에 최종전에서 승리하는 이야기 말이지요. 90년대에는 「드래곤 퀘스트 - 용사 아벨의 모험(아벨탐험대)」, 「드래곤 퀘스트 - 다이의 대모험 (타이의 대모험)」같은 작품들이 그 흐름을 대표했고, 조금 결이 다르더라도 「마동왕 그랑죠(슈퍼 그량죠)」같은 작품 역시 넓게 보면 결국 모험의 서사에 속합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소위 ‘원나블’이 장기 연재물의 상징이 되었고, 2020년대 기준으로는 「귀멸의 칼날」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장송의 프리렌」은 같은 모험물의 외형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바라보는 방향은 꽤 다릅니다.
이 작품의 제목에 붙은 장송(葬送)은 죽은 이를 장사 지내어 보내는 일을 뜻하지요.
그러니 이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마왕을 쓰러뜨리러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끝난 모험 이후의 이야기, 그리고 떠나보낸 이들을 뒤늦게 이해해 가는 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주인공 프리렌은 천 년 이상을 살아가는 엘프 마법사입니다.
인간에 비해 시간이 너무나 길게 흐르는 존재지요. 그래서 인간과 함께 보낸 10년조차, 프리렌에게는 어쩌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다릅니다.
마왕을 쓰러뜨린 뒤 50년 후 다시 만난 용사 힘멜은 이미 늙어 있었고, 프리렌의 시간 감각으로는 잠깐이라 여겼던 세월이 인간에게는 인생 대부분에 해당하는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 직후, 힘멜은 세상을 떠납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모험의 끝”이 아니라, 끝난 줄 알았던 관계가 사실은 이제야 시작되는 순간에서요.
그래서 프리렌은 일반적인 판타지 주인공들처럼 뜨겁게 외치거나, 감정의 파동을 크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늘 고요하고, 담담하고, 어딘가 한 발 떨어져 있습니다. 싸움조차 격렬한 긴장감보다는 차분한 호흡 속에서 지나가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보다 보면 전투 장면마저 이상하게 시끄럽지 않습니다. 마치 명상 음악을 틀어둔 채 아침 바람을 맞는 듯한 기분으로 보게 됩니다.
한 편이 끝나고 엔딩 OST가 흐를 때면, 정말로 무언가를 본 기분보다 잠시 오래 생각에 잠겼다가 돌아온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강한 주인공의 위력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살아온 존재가, 너무 늦게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짧게 살기 때문에 서두르고, 사랑하고, 후회하고, 기억합니다.
반대로 프리렌은 너무 오래 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강한 마법사 엘프가 활약하는 판타지라기보다, 시간의 크기가 다른 존재가 인간의 마음을 뒤늦게 배워가는 기록처럼 느껴집니다.
하이터가 세상을 떠나며 페른을 프리렌에게 맡기는 장면 이후부터는, 이 애니메이션의 결이 더 분명해집니다.
프리렌은 페른과 함께 여행하며 마도서를 모으고, 마물을 물리치고, 여러 마을을 지나갑니다. 겉으로만 보면 여느 판타지 모험담과 다를 것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 모든 여정 위에 과거의 기억, 남겨진 말들, 뒤늦은 이해가 차곡차곡 덧씌워집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건 자체보다도, 사건 사이의 여백이 더 오래 남습니다.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보다, 왜 그 말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지가 더 크게 다가오지요.
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장송의 프리렌」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흔히 보이는 이세계물이나 환생물처럼 설정을 겹겹이 덧칠하지 않아도, 엘프라는 한 가지 설정만으로 시간과 관계의 비대칭성을 이렇게까지 조용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상징 몇 가지 중에 미리 알고 보면 좋을만한 내제적 설정을 소개합니다.
힘멜의 동상: 프리렌이 가는 곳마다 있는 힘멜의 동상은 단순히 영웅을 기리는 목적을 넘어, '언젠가 혼자 남겨질 프리렌이 외롭지 않게 하려는' 힘멜의 배려였다는 점이 '상실 이후의 이해'와 잘 맞닿아 있습니다.
꽃말과 마법: 프리렌이 가장 좋아하는 마법인 ‘꽃을 피우는 마법'처럼 사소해 보이는 마법들이 사실은 과거 동료들과의 추억을 매개하는 장치라는 점도 '기억 복원'이라는 주제를 강화해 줍니다.
다만, 이 작품의 호흡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초반 1~3화 정도는 너무 잔잔해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극적인 자극이나 빠른 전개를 기대하면 더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 느린 초반부를 조금만 견디고 나면, 왜 이 작품이 이런 속도를 택했는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를 급히 몰아가지 않고, 인물 하나하나의 과거와 감정이 스며들 시간을 충분히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는 ‘심심한 작품’이 아니라, 조용한 방식으로 깊어지는 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프닝도 인상적입니다.
요아소비가 부른 「용사(勇者)」는 작품의 서사와도 잘 맞물립니다. 이미 모험이 끝난 뒤의 세계를 다루면서도, 역설적으로 ‘용사’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지요.
https://youtu.be/ZT7wfk8ZJKw?si=jge1L6rliqELHphM
작화 역시 과장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빈약하지도 않습니다.
작품 전체의 정서처럼 적당히 절제되어 있고, 그래서 더 오래 보기 편합니다. 화면이 현란하게 눈을 자극하기 보다는, 이야기가 가진 온도에 맞춰 조용히 따라갑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 '힐링 모험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잔잔해지는 느낌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이 단순한 힐링물로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상실을 너무 늦게 이해한 존재가, 지나간 관계를 다시 배우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타인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이야기.
끝난 줄 알았던 모험이, 사실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되는 이야기
그래서 이 작품은 조용하지만 가볍지 않고, 따뜻하지만 마냥 밝지만은 않습니다.
잔잔한데도 오래 남고, 큰 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깊게 스며듭니다.
천천히 보아야 더 좋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 떠올리게 해 준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우리도 어제까지의 기억을 떠올리며 소중한 것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프리렌처럼 기억 속에서 지킬 것은 지키고, 바꿀 것은 바꾸면서 나아갈 수 있겠습니다.
#장송의프리렌 #애니메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