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y G 고전 칼럼 6> 틀 인간애

- 공자 <논어> 2

by Tasty G

<Tasty G 고전 칼럼 6>


틀 인간애


- 공자 <논어> 2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으로 큰 사람이 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함을 일컫는다.


“子曰 君子不器

(자왈 군자불기)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2절)


공자는 “정말로 큰 그릇이라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김용옥 선생은 이 구절을 “리더란 국한된 기능에 갇혀서는 안 된다.”라고 해석했다.


리더란 조직원들의 고충을 처리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자리여야 한다. 조직원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기에 틀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큰 그릇과 리더란 그래서 특정한 모양을 띌 수 없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가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워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5절)


‘어두워짐’은 틀에 갇힘을 의미한다. 배움이란 타인의 틀(사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하지만 타인의 틀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타인의 틀에 갇힌다. 자신의 틀을 잃어버린다.


유연함도 함께 없어지며 어두움 즉 맹목성에 잠식된다. 배움은 용기다. 제대로 배우려면 그 어떤 뛰어난 자의 틀에도 이견을 제시할 만큼 깨어있어야 한다. 주체적으로 생각해야한다.


반대로 주체적인 생각만 하고 타인의 틀과 소통하지 않으면 위험해진다. 편견, 아집, 독선, 독단의 깊고 어두운 늪에 빠져 균형을 상실한다. 자의적 해석을 객관이라 착각한다. 자기정당화를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다. 듣는 법을 잃는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소한 일에도 날이 선 발톱을 드러낸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을 비관하며 우울에 잠식당한다.


하지만 배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배울 수 있을까?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다. 배우기만 하거나 생각하기만 하는 극단에 치우치기 쉽다. 우리는 부족하고, 이상하고, 복잡한 존재일지 모른다. 부족하고, 이상하고, 복잡하면 어떠나. 있는 그대로, 딱 그만큼만 인정하면 된다.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공자가 말했다. “유야 내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6절)


소피스트(그리스의 지식인)에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라.”라고 호소한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無知의 知)’를 논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타인과의 만남은 짜릿하다. SNS가 있었다면 공자와 소크라테스도 ‘맞팔’ 했으리라.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한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다. 인간에게는 의식과 더불어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핵심이다. 무의식이란 ‘인식하기 불가능하나 분명히 존재하는 의식의 또 다른 영역’이다.


무의식은 의식이 ‘부정적 자극(외부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부정적 요소) 수용을 거부’하기에 존재한다. 무의식은 의식이 외면한 부정적 자극을 흡수한다. 이렇게 흡수된 부정적 자극은 무의식의 영역에 머물며 마음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무의식에 흡수된 부정적 자극은 꿈을 통해 해소된다. 프로이트 사상의 요약이다.


공자가 프로이트를 만났다면 “너의 무의식을 알아차려라.”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사회는 매번 “자신을 아는 것은 힘들다.”라는 선언을 갱신한다. 하지만 무의식에는 너무나도 많은 자신의 파편이 숨어있다.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니다. 단순한 정신질환 연구도 아니다. 질문이다. 끊임없이 질문해 무의식을 엿보려는 시도다. 엿봄보다 시도가 중요하다!


신해철은 마지막으로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긴 여행을 끝내겠다고 노래했다. 삶은 자신을 알아가는 여행일 순 있다.


(미셸 푸코는 거부하겠지만)

(순수한)정신분석학처럼 인류가 쌓은 (순수한)지식과 예술에 기댄다.

“자신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임방문예지본 자왈 대재문 예 여기사야 녕검 상 여기이야 녕척)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훌륭하도다, 그 질문이여!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하고, 상은 질서정연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야 한다.”

(논어 제3편 팔일 제4절)


공자의 메시지는 오늘의 예식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공자는 형식보다는 진심을 중시했다. 우리는 장례식, 결혼식, 돌잔치에 진심을 들고 가는 것일까, 봉투를 들고 가는 것일까.


결혼식 사회를 보며 식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결혼식 팀이 식장 문 앞에서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선 선수들처럼 준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가족, 친지 및 친구들과 단체 사진 촬영을 할 때면 식장은 이미 다음 결혼식 팀으로 가득 찬다.


결혼식장의 이윤에 앞에 충분한 축하는 사라졌다. 하객들은 축하의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식당으로 내몰린다. 축제의 장이어야 할 식당이건만 흥(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식권이 제왕이다. 식장에서 준비 자세를 취하던 다음 결혼식 팀이 이번에는 식당으로 몰려든다. 식당에서조차 신부 신랑과 충분히 인사하기 어렵다.


돌잔치는 어떤가. 아기가 태어나 일 년을 살아내기 힘들었던 시절, 일 년을 무사히 살아낸 아기를 축하하던 돌잔치는 상술에 물들어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


어떤 부모들은 “돌잔치가 결혼식보다 축의금이 많이 남는다.”라고 예찬한다. 돌잔치가 카드 돌려막기인가. 아기가 아닌 ‘봉투 릴레이’가 주인공이 된 세태다.


‘극단적 편리함 추구’의 만연 또한 예식문화의 풍경을 바꿨다. 그렇다면 편리함은 무엇을 남기나. 남는 시간은 어디에 쓰나. 우울감? Netflix Youtube Meta?


불편하고 검소하게 예식을 치른다면 죽음에 충분한 애도를 표할 수 있다. 신부 신랑 아기를 충분하게 축하할 수 있다. 흥을 나눌 수 있다. 인간애는 이렇게 싹튼다! 이렇게 인간애를 이어갈 수 있다.


인간애를 기억하면 서로가 귀해진다. 귀해지면 비교가 사라진다. 나은 삶의 포문이 열린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던 것처럼 산 자가 산자를 구한다. 논어의 진심은 휴머니즘, 곧 인간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