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인식과 조형, 과정의 가치

<Tasty G 문화예술 리뷰 3>

by Tasty G

- 작가: 양시영 / 전시명: Hello, world!

- 2026년 2월 4일 ~ 28일

- 우제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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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철학의 핵심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선험적으로(태어날 때부터) 만물의 형태가 저장 되어있다. 눈에 보이는 만물의 형태가 머릿속에 저장된 만물의 형태와 일치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만물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다.’


칸트의 철학은 한때의 철학이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탐구하는 데에 여전히 유효하다. 칸트의 성과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은 비슷하다. ‘경험의 유폐성(경험은 공유할 수도, 공유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한 이유는 첫째,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비슷한 몸(뇌)을 가지고 있다. 둘째, 우리는 사회적으로 비슷한 인식을 갖도록 훈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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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인식 조형’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식한 대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을 때 예술이 된다. 훈육은 비슷한 인식 형성과 더불어 비슷한 인식 조형까지 조장하였다. 예술이 어려운 이유다.


양시영 작가의 만물에 대한 인식은 고유한 인식이다. 훈육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시영 작가는 빈센트 반 고흐처럼 ‘예술수저’다. 이러한 작가들의 수저는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예술에 새로운 양분을 떠 넣는다.


그러나 16세기 전까지 심지어 종교적인 것으로서 성스럽게 여겨지던 이러한 ‘다름’에 대해서 사회는 낙인을 찍었고, 이러한 낙인은 여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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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위기는 아서 단토가 주장한 것처럼 예술이 일정한 방향으로 발전한 ‘미술사의 서사’가 끝나서 온 것도 아니고, ‘설득력 있는 이론의 실종’에서 온 것도 아니며, ‘기본기와 기술을 상실한 지나친 의미 부여’에서 온 것도 아니다.


다름에 대한 낙인이 여전히 건재하고, 다름에 대한 관용 역시 훈육을 통해 일정한 방식으로만 작용하고, 다름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는 식견이 부족하고, 식견이 있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싫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알아차릴까 봐 화를 내는 건강하지 못한 자기방어의 만연으로 인해서 예술은 위기를 맞았다. 아니 예술은 언제나 위기였지만 동시에 언제나 위기를 훌쩍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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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영 작가의 작품은 ‘순수한 만물(만물 자체)’이지만 관객의 시선은 순수성 너머에 자리한 서글픔에 머문다. 작가의 모든 작품에는 작품 속 소재를 향한 작가의 우주 같은 사랑이 담겨있다. 하지만 소재가 주는 사랑은 소재가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일정한 크기로 계산된 사랑이다. 커다란 사랑이 담겨있지만 서로 다른 크기의 사랑이 담겨있기에 작가의 작품에는 내밀하게 눈물이 고여있다.


또한 작가의 조형에는 오랜 시간 연습한 대가들의 조형을 연상케 하는 ‘조형 구성’이 조직되어 있다. 크지만 크지 않고, 작지만 작지 않고, 혼잡하지만 균형 잡혀 있고, 복잡하지만 단순하고,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고, 보이지만 안 보이고, 안 보이지만 보이고, 신체미를 자아내는 비율이 망가져 있지만 아름다운 조형은 작가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예수(예술수저)의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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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을 연구하며 ‘세계는 주어진 것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변모했다.’라고 밝혔다. 작가의 작품은 디지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미디어 충격’이다. 알고리즘이라는 ‘촘촘하게 계산된 인위적인 세계관’이 (거짓)취향 생산과 편가르기(극단적인 이념 놀이: 극단적인 이념 갈등은 놀이처럼 여러 단계의 규칙을 통해 형성됨)라는 폐해를 낳고 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이 절실한 시대이기에 작가의 작품은 더욱 의미 있다.


아날로그에 비교했을 때 디지털이란 ‘과정의 생략’이다.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개인을 기업으로 바꾸어 놓았음’을 지적했다. 디지털처럼 과정은 사라지고 기업처럼 결과의 효율성만을 귀하게 여기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급속도로 만들어진 부실한 내용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빠른 개업과 더 빠른 폐업을 반복하고 있다. 과정이 녹아있고 디지털보다 효율을 덜 내세우는 아날로그 감성은 그래서 ‘힙’해졌을 것이다.


‘계절의 과정’은 사계절을 견뎌내게 한다. 계절이 변화하는 과정에 몸이 서서히 적응해 가기에 우리는 살 수 있다. 예술도 과정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덧칠해진 물감, 종잡을 수 없는 선의 방향, 감출 수 없는 스케치(?)가 드러내는 ‘예술의 과정’은 작품의 예술성을 함께 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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